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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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마르치온 주의: 그리스도교 성서의 단일성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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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53

[교부들의 가르침] 마르치온 주의


그리스도교 성서의 단일성 와해

 

 

"네 어린 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바빌론에 유배당한 이스라엘의 쓰라린 체험이 담긴 시 137은 이런 모질기 짝이 없는 언사로 끝난다. 시편을 읽으며 정성스레 기도(거룩한 독서)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런 구절 앞에서 심한 곤혹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보복의 하느님' 역시 열심한 신앙인의 양심을 괴롭히곤 한다. 솔직히, 어떻게 이런 모습의 하느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초세기 교회를 뒤흔든 마르치온(85~160)의 이설(異說)은 이렇게 애초에 대단히 복음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그의 열망은, 당대 교회 공동체에서 유다이즘과 별반 다름없이 시나브로 희석되어가고 있던 복음 메시지를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애초의 순수함 그대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지극히 어지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순전히 당신 자비로써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싱싱한 목소리로 다시금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결정적으로 어긋난 방향을 선택하고 만다. 즉, 신약 성서를 구약 성서로부터 철저히 분리시켜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교 성서의 단일성을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나아가 신약 성서 안에서도 유다교적 흔적이 조금이라도 묻었다고 보이는 것은 다 제거해 버리고, 바오로 서간과 루가 복음(루가는 바오로의 제자이므로)을 중심으로 성서 목록을 완전히 새로 꾸미기에 이른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대립명제'에서 다음과 같이 복음의 하느님과 율법의 하느님을 뚜렷이 대립시킨다. 즉 전자는 무엇보다 어진 하느님이요 구원자로서 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스스로의 정체를 밝혀 주신 반면, 후자는 무엇보다 정의의 신이요 심판자로서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게 되면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는 자명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은 성서를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적 명오(明悟)인데, 이것이 근본에서 뒤흔들리므로 신앙 전체의 색깔이 변질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선 신약과 구약의 분리는 자연스레 영지주의(靈智主義)적 영육 이원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론의 수준에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사람의 육신을 취하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 비슷한 꼴을 하고 세상에 왔다 가셨다는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이 등장하게 된다. 육신은 '데미우르고스'라고 부르는 구약의 창조신이 만든 악한 물질계에 속한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그런 육신을 취하실 수 있겠는가. 나아가 윤리의 수준에서도 혼인을 죄악시함은 물론 교회 전례에서 포도주까지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는 극단적인 엄격주의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쯤 되면, 신앙은 현세 생활과 철저히 분리되기 마련이다. 세상과 복음은 도무지 어울릴 길이 없는 적대자로 여겨질 따름이다. 신앙 생활은 철저한 현세 기피 혹은 염세(厭世)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당대 교회가 어느덧 구체적 현실에서 복음 전언(kerygma) 원래의 생기를 많이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마르치온의 이설이 대단한 파괴력과 영향력으로 퍼져 나가 일부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존속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리 추측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교부 시대를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만, 고대의 마르치온 열교(裂敎) 현상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뚜렷한 교훈과 경고를 주고 있다할 것이다.

 

우선 교회와 그 공동체들이 법조문이나 일사불란한 조직 관리, 윤리적 훈계 등에만 의지하며 다양한 형태로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질 때, 그리하여 복음에 원래 내재한 저 엄청난 해방 체험과 그 근본적인 새로움(novum)을 간과하게 될 때, 마르치온주의의 아류(亞流)는 형태만 달리하고 언제나 새로이 나타나서 큰 세력을 얻는다는 것을 후대의 교회사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마르치온 이설의 근본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성서 해석의 정수를 놓쳐버린 데 기인한다는 점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새 계약의 장본인이시지만, 새 계약은 옛 계약을 파괴하지도 대체하지도 않는다. 신약은 오히려 구약의 문자에 숨은 속뜻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실현하고 완성한다. 그래서 "구약 안에서 변해야하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뜻이다"(오리게네스)고 했고, 그리스도인이 구약을 읽을 때는 "신비를 덮고 있는 너울"(mysterii velamen)을 벗겨내고 비로소 "너울을 벗은 신비"(mysterium velatum)를 보아야 한다고도 했다(성 베르나르도). 신구약의 이러한 역동적 일치에 대해서는 앙리 드 뤼박이 대가다운 필치로 잘 설명해준 바 있거니와('중세 주석'), 오늘날도 교회의 신학이 이 안목을 놓치면 말씀을 자기의 신학적 전망에 끼워 맞추려는 유혹에 빠지거나 기껏 본문에서 윤리적 교훈만을 뽑아낼 줄 밖에 모르는 무능력에 노출되기가 십상이다. 예컨대, 이미 유행이 지났지만, 한 때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진영 일부에서 성서를 구미에 맞게 삭제하고 오려 붙이던 경향이 사실은 마르치온주의의 새 버전(version)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제나 오늘이나 말씀을 내 신념에 끼워 맞출 것이 아니라 내 신념을 말씀의 빛으로 식별해야 함을 고대의 마르치온 이설은 웅변으로 경계해 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2월 23일, 이연학 신부(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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