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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14: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상) 성 필립보 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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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1 ㅣ No.789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4)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상) : 성 필립보 네리


“험담은 바람에 흩어지는 닭 깃털과 같다”

 

 

성 필립보 네리봄이 왔습니다. 만개하는 꽃들의 성찬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꽃향기와 새소리가 우리의 감각에서부터 내면의 생명력을 깨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부활성야를 밝히는 부활초처럼 우리 존재를 비추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생동하는 자연과 함께 이제야 조금씩 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한들, 봄이 왔다 한들, 나를 짓누르고 고심하게 하고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근심들이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 옆에서 빛을 밝히는 부활초에 눈길을 보내면서, 찬란히 피어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내 마음으로 돌아와보면, 문득 세상의 계산과 예측과 상관없이 출구 없는 방에 빛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울함과 낙담의 한 가운데서 나는 어느새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나 봅니다.

 

봄날, 우울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오히려 더 큰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는 이 시절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압도하시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오신 것처럼 상처 입고 좌절한 심정을 잘 알아주고 때로는 인자한 웃음과 유머로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고, 독려하기에 앞서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는 성인들이 그리워집니다. 부활의 여운이, 들리지 않되 공간을 채우는 종소리처럼 가득한 이즈음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을 새롭게 발견하며 우리도 용기를 얻고 일상 안에서 부활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그런 분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바로 성 필립보 네리와 코베르티노의 성 요셉, 그리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입니다.

 

 

기쁨 속에 복음을 사는 삶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이자 화려한 예술의 도시였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삼촌에게서 상업가로서의 도제교육을 받았지만 젊은 시절 이미 그는 복음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는 생활에서 더 큰 기쁨과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삼촌을 떠나 로마로 갑니다. 애초엔 신학 공부를 염두에 두고 로마에 온 그였지만, 그에게는 복음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밤에는 카타콤바에서 기도하고, 낮에는 애덕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도시의 수도사’ 같은 삶을 그는 선택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우아함과 세련됨, 화려함이 숭상되었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애덕의 실천과 계명의 준수가 시대에 뒤처진 고루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며 주님의 좋으심과 선행의 아름다움을 전했습니다. 매일매일의 밥벌이에만 얽매이게 되는 가난한 사람이든, 자신의 부와 권력에 도취해 있는 상류층 인사들이든 그들이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애썼습니다. 그의 타고난 유머와 따뜻함, 촌철살인 같은 재치는 사람들을 위축감이나 거부감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화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이 35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계기가 생깁니다. 그것은 일찍부터 그가 자신의 중요한 소명으로 생각한 것이었는데, 로마로 오는 수많은 가난하고 지친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그의 고해사제인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와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형제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이제 그와 그의 형제회는 가난한 순례자를 위해 침대가 있는 집을 마련하고 그들을 돌보는 데 전념합니다. 이러한 애덕활동이 얼마나 큰 결실을 맺었는지는 형제회 설립 25년이 지났을 때, 그간 돌본 순례객들이 수십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필립보 네리 신부가 일찍부터 얼마나 아이들을 위해 애썼는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평신도 설교가이자 애덕의 사도로 이미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는 주변의 강한 권유로 1555년 마흔의 비교적 많은 나이에 비로소 사제직을 받습니다. 사제직을 받은 후 인도로 선교를 위해 떠나려 했지만, 한 고해사제로부터 “당신의 인도는 로마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로마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사제가 된 그는 사목자로서 따뜻한 마음과 헌신, 유머로 교우들을 돌봅니다.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웃의 험담을 즐겨하는 한 부인에게 준 그의 고해성사 보속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네리 신부는 그녀에게 닭의 깃털을 로마를 돌아다니며 뽑고 난 후 다시 돌아오라고 보속을 주었고, 이윽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성인은 그녀에게 다시 그 깃털을 모아오라고 명합니다. 그녀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닭의 깃털은 이미 바람에 다 흩어져 버렸으니까요. 이는 험담한 말이 상대에게 주는 피해는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느끼게 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은 뛰어난 사목자였으며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데 열정적으로 투신한 애덕의 사도이자 사회사목의 선구자였지만 또한 깊은 영성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고 거주하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에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오라토리오 회’를 창설했습니다. ‘기도방’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오라토리움’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름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전례를 거행하던 장소에서 따왔습니다. 일종의 수도회이지만 그는 일반적인 수도회와는 달리 수도원 건물이나 자세한 회헌과 서원 대신에 세상 안에서 ‘오직 애덕만을 규칙으로’ 삼아 함께 동고동락하는 공동체를 원했습니다. 오라토리오 회는 그 후에 구호활동만이 아니라 전례와 성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합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이미 생전에 로마의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위 성직을 내리려는 교황의 뜻도 완곡히 사양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1595년 5월 25일 모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십자가로 강복한 후 선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의 영성에 대해 그가 세운 오라토리오 회 회원이기도 한 현대의 저명한 영성학자 루이 부이에는 “그처럼 큰 초자연적 은총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신비적 체험을 일상의 상식과 잘 결합시킨 성인은 거의 없다”고 요약합니다. 한편 역시 오라토리오 회 회원이었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이 선택한 인생의 모토인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라는 문구 역시 그 창립자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닙니다”라는 성인의 말을 이 봄날에 마음에 새기며 그분과 함께 미소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0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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