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평화, 정의의 열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8 ㅣ No.1225

[기억, 아남네시스] 평화, 정의의 열매



평화란 사전적 의미로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함”, “평온하고 화목함”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전적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적 차원에서 누리는 마음의 평온함, 사회적 차원의 갈등 없음, 국가적 차원의 전쟁 없음을 뜻하는 말로 평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성경은 주로 이와 다른 측면에서 평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샬롬’, 신약성경에서는 ‘에이레네’가 ‘평화’를 뜻하는 말인데, 두 단어 모두 근원적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의미가 풀이된다. 평화는 온전히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만 충만하게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 끝 날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에게 선사하시는 이 평화는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며, 구원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구원이 충만하게 이루어질 때에야 이 세상과 인간 모두가 온전한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를 넘어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주실 수 있고 하느님 계신 곳에서만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제시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제시하는 평화가 이 세상과는 무관한 그런 평화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완성될 종말론적인 차원을 갖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구현해야 할 그런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는 만날 때마다 서로서로 평화를 비는 데서도 드러나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선포하는 산상설교의 참행복 선언에서도 구체화된다(마태 5,9참조).


평화는 끝없는 도전과 참을성 있는 대화와 불의를 극복하는 정의의 결과

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와대에서 정부 주요 공직자들과 만나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가는 끝없는 도전”이라고,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있다고,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사 32,17 참조)”라고 언급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1베드 3,11)하는 삶의 가치, 그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상호존중과 존경과 화합을 증진하는 대화의 중요성(사목헌장, 92항 참조),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사목헌장, 78항)라고 강조한 것이다. 특히 평화가 “정의의 결과”라는 말씀은 정의에 굶주리고 평화에 목마른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반향을 남겼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말씀은 성경의 말씀에 기초하여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바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되리라.”(이사 32,17) 하고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하였다. 하느님의 나라가 정의와 공정으로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공정이 자리 잡고 정의가 머무르는 평화로운 거처에, 걱정 없는 안식처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고 선언한 것이다(이사 32,1. 15-20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사목헌장, 78항)이라고 언급했다. 교부들은 사목헌장 제5장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를 통해 전쟁의 위협과 발발로 인한 극심한 고통과 곤경에 주목하면서 “정의와 사랑 안에서 평화를 견고하게 하고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협력하도록 촉구”(77항)했다.
 
또한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사목헌장,78항)라고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사야서와 사목헌장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우리에게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씀은 정의가 불의를 극복하는 역동성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위대한 사랑 또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정의는 불의한 구조와 제도를 척결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에서 비롯되면서 동시에 불의한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니라 그들 역시 포용해야 하는 사랑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정의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는 용서와 관용, 이 세상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는 자세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어르신 세대가 젊은이들에게 선사하는 가장 값진 유산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건설하여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선물하라고 당부한다. 또한 이 평화는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할 때 가능하다고 제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도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고 돈이라는 우상을 쫓으며 인간을 인간 욕구의 하나로 여기면서 소비욕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인간학적 위기를 진단하고, 돈이라는 우상,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해지는 현 세태를 비판한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대다수가 경제적 위기를 겪는 심각한 불균형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불균형이 시장의 절대 자율과 금융 투기를 옹호하는 이념, 곧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윤 추구를 보장하는 범세계화 현상, 곧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돈, 자본, 시장만이 중요시되고, 공동체, 공동선, 공공복지의 가치는 무력화된다. 부유한 나라와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 계속되며, 이는 사회 저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한국사회는 이 모든 현상이 가장 잘 집약된 사회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돈만이 중요해지고, 사람은 돈의 소유 정도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마천루 타워팰리스와 판자촌 구룡마을의 공존, 그리고 구룡마을 철거 논란, 요즈음 연일 제기되는 우리 사회 곳곳의 ‘갑질 논란’에서도 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통해 드러난 교수가 학생에게 하는 갑질, 폭언과 폭행으로 드러난 기업 오너 가족이 직원에게 하는 갑질, 백화점이나 식당 손님이 종업원에게 하는 갑질 등 우리 사회는 어느새 권력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온갖 몹쓸 짓을 버젓이 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에 「복음의 기쁨」에서 가난과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경제정책에 반영하며,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지향하는 경제활동을 하라고 요청하였듯이(202-20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모두가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많은 문제들, 곧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 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세 가지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가시화된다. 셋째,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앞장서는 것이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평화의 건설, 우리 모두의 사명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의 부재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하면서, 이 노력만이 지속적인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라고 단언한다.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라고도 표현한다.

일찍이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곧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체제가 고착화될 때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면서 이 세상에 평화가 필요함을 각인시켰고, 하느님 질서의 회복을 통한 세계 평화를 강조하면서 전쟁의 발발을 가로막았다.

인간의 품위와 인간 존엄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각 정치 공동체가 공동선의 실현을 통해 올바른 공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평화를 이루어나가는데 항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평화의 건설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과제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모두 평화 건설에 헌신하며,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결의를” 다지자고 촉구한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교회가 “젊은이들의 교육에 이바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려는 정신이 자라나게 하여, 새로운 세대의 국민을 양성하는 일에 기여하고 … 조상들에게서 물려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전망으로 국가가 당면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준비를 갖출 것”을 당부한다. 한국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과 역할로, 젊은이 양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국가에 대한 헌신을 제시한 것이다.

젊은이는 우리의 미래이다. 그런데 파릇파릇 피어나야 할 우리의 미래가 왜곡된 세상의 가치 속에서 매일매일 신음하며 시들어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교회가 이런 젊은이들의 교육과 양성에 최선을 다하여 새로운 세대의 올바른 국민을 양성하라고 당부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교회 역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마지막으로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회참여 의식과 자세를 가지라고 촉구한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다. 우리 모두 사회 곳곳에 만연된 불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회복하면서, 하느님만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가 이 땅 이 겨레 곳곳에 살아 숨쉬도록,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한반도 구석구석에 길이 펼쳐지도록 하루하루 부단히 노력하자!

* 유혜숙 안나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신학과와 동대학원 윤리신학과 졸업 후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에서 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유혜숙 안나]



2,4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