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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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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7 ㅣ No.317

[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상)


80년 만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돋보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 기념역사전시관’ 전경.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 기념역사전시관’(이하 역사전시관)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한 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2009년 9월 20일 개관했다. 2007년 4월 6일 새벽, 누전으로 추정되는 큰 불로 왜관수도원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이후 수도형제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많은 은인들 덕분에 2009년 수도원에 성당과 본관을 세우고 이에 맞춰 역사전시관도 함께 열 수 있었다.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수집 정리한 선배 수도자들의 소중한 유품과 유물, 진기한 자료들이 화재로 거의 소실됐기 때문에 전시품들은 소박하다. 다행히 화마에도 살아남은 서울 백동수도원, 함남 덕원수도원, 북간도 연길수도원 그리고 왜관수도원의 유물들과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역사전시관 개방 시간은 오전 9시~11시30분, 오후 1시~5시30분까지다.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겸재정선화첩’에 수록된 ‘금강내산전도’.



역사전시관 유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8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을 꼽을 수 있다. 이 화첩은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최고의 거장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 일반산수화, 고사인물화 등 모두 21점의 다양한 작품들을 담고 있다. 특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과감한 필체로 그린 ‘금강내산전도’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2009년 9월 20일부터 10월 11일까지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현재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고 영인본만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 진출 백주년을 기념해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2005년 영구임대 형식으로 왜관수도원에 돌려준 것이다. 화첩이 먼 길을 돌아 우리 품에 돌아온 연유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겸재정선화첩’은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가 독일로 가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1909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 초청으로 2명의 베네딕도회 선교사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파견됐다. 한국에 진출한 첫 남자 수도회다. 이 결정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분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장상이었던 베버 총아빠스였다. 선교 베네딕도회원들은 서울 혜화동(현 서울 가톨릭대학교 자리)에 땅을 구입해 백동 수도원과 학교(숭공 기술학교, 숭신 사범학교)를 세웠다. 베버 총아빠스는 자신이 파견한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선교 활동을 살펴보기 위하여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수도자이며 예술가였던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문물을 접하고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매료됐다. 첫 번째 여행에서 받은 감명과 견문을 바탕으로 1915년 독일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분도출판사에서 2012년에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판)라는 제목으로 여행기를 출간했다. 두 번째 방문에는 무비카메라를 갖고 들어와 일제의 탄압으로 말살되고 있는 한국의 민속문화를 필름에 담았다. 이를 토대로 1927년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해 한국 문화와 전통을 독일에 알렸다.

1977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지하실 공사 때 우연히 발견한 영화 원본을 토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으로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2009년 DVD를 제작했고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됐다. 이 영화에는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금강산을 방문한 장면이 나온다. 금강산의 신비로움에 깊은 감동을 받은 베버 총아빠스는 1927년 독일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제목으로 금강산 여행기도 발간했다. 방문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갈 때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고미술품들을 구입했는데 그 가운데 ‘겸재정선화첩’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화첩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 진열장 안에 다른 한국민속품과 함께 전시됐다. 반세기 동안 어느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1975년 독일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 유준영(전 이화여대 교수)씨가 이 작품의 소재를 알고 직접 방문해 확인한 후 화첩의 존재를 국내 미술학계에 알렸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왼쪽에서 두 번째)가 첫 한국 방문 기간 중인 1911년 4월 17일 경기도 안성성당으로 가던 길에 교우촌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

 

 

마침내 ‘겸재정선화첩’은 80년 만인 2005년 10월 29일 오전 11시30분 경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 품에 돌아왔다. 귀환 여정에는 우리 수도원 선지훈(라파엘) 수사 신부의 공로가 숨어 있다. 선지훈 신부는 독일 유학 시절 화첩에 관해 들었고 한국 반환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당시 같은 학생 수도자 신분이었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와 친분을 쌓고 한국 반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를 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 덕분에 드디어 2005년 10월 4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화첩의 한국 반환을 결정하고 왜관수도원과 합의서를 교환했다.

반환이 결정된 이후 대두된 문제는 화첩을 한국에 안전하게 수송하는 방법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 신부가 직접 들고 오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선 신부는 “독일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11시간 동안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화첩을 지켰다. 왜 이토록 고지식하게 행동했는지 지금은 실소가 난다”고 고백했다. 국보급 문화재를 가방에 넣어 직접 들고 왔으니 그 긴장감이야 오죽했겠는가.

2005년 10월 22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열린 화첩 반환식에서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는 사랑과 존경과 신뢰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님은 한국 문화에 심취했고 진정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화첩이 독일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높이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인과 한국 역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겸재정선화첩’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28일,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사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중)

한국교회 전례 쇄신 이끈 수도회 발자취 볼 수 있어

 

 

1940년 7월 14일, 연길수도원의 백화동 아빠스 주교가 사제 수품 은경축을 맞아 오늘날처럼 ‘신자들을 향해’ 장엄미사를 봉헌한 장면.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 기념역사전시관에는 한국천주교회 전례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진이 한 장 있다. 1940년 7월 14일, 사제 수품 은경축을 맞은 연길수도원의 백화동 테오도로(Theodorus Breher, 1889~1950) 아빠스 주교가 사제단, 신자들과 함께 거행한 장엄 미사로, 오늘날처럼 ‘신자들을 향해’(versus populum) 미사를 거행하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20년 전인 당시 유럽에서는 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주교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적’ 미사를 공식적으로 거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지금 봐도 참으로 혁신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1909년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출발한 베네딕도회는 1920년 원산대목구와 연길대목구를 맡으면서 1927년 함경남도 덕원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북간도 연길에도 연길수도원을 세웠고 아빠스들은 대목구장으로 주교품을 받았다. 20세기 초 유럽 교회에서 베네딕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례운동이 발전했듯이 한국의 베네딕도회원들도 1930년대부터 미사 개혁을 중심으로 ‘전례운동’을 추진했다. 그 바탕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하느님 백성으로 바라보는 공동체적 사상이 숨쉬고 있었다.

덕원과 연길의 베네딕도회원들은 서로 협조하며 전례운동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연길수도원의 「미사 규식」과 덕원수도원의 「미사 경본」이 만들어지게 됐는데 이는 특히 미사 전례 쇄신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덕원수도원에서는 평양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홍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의 주도로 1930년 초부터 한국인 평수사와 수녀를 위해 ‘한국어 미사 통상문’을 등사판 책자로 펴내는 작업을 시작해 1932년 대림 제1주일부터는 매일의 미사경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신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신자들이 더욱 충만하고 능동적으로 성찬례에 참례할 수 있게 됐다.

연길수도원에서는 1931년, 연길대목구 용정본당 주임 박 콘라도(Conradus Rapp, 朴敎範, 1896~1932) 신부가 중심이 돼 미사를 거행하는 4가지 양식(규식)을 담은 「미사 규식」을 우선 등사판으로 만들어 보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식 출판을 준비하던 박 콘라도 신부는 1932년 6월 5일 길을 가던 중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배 발뒤노(Balduinus Appelmann, 裵光彼, 1902~1975) 신부가 박 신부의 유지를 받들어 1933년 정식판 「미사 규식」을 발간했다. 이 소책자를 저렴한 값에 구입할 수 있게 된 신자들은 미사의 구경꾼이 아닌 능동적 동참자로서 힘차고 아름다운 소리와 리듬으로 한국어 미사경문을 낭송하며 사제와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1933년 초, 덕원수도원에서 낱장 한국어 미사경문을 한 권으로 묶어 최초의 ‘한국어 미사 경본’을 등사본으로 펴냈다. 이를 토대로 1935년에 「미사 경본-주년 미사」와 「미사 경본-성인 첨례 미사」를, 사순 시기 미사경문들을 보충해 「미사 경본-봉재 때 미사」를 출간했고, 마침내 1936년 체계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미사 경본」이 세상에 나왔다.

「미사 규식」과 「미사 경본」은 수도원은 물론 연길대목구와 원산대목구 본당들에서 신자들을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킨 교과서 역할을 했다. 원산대목구 회령본당 미사 전례에 관해 당시 본당 수녀였던 제르트루트 링크(Gertrud Link, 1908~1999) 수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모든 미사는 평신도와 사제가 한국어로 주고받는 공동미사다. 미사 때마다 바뀌는 기도문은 소년이나 선창자가 독서대에서 낭독한다. 예물봉헌 때 신자들은 제대 앞 계단까지 나가 예물을 바쳤고 영성체가 시작되면 수많은 신자가 기뻐하며 제대 앞으로 나아간다. 제대 쪽으로 다가가는 신자들을 막는 난간은 없다. 미사 전체가 역동적이고 다채롭다. 신영세자들은 그의 감각과 정신과 마음을 모두 에워싸는 이런 신앙생활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다. 미사에서는 각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스스로 기도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봉헌한다.”

성음악은 신자들을 미사 전례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성가집인 「朝鮮語聖歌」(조선어성가)는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1923년 첫 출판됐고 1928년 재판됐으며, 10년 후인 1938년에는 가장 뛰어난 성가집이라 할 「가톨릭성가」가 출간됐다. 덕원수도원의 진 볼프라모(Wolframus Fischer, 陳道光, 1903~1938) 신부가 이전 성가책에서 진부하고 아름답지 못한 곡을 빼고 아름다운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의 새 노래들로 엮어 전례주년에 따라 213곡을 작곡, 편집했다. 이 두 성가책의 많은 곡들이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가톨릭성가」에 ‘Trad. Melody’(전통 멜로디)로, 작곡자와 출처 미상곡으로 들어가 있다. 이 지면을 빌려 필자는 한국교회가 준비하고 있는 새 성가책에는 이 곡들의 작곡자와 출처를 정확히 밝혀주길 희망한다.

성당 건축 분야에서도 연길수도원의 안 알빈(Albuinus Schmid, 1904~1978) 신부는 쇄신과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설계 건축한 연길대목구 돈화본당 제대는 신자들을 향해 놓여 있다. 알빈 신부는 왜관수도원에 재파견된 후에도 수많은 성당을 전례개혁 정신에 따라 건축했다.

베네딕도회 수도 삶에서는 전례가 신앙생활이고 신앙생활이 곧 전례다. 그들이 거행하는 전례는 그들 삶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전례 중심적인 수도 생활의 모태 안에서 많은 전례서들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베네딕도회원들이 발간한 많은 전례서들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한 봉사와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5일,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사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하)

신앙을 위해, 형제를 위해 생명 바친 자취 또렷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사용하던 성작. 1949년 덕원수도원에서 1952년 극적으로 왜관수도원까지 옮겨졌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기념전시관에는 오래된 성작이 한 점 있다. 성작 다리 부분에 HIC EST CALIX SANGUINIS MEI(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는 성찬제정축성문 라틴어가 음각으로 새겨 있다. 평양교화소에서 1950년 2월 7일 순교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1877~1950) 주교 아빠스의 성작이다. 이 낡은 성작은 북녘 땅에서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수도자들의 희생을 웅변하고 있다.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에 자신들의 피를 봉헌했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추방될 당시 차부제였던 김영근 베다(1918~2002) 신부가 이 성작과 수도원 인장,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의 편지봉투 열람용 칼을 몰래 감춰 가지고 나왔다. 성작은 덕원에서 평양으로 이후 서울, 부산, 대구를 거쳐 1952년 왜관에 이르기까지 김 베다 신부의 피난 여정에 동행했다. 김 베다 신부는 살아남은 한국인 수도자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군이 원산에 진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탄압정책을 시작했다. 특히 함경도 지역 천주교 총 본산인 덕원 수도원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1946년 3월 수도원 토지 몰수를 시작으로, 1948년 12월 1일 수도원 당가 엄 다고베르토(Dagobertus Enk, 1907~1950)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1949년 4월 28일에는 인쇄소 책임자 배 루도비코(Ludovicus Fischer, 1902~1950) 수사가 반(反)공산주의 불온 문서 인쇄 혐의로 체포됐다. 마침내 1949년 5월 9일 밤부터 5월 11일 밤까지 모든 유럽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성직수사들이 체포되고 한국인 수사들이 추방됨으로써 덕원 수도원이 폐쇄됐다. 체포된 이들은 평양교화소와 강제수용소들을 거치면서 옥사, 피살, 병사 등으로 순교했다.

왜관수도원이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909년 한국에 파견된 첫 베네딕도회 선교사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1913년 아빠스로, 1921년 원산대목구(후에 함흥대목구) 주교로 서품됐다. 말년에 천식 등 지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매우 쇠약한 몸으로 제일 먼저 체포되어 평양교화소에 수감됐다. 이 작은 노인의 감방은 온갖 악취를 풍기는 구덩이 같았다. 작은 탁자와 변기뿐인 이곳에서 체포될 당시 입었던 속옷 위에 푸른 죄수복만으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했다. 씻을 물도 제공되지 않았고 다른 수감자들보다 적은 쌀로 버텨야 했다. 결국, 3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오전 6시 주님 품에 영원히 잠들었다.

성작 옆에는 작은 성합이 있다. 옥사덕수용소의 유물이다. 중범죄자로 평양교화소에 남은 13명의 독일인과 한국인 사제와 수사들을 제외한 59명의 독일인 남녀 수도자들은 1949년 6월부터 1954년 1월 8일 독일로 송환될 때까지 자강도 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옥사덕’에서 수용소 생활을 했다. 잔악한 수용소 소장의 감시 아래 중노동과 질병으로 13명이 순교했다. 1950년 9월,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자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자강도 만포로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수난 중에서도 이들은 매일 미사를 거행하며 영적 힘을 얻었다. 감시병 몰래 밀밭을 가꾸어 제병을 만들고 산머루로 즙을 내 포도주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십자가의 여정을 ‘성합’이 대변하고 있다.

 

순교자의 유물 가운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발행한 상본을 볼 수 있다.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1890~1950) 원장신부의 선종 상본이다. 여기에는 1956년에 순교했다고 잘못 적혀있다. 당시 독일 수도원에서는 홍 루치오 원장신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원수도원 원장이자 함흥대목구 총대리인 홍 루치오 원장신부는 1949년 5월 9일 밤 신 주교 아빠스와 함께 체포돼 평양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50년 10월 3일에서 5일 사이 인민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 피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홍 신부는 「미사경본」을 비롯한 많은 전례서와 영적서적을 펴냈다.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인자해서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감옥에서 선종하자 홍 루치오 원장신부가 덕원 수도원의 유일한 장상으로 책임을 다했다. 덕원에서 쫓겨난 후 평양에 숨어들어온 한국인 수사들과 비밀 쪽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감옥 내부 사정을 알려주고 아픈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의약품과 생필품 등을 부탁했다. 현재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문서고에 이 쪽지들이 보관돼 있다.


- ‘옥사덕수용소’에서 신앙을 지킨 수도자들 신심을 대변하는 성합.

 

 

북녘의 순교자들은 피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도형제들이나 신자들과 운명을 함께하려다 목숨을 바쳤다. 순교자들은 한민족과 동고동락하며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고 박해 중에도 하느님만 찾으며 서로 섬기고 사랑했다. 종교와 이념의 경계선에서 외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발생한 순교라기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한 결과였다. 신앙을 위한 순교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사랑의 순교’였다. 왜관수도원은 2007년 5월 10일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1949년에서 1952년 사이에 북녘 땅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한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시성 운동을 시작했다. 시복시성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 덕원수도원 원장 홍태화 루치오 신부의 상본.


※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2일,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사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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