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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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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3 ㅣ No.1894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 (1)

 

 

정치와 품위

 

요즘은 다르겠지만 예전에 예비군 군복만 입으면 누구나 꼴불견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예비군 군복만 입혀 놓으면 팔자걸음으로 뭉그적거리고 총기나 장비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아무 데나 드러눕는 추태를 보였지요.

 

그처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저열한 언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이야기 주제가 있다면 바로 정치가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지금은 선거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목청을 돋울 일이 덜하지만, 지난 선거 즈음 한국 사회에 오갔던 말들은 참으로 낯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손꼽히는 고학력 국가 대한민국에서 정치 이야기 만큼은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대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대화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상대방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숙고하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인터넷 매체나 편향적인 주장들에 이끌려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아냥대며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는 데 많은 분이 동의하실 겁니다.

 

 

그리스도교적 정치관의 부재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신앙인들마저도 각자 지지하는 진영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3)고 말씀하실 때 ‘불과 분열’은 온갖 거짓을 불태워 정화하고 은폐된 악을 드러내는 쇄신의 계기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뜨거운 말다툼과 분열은 정화와 쇄신의 계기는커녕 공동체에 상처를 남기고 약화시키는 단초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 현상의 한 가운데에는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는 진영 외에는 다른 의견이나 어떤 입장도 듣지 않겠다는 완고한 진영 논리가 있었습니다. 대화와 설득과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공격과 방어, 승리와 패배의 흑백논리가 감염병처럼 창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나 사회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 편인지부터 따지는 편가르기 현상이 심해졌지요. 사회적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성찰하고 대화하려는 의지는 부족했고, 점잖은 입에서 가시 돋친 독설을 뿜어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양심의 부재가 두드러졌습니다. 대체 저잣거리의 선동이나 말싸움과는 격이 다른 그리스도인 고유의 생각과 말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끼리끼리 주고받는 수군거림과 뒷담화가 그리스도인의 귀와 혀를 오염시키고,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 말씀을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끌어 쓰는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습니다.

 

 

두 진영의 충돌

 

이렇듯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는 진영 논리는 정치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정치의 본질이 대화와 타협에 있고, 민주주의가 특권을 가진 소수에 의해서 다수가 휘둘리는 최악을 피하려는 차악의 선택이라면, 진영의 결집과 세 불림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섬멸하겠다는 태도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긴 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분배냐 성장이냐 같은 논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한 곳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오늘날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은, 무책임한 선전 선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거짓 뉴스와 정보가 판을 치고 ‘아니면 말고’식의 주장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곧 편파적인 비난이나 극찬으로 양분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주제에 대하여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모든 형제들」, 156항)라고 지적하시면서 진영논리의 양극단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짚으십니다.

 

 

대중 영합주의의 문제점

 

교황님께서 언급하시는 첫 번째 극단은 대중 영합주의(popular leadership)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대중 영합주의를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선동적으로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것”(「모든 형제들」, 155항)으로 규정하십니다. 대중 영합주의는 세상이 억압하고 불의한 권력자(또는 기득권자)와 그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선한 대중(또는 민중)이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고 전제하고, 자신들은 권력과 기득권이 아니라 대중 혹은 민중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들은 선한 민중의 편이기 때문에 오류나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한 민중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중 영합주의자들은 현금을 살포하거나 선심성 정책들을 남발하고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미지 조작에 열중합니다. 그런 선심성 정책들이나 현금 살포가 장기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대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사적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를 회피하거나 악용하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다지 큰 흠결이 아니라고 묻어 버립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민중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문제를 신랄한 언어로 지적하십니다.: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유지하고자 개인이 어떤 이념적 구호 아래 민중 문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나 가장 비열하고 가장 이기적인 성향을 지닌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인기를 얻으려고 할 때에 그러합니다. 이는 더욱 어설픈 형태든 더욱 정교한 형태든 관계없이 제도와 법률의 유린으로 이어질 때 더욱더 심각해집니다.”(「모든 형제들」, 159항)

 

 

이념의 민중과 실제의 민중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 살아가는 약한 이들의 삶이지, 이념이 내세우는 ‘민중’이 아닙니다.: “‘민중’은 논리적 범주도 아니며 신비적 범주도 아닙니다. 곧 그 민중의 모든 행위가 선하다거나 그들이 ‘천사와 같은’ 실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신화적 범주입니다.” 교황 회칙 「복음의 기쁨」과 「모든 형제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구절은 대중 영합주의가 오용하고 있는 ‘민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폐쇄적인 대중 영합주의 집단은 ‘민중’이라는 표현을 왜곡합니다. 그들은 참된 민중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60항)

 

인간의 현실은 결코 ‘착취하고 억압하는 악한 기득권자’와 ‘억압받는 선한 민중’의 두 범주로만 해소되지 않습니다. 흑백 논리로 정리되지도 않습니다. 민중의 현실이 오직 분배가 잘못된 탓이라고 외치는 것이나 이른바 기득권자를 끌어내리는 것으로만 개선될 수 없는 것은 인간 사회의 살아있는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이념 싸움에 들러리 서는 허구의 ‘민중’ 대신에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인간, ‘참된 민중’에 주목하자고 호소하십니다.

 

다음 호에서는 교황님께서 지적하시는 두 번째 극단, 그러니까 ‘권력자들의 경제적 이득에 일조하는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양극단의 문제를 짚어보면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힘없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월간빛, 2022년 10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 (2)

 

 

선행을 베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이들을 돕고 도움을 베푸는 일에 남달리 뛰어났다는 기록은 예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2세기 익명의 교부는 그리스도인의 자선활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는 것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는다는 것은 이웃의 짐을 받아진다는 것이다. 즉 좀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1)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살림이 넉넉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기술자들, 늙은 여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록 교의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이웃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선행을 합니다.”2)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가진 바를 나누고 선행을 베푸는 데 탁월하다면, 단순한 계산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서 자선을 더 많이 하면 언젠가 가난으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선행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만 해도 10억 명이 넘고, 정교회와 개신교 등등을 포함하면 무려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그래도 전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그다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선과 선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난의 굴레를 못 벗는 경우도 있고, 죽어라 노력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만큼 곤란한 상황이거나 노력할 의지마저 포기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했는데 불의한 사회 구조 때문에 가난에 내몰리는 경우도 있겠지요. 가난의 이유가 다양한 만큼 해법도 다양해야 하는데, 선행과 자선이 해법 중의 하나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떻게 적절하게 분배해야 할지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 또한 하나의 중요한 해법입니다. 이를 일컬어 ‘정치’라고 하지요.

 

그래서 회칙 「모든 형제들」의 제5장은 ‘더 좋은 정치’를 다룹니다. 교회가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 또한 애덕을 실천하는 중요한 해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정치는 불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님은 더 좋은 정치를 가로막는 두 가지 극단이 대중 영합주의(포퓰리즘, populism)와 자유주의라고 보고(154항), 어느 쪽이든 힘없는 이들에 무관심하고 열린 세계를 구상하기 어렵게 하는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십니다. 지난 호에서는 회칙 순서에 따라 대중 영합주의의 문제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 다룰 극단은 ‘자유 주의’입니다

 

 

자유주의라는 극단

 

자유주의는 대중 영합주의와 짝을 이루는 또 다른 극단입니다. 누구든 억압이나 강제를 싫어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겠지만 정치와 관련해서 교황님께서 비판하시는 ‘자유’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윤리 같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이 사회에 우선하고,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서 지켜야 할 공동체적 가치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사회 또는 국가는 중립적 입장을 지키면서 개인의 삶에 대해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기존의 질서, 현재 세계가 전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전제하고,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생기는 것을 근본적으로 개인의 탓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하는 존재이니까, 정치는 이런 노력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합당한 결과를 얻도록 최소한으로 개입하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누가 무엇을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게 될 때 이 갈등을 해결하면서 적절한 분배를 이뤄내는 것은 시장(Market)의 역할이라 봅니다. 공산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대결이 공산주의의 참패로 끝난게 자유주의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곧 ‘시장의 자유’를 말합니다.

 

 

시장에 순응해 버린 한국 사회

 

이렇게 공동체적 가치보다 시장의 자유를 우선으로 보는 풍조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으로 무한 경쟁의 피로감을 토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수성을 드러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라는 말은 양심이건 염치건 간에 일단 이기고 나서 마음껏 누리며 살자는 뜻이 되었습니다. 없는 사람 생각도 하면서 허세와 낭비를 줄이자고 하면 ‘내가 벌어서 내가 쓰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세상입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내가 시장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패자의 아픔 같은 것은 뒷전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한국 리서치의 ‘2018년 공정성 인식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불평등한 분배’를 66%의 지지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 세계 가치관 조사 7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평등에 찬성한 비율이 12.4%에 불과한데 비해 불평등을 지지한 비율은 64.8%로 타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국가 중 타자에 대한 관용도와 구성원 간의 신뢰가 높아지지 않는 예외적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물질적으로 예전보다 풍요해져도 약자의 아픔과 희생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불평등을 용인하는 비정한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헛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옛말과 달리 악착같이 제 곳간 늘이는 데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야수성의 결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노인 빈곤율, 세계 최저의 출생률로 이어져 급기야 사회의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공동선을 위한 정치

 

세계는 경제침체의 초입에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좋은 정치를 꿈꾸고 의논해 봐야 할 시점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공동선을 위한 정치, 사람들을 위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사랑과 함께 가는 것이며, 경제체계를 사회적, 문화적, 대중적인 활동으로 통합시키는 정치적 박애주의는 믿는 이들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정치가 어떤 내용인지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10,6

2) 아테나고라스, Legatio 11.4

 

[월간빛, 2022년 11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 (3)

 

 

사람이 둘 이상 사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불평등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노력의 정도가 다르니까, 혹은 여건이 다르니 모두가 똑같이 누리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살 권리는 있지만 차이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없애면 안 되는 경우도 있지요.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일을 했거나 안 했거나 똑같은 빵 하나씩 받아먹는 것을 ‘공평’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도저히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질 때 발생합니다. 탁월한 능력이나 남다른 노력, 많은 기여에 더 큰 보상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탁월하지 못하다 해서 누구도 벌 받듯 푸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정치는 그런 면에서 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대화와 합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장치입니다. 현대 민주국가라면 폭력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 정당한 분배의 규칙을 정하고 실행함으로써 불평등의 문제에 대처합니다. 

 

앞서 두 달에 걸쳐 회칙 「모든 형제들」의 ‘제5장, 더 좋은 정치’가 비판하는 두 극단, 건강하지 못한 대중 영합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두 극단의 주장들은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그 해법으로 제시되는 대표적인 주장들입니다. 어느 쪽이든 일리는 있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먼저 대중 영합주의는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분배에 중점을 두자고 합니다. 그런데 대중 영합주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당장 갈라 먹자는 주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161항 참조) 그런 경우를 ‘건강하지 못한 대중 영합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반면 자유주의는 불평등의 문제를 각자 알아서 할 문제로 치부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자유로운 경쟁 속에 경제 성장을 거듭하다 보면 사회 전체가 나눠 먹을 부의 크기가 커져서 가난한 이들에게도 더 좋은 결과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는 이 양극단의 주장들 사이에서 타협과 합의로 이루어집니다. 회칙 165항이 말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 하나의 용인되는 방법론, 하나의 경제적 처방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회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드린 두 극단의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먼저 대중 영합주의든 자유주의든 제도만으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치나 사회 제도를 아무리 효율적으로 만든다고 한들, 그것을 쓰는 사람이 잘못된 마음을 먹어서 허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법을 만들어도 편법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정의와 공정을 주장하면서 정작 정의를 주장하는 자기는 예외라도 되는 양 처신하는 ‘선택적 정의’의 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합니까?

 

회칙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인간적 나약함, 곧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탐욕’으로 부르는 것의 일부인 이기주의로 기우는 인간의 성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탐욕은 자신과 자신의 단체, 자신의 사소한 이익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의 성향입니다.”(166항)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제도도 인간 자체의 회개와 변화 없이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회칙은 먼저 인간의 이런 나약함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믿고 ‘마음과 태도와 생활 방식’(166항)을 바꾸자고 호소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는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방방곡곡에 교도소를 세우고, 교도소마다 죄인들을 꽉꽉 채워 넣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통 의인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칙은 더 좋은 정치를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더 좋은 정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무엇보다 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정치를 잘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엄정한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방대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합니다. 물론 치열한 정치 마당에서 한가롭게 사랑 타령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모든 사람을 우리 형제자매로 인식하고 표용하는 사회적 우애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그저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 실현 가능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길을 찾는 능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180항)라며 정치의 근본을 상기시키십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앞서 반포된 회칙 「복음의 기쁨」 205항에서 참된 정치가 무엇인지 언급했던 구절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 교리에서 영감을 받은 모든 노력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모든 형제들」 181항)

 

신앙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양한 집단 가운데서 특정한 세력이 권력을 획득해 정치 이념을 실현하도록 돕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신권 국가를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강력한 종교경찰이 종교적 의무를 법적으로 강제하면서 공권력을 남용하다가 젊은 여성의 목숨까지 앗아 간 외국의 사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와 교회의 건강한 긴장 관계가 무너진 채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한 정당이나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행태는 더 이상 현대 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더 좋은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각자의 정치관과 태도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향하는 정치는 회칙 「모든 형제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사랑의 방법이 되고 있습니까? 정치를 논하고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조직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사회 제도들이 창출하는 다양한 자원을 통하여 멀리 있거나 무시당한 형제자매에도 닿을 수 있는”(165항) 참된 애덕의 실천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정치적 관심이 “실질적이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역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필요한 자원을 허비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까?(165항) [월간빛, 2022년 12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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