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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미신행위와 교회: 하느님 백성 안의 다른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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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1 ㅣ No.773

[경향 돋보기 - 미신행위와 교회] 하느님 백성 안의 ‘다른 신앙’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미신(迷信)’적 행위에 경계심이 덜한 것 같다는 걱정이 있다. 구약성경은 이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이에 대해 성찰하기 전에 간략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먼저 ‘미신’이란 말은 현대 학문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개념이 모호하고 타인의 신앙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신’을 침묵하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딱히 ‘미신’으로 옮길 수 있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그리스어 낱말이 성경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도 미신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은 미신에 대해 침묵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행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때로 말하지 않는 것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이 ‘미신’에 침묵하는 이유를 성찰하는 데서 시작하겠다. 그리고 구약성경이 ‘다른 신앙’(성경의 용어를 존중하여, ‘미신’보다는 ‘다른 신앙’이란 말을 쓰겠다.)을 대하는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겠다. 신명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구약성경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가장 체계적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고, 지면의 한계도 고려한 것이다.

 

 

신중한 침묵

 

왜 성경은 ‘미신’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깊은 침묵을 감히 성찰해 보면, 다른 신앙을 언급하다가 결국 다른 신앙을 소개하게 되는 ‘부작용(side effect)’을 염려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악에 대해서 너무 소상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권장하시고 빛을 밝히시는 방법을 쓰신다. 그러면 악과 어둠의 권세는 축소되게 마련이니까.

 

사실 구약성경에는 고대 근동의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바알과 아세라 등 어느 정도 친숙한(!) 이름이고, 몰록(레위 20,2)이나 크모스(예레 48,46) 등 이방신의 이름도 이따금 등장한다.

 

이 밖에도 신의 이름은 훨씬 많다. 성경이 쓰인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태양과 바다, 그리고 강 등도 모두 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을 섬기거나 분향하는 자들을 경고하는 말씀도 여러 번 등장한다(신명 4,9; 17,3-5; 2열왕 23,5 참조). 확실히 구약성경은 다른 신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자료를 갖고 이런 고대 근동의 신들이 관련된 제의나 교리 등을 분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막상 그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서 이런 이방신 숭배를 뿌리 뽑은 요시야 임금의 종교개혁 기사를(2열왕 23,4-20) 보면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다. 요시야 임금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정화한 일은 그의 공적으로서 무척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내쫓은 신들과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신중하게 침묵한다.

 

 

시대적 한계

 

시대적 한계도 고려해야 한다. 성경은 거의 3천 년 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 기술과는 거리가 한참 먼 세상이었다. 고대 근동 사회에는 점쟁이, 복술가, 요술사, 주술사, 주문 외는 이,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이 등이 일종의 ‘종교적 기술자’로 통했다.

 

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법전 제2조는 시민이 시민을 향해 ‘키슈푸(ki?pu)’라는 흑마술을 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에서 이런 종교적 기술자들과 관련된 일종의 ‘직업윤리’도 엿볼 수 있다. 당시는 이런 기술자들의 행위에 따른 ‘합리적 가격’도 있었다. 일부는 꽤 높은 수입과 사회적 명성도 누렸던 것 같다. 고고학적 발굴로 이런 기술자들을 길러내는 교육과정과 교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이런 ‘미신적 행위’에 침묵하는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 이런 행위가 미신이라는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하는 ‘툼밈’과 ‘우림’도(탈출 28,30; 레위 8,8) 점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이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3천여 년 전의 고대 이스라엘인의 생각과 삶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편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뒤에 우리 현대인의 삶도 수천 년 뒤 후손들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미신적일 것이다.

 

‘현대의 미신’은 ‘고대의 미신’이 아닐 수 있고, ‘현대의 과학’은 ‘미래의 미신’일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이런 종교 기술자들이 성업 중이었던 것 같다(신명 18,10-11 참조). 하지만 신명기가 이런 기술자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뒤에 주님의 참된 예언자를 밝히기 위함이었다(18,15-22). 주님의 참된 예언자는 이런 종교 기술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주님의 예언자는 길흉화복을 점쳐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충실히 담고 사는 사람들이다(18,18). 고대 사회에서도 하느님 백성은 이런 종교 기술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초점 1 : 하느님 백성

 

앞서 밝혔듯, 하느님 신앙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신명기다. 그런데 신명기가 다른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을 보면 크게 네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 안에 침투한 다른 신앙’이 초점이다. 구약성경은 전반적으로 이웃 민족이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믿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창조주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시며(신명 4,32), 하느님 백성 밖에서도 주님의 구원경륜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4,19)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가르침은(4,35.39) 분명하다. 하지만 모두 단편적 언급이다. 이스라엘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관심이 없는 태도는 앞에서 언급한 침묵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이야기다.

 

 

초점 2 : 풍요의 시기

 

둘째, 이스라엘에 다른 신앙이 침투한 것은 풍요의 시기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적을 쫓아내시고 그들의 땅을 주셨을 때(신명 12,29)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에 호기심을 느꼈다. 광야에서 떠돌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좋은 성읍을 주셨지만, 바로 그 성읍에서 다른 신을 믿는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13,13).

 

구약성경에 ‘광야’와 ‘성읍’은 대비된다(신명 8,1-5. 6-20).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이다. 거친 광야를 떠돌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염원했다(민수 13,27; 14,8; 16,13-14).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광야로 들어서자마자 힘들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탈출 15,24). 하지만 훗날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광야시대야말로 하느님께서 백성을 단련하신 시기였다고 성찰했다(신명 8,5).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가르치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백성을 대하셨고(신명 1,31), 사실 그때의 가난은 큰 문제도 아니었다고 고백했다(신명 29,4-5; 느헤 9,21).

 

성읍은 이와 다르다. 백성이 차지한 성읍은 풍요로웠다(신명 8,6-10). 하지만 좋은 집과 땅이 생기자 쓸데없는 호기심도 늘었고(12,30), 일부는 종교적 일탈을 넘어 패륜을 저질렀으며(12,31),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서 백성을 유혹하기도 쉬워졌다(13,2-4).

 

이런 고백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가 가난하고 굶주렸던 과거이지만, 돌아보니 그때야말로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신 좋은 때였다는 고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가난의 시대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풍요의 시대에 주님과 멀어졌다. 다른 종교에 기웃거리는 마음, 유혹의 마음, 일탈하는 마음은 풍요의 시대에 소리 없이 자라난다.

 

 

초점 3 :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잊다

 

셋째 특징은 망각이다. 다른 신앙이 나쁜 이유는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잊기 때문이다. 점쟁이, 복술가, 요술사, 주술사, 환몽가 등은 하느님을 잊게 만든다(신명 8,14).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심으로써 백성을 낳으신 분이시다(신명 32,18; 참조 탈출 3,7). 하지만 풍요의 시대에 하느님 백성에 침투한 다른 신은 ‘낯선 신’이요, ‘하느님이 아닌 신’이요, ‘알지 못하던 신’(신명 13,3.7.14; 28,64)이요, ‘갓 들어온 새 신’이요,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않던 신’이다(신명 32,16-17).

 

부유해진 백성은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라는 신이 반갑지 않았나 보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백성은 다른 하느님을 원한다. 가난을 잊게 만드는 신, 더 많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을 원한다. 예로보암은 이 점을 간파한 듯하다. 그는 금송아지 상에 대고 감히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이 여기 계신다.’(1열왕 12,28)며 백성들을 미혹했다. 금송아지는 풍요의 신 바알의 상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황금의 하느님으로 만들어버리는 죄는 이미 시나이 산에서 시작되었지만(탈출 32,4), 풍요의 시대에 창궐했다.

 

 

초점 4 : 친밀한 관계를 조심하라

 

넷째, 구약성경은 하느님 백성 안에 다른 신앙이 퍼지는 경로에 무척 주의한다. 하느님 백성 바깥의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구약성경은 이 점에서 매우 생생한 묘사를 제공한다.

 

“너희의 동복형제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품의 아내나 너희 목숨과도 같은 친구가 은근히 너희를 꾀면서, ‘너희도 너희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신명 13,7).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모두 나열되었다. 일부다처 사회에서 동복형제는 이복형제보다 가까운 법이다. 자녀와 아내와 ‘목숨과도 같은 친구’도 가장 친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쁜 것은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이를 통해서 침투하는 법이다. 그들이 ‘은근히 꾀’며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하는 말에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은 흔들렸나 보다.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그를 감싸주지도 말아야 한다.”(9절)는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경고가 뒤를 잇는다.

 

 

‘뭐가 나쁘냐?’고

 

연말연시에 가톨릭 신자들도 점 같은 것을 비교적 자주 본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들과 그런 집을 찾는 게 ‘뭐가 나쁘냐?’라고 물을 수 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구약성경은 다른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그 대신 풍요의 시대에 하느님 백성이 그런 것에 빠진 역사를 전하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라고 초대한다. 그런 마음은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잊고 황금의 하느님을 찾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그런 말이 친밀한 관계를 타고 전파되는 것에 무척 주의하라고 권고한다.

 

그 옛날에도 종교 기술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예언자의 삶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온전히 하느님께 다 바치는 삶을 묵상하면서(신명 6,4) 한 해를 지내면 어떨까.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했고, 저서로 「구약성경과 신들 ? 고대 근동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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