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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와 한국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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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888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와 한국어 인식

 

 

국문 초록

 

선교 활동을 위해서는 선교지의 언어 습득이 최우선 과제였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선교사들은 1909년을 출발점으로 하여 니바우어(1912) - 에카르트(1913) - 에카르트(1923) - 로머(1927) - 로트(1936) 등 총 5책에 이르는 독-한 문법책을 발간했다. 초기의 독-한 대화집 형태를 띤 소책자 니바우어(1912)와 니바우어를 계승한 로머(1927), 로머의 문법 체제를 유지하되 동사 분류를 더욱 체계화하고 한글 신철자법을 도입한 로트(1936)에 이르는 한 종의 문법책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에 임하는 선교사들의 학습서로 활용되었다. 이들의 계승 관계는 각 책의 서문의 언급에서 확인되기도 하지만, 문법 체제 면에서 확인되는 유사성, 그리고 문법 익힘과 문장 연습에 동원된 어휘와 예문들의 수용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와는 별도로 에카르트(1913)는 먼저 숭신학교 교재로 출판되었고, 향후 독일에서 정식 독-한 문법서인 에카르트(1923)로 출판되었다. 에카르트의 두 저서는 수도원 내에서 학습교재로 활용되던 여타의 문법책들과는 성격과 계보를 달리하며, 독일 내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문법서로 무엇보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선교사들이 독-한 문법책 외에 사전 편찬에 착수했었던 작업은 기록상으로는 확인된다. 1916년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에 의한 등사판본 한문사전 작업이 시발점이었다. 늦어도 1924년 이후에는 표제어 4만에 이르는 한-독 대응어사전 작업으로 확장되었고, 1931년까지 종교 어휘를 보강하는 등 지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전류는 견본책으로 등사판본을 소수 인쇄하였을 뿐, 일제 강점기 동안 정치적 환경 때문에 정식 출판되지 못했고, 미발간의 자료마저 1949년 공산주의자에 의한 수도원 해산 당시 소실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다수의 독-한 문법책을 저술하고, 다양한 사전류를 편찬하며, 한편으로는 그 책을 통해 한국어를 익힌 독일 선교사들은 한국어에 대해 경어와 존칭의 사용이 까다롭고, 한자문화권 안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한문과의 착종 관계를 큰 난점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독일어와 달리 관사도, 성도 없고, 명사 변화도 규칙적인 한국어가 학습하기에는 더욱 용이하다고 보았고, 특히 한글의 논리적인 구조와 조형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1. 서론

 

선교 활동에 한국어 학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선교지에 정착하기 위한 가장 초기의 실무에 속하는 관청 업무에서부터 선교 활동에 요구되는 한국인과의 의사소통과 성경 번역, 선교사 개인 생활의 필요에 까지 현지 언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학습교재에 대한 편찬과 저술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한국 어휘와 문법 현상에 대한 연구는 서양인 선교사에 의한 것이 가장 선도적인 것이 되었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또한 한국어 연구와 학습교재 발간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파견 원년인 1909년 독-한 사전과 독-한 문법책에 대한 기초적인 설계 작업에 돌입하여 1912년에는 최초의 소책자 발간 기록이 나타나고, 1913년 - 1923년 - 1927년 - 1936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독-한 문법서 저술이 이루어진다. 또한 정식 출간되지는 못했으나, 독-한 사전 편찬을 위한 일련의 작업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16년 한문사전 편찬을 출발점으로 하여 늦어도 1924년 이후에는 표제어 4만에 이르는 한-독 대응어사전 작업으로 확장되었고, 1931년까지 종교 어휘를 보강하는 등 연속성을 띠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동안 정치적 환경 때문에 사전류는 소수의 등사판본 인쇄에 그쳤다. 또한 미발간의 자료마저 1949년 공산주의자에 의한 수도원 해산 당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독일 내 한국어 지식이 전무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한국어에 대한 접근을 시작했는지 알려주는 사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최소한의 한국어 기본 지식이 요구되는 만큼 당시까지의 독일어권에서 한국어 학습 관련 자료를 짚어본다면, 지볼트(F. von Siebold)의 《일본》(Nippon, 1832~1852) 조선 편1)에 소개된 한국어 관련 정보와 지볼트의 자료를 참조한 오페르트(E. Oppert)의 《금단의 나라 : 한국기행》(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 1880)에 나타난 한국어 소개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볼트는 짧은 지면 안에서도 한국 언어에 대해 별도의 장을 마련하여 명사와 격 표식, 수사, 대명사, 능동사, 시제, 피동법, 명령법, 부정법과 약간의 통사 특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인도 · 유럽어의 관점이라는 한계는 가지지만 한국어 문법이 최초로 기술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2) 오페르트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자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지볼트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던 호프만(J.J. Hoffmann)의 ‘한국어 어휘’ 모음을 바탕으로 하여 별도 부록으로 어휘집(Coreanisches Vocabular)을 싣기도 했다.

 

위의 두 자료가 개략적인 문법 개요와 어휘들의 소개라고 한다면 1923년 에카르트에 의해 독일에서 정식 출간되었던 《조선어교제문전》3)은 독일 내 한국어 학습자를 겨냥한 최초의 전문 독-한 문법책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23년에 한글학자인 이극로(李克魯)가 유학 중이던 베를린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4)하였다는 것은 상호간의 영향 관계를 짚어보게 하는 대목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출판된 《조선어교제문전》을 이극로가 교재로 활용하였는지, 혹은 그 역으로 이극로의 한국어 강좌 교재를 에카르트가 참고하였는지는 확인이 요원하지만, 아직 한국어 문법 체계가 미완 상태였던 당시에 상호 간의 영향 관계를 추적해보는 것은 연구 과제로 남는 부분이다.

 

독일 선교사를 비롯하여 서양인의 한국어 연구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관심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1880년 《한불?뎐》(韓佛字典)과 1897년 《한영?뎐》(韓英字典)으로 대표되는 한국어 사전 연구는 한국어 대역사전이 이중어사전으로서 당대에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여러 근대적 현상에 대한 서구어의 대입 과정을 필연적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 주목하고 있다.5) 나아가 서구어의 번역으로부터 자국어를 창출하는 과정을 거친 일본의 근대 학술 편성과는 달리, 한국에서 서구어-한국어의 상호 형상화 도식은 ‘이입된 신조어들을 영어/불어 문맥 안에 고정하려는 외국인들의 노력’에서 형성되었으며, 근대 학술어의 정리 및 의미 확정을 담당한 것은 한국어 사전이 아니라, 이중어사전이었음을 밝히는 연구로 심화되었다.6)

 

사전 작업에 이어 문법 연구에까지 확장되는 서양인의 한국어 연구서로서 존 로스(J. Ross)의 《한국어 독본》(A Corean Primer, 1877)을 비롯하여 리델(F.C. Ridel)의 《한어문전》(Grammaire Coreenne, 1881)7), 언더우드(H.G. Underwood)의 《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1890) 등 서양인들의 한국어 문법 저술에 관한 일반적인 연구 또한 최근까지 활발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8) 어문학적인 접근으로 우선 서양인의 한국어 문법의 종류와 유형을 제시하고 각 권의 특징들을 대별하는 초기 연구와9) 품사체계와 통사론을 다루는 최초의 본격 문법서로서 《한어문전》을 다루고 여타 각 문법서 간의 영향 관계를 밝히는 연구10), 나아가 외국어 학습교재로서 각 문법서의 특징을 비교 분석한 연구11)에까지 진전되었다.

 

그러나 서양인의 한국어 연구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대부분 프랑스어권과 영어권 연구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하여 교육과 문화 사업에 일익을 담당했던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 또한 총 5책의 문법서를 저술하는 한편 한국어 연구에 대한 다양한 기고문들을 남겼다. 그럼에도 독일어권 한국어 연구에 대한 연구가 소략한 것은 사료에 대한 어문학적 접근의 어려움과 연구자의 희소함 때문일 것이다.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에 대한 논저들은 초기 연구에서 여러 서양인 문법책 소개에 같이 다루어지는 것12)과 지난 2009년 분도회 진출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에 포괄되어 다루어진 독-한 문법책의 소개13), 그리고 가장 최근 에카르트의 《조선어교제문전》(1923)이 독일어권 한국어 학습교재로서 어문학적 연구방법론으로 분석된 연구14)가 눈에 띈다.

 

그런데 위의 독일 선교사들의 독-한 문법책 연구에서 공통 현상으로 드러나는 오류는 5책에 이르는 각 문법서 간의 계보 관계에 대한 혼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료 미발굴에서 비롯된 문제로, 본 논문은 학계에 그 존재는 언급되었으되 한 번도 실물 확인이 된 적이 없는 안셀모 로머 신부(P. Anselm Romer)의 1927년판 《한국어문법》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 계보를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는 그동안 미공개 상태였던 1909년부터 1913년까지의 연대기(Chronik) 사료 역시 새로이 활용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은 선교 현장에서 요구되는 실질적인 만남의 언어 도구로써 수용되었으며, 어휘보다는 문장과 대화 중심의 친근한 이야기로서 접근되었음을 밝히고, 그들의 한국어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베네딕도회 독-한 문법책의 계보와 사전 편찬 작업

 

선교 활동을 위해서는 선교지의 언어 습득이 최우선 과제였다. 1909년 2월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독일 선교사들은 우선 그들의 선교 기지를 수립할 부지 물색과 수도원 건립과 관련한 관공서 업무에서부터 심각한 언어 장벽에 부딪히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운신의 폭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동반한 가운데 불어를 중간 언어로 해서 독일어 - 프랑스어(영어) - 일본어 혹은 독일어 ? 프랑스어(영어) - 한국어 방식으로 소통되는 것이었다. 문서 처리는 더욱 복잡하고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부지 매입과 수도원 건립을 놓고 하루가 바쁜 애타는 시간 속에서도, 통감부에 제출하기 위한 청원서는 아무리 간단한 양식이라 해도 별도의 영어본과 세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한국인 대서사에게 건네졌고, 이틀이나 꼬박 기다려 선교사의 손에 들어온 한국어 문서 작성의 결과물은 흡족하지 못했다.15)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의 미래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한국어 학습교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의가 없었다. 그 첫 시작은 도미니쿠스 엔스호프 신부(P. Dominikus Enshoff)와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신부(P. Bonifatius Sauer)로부터 발현되었다. 독일어권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한국어 학습교재가 전무했던 20세기 초, 한국에 처음으로 파견된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게는 그나마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편찬한 1880년 《한불?뎐》(韓佛字典)과 1881년의 《한어문전》(Grammaire Coreenne), 1897년 개신교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에 의해 출판된 《한영?뎐》(韓英字典)이 가장 의지할 만한 참고서였다.16) 엔스호프/사우어 신부는 위의 참고 자료를 동원하여 야심 찬 작업에 착수했다. ‘한독 문법책과 사전’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언제 책으로 인쇄될지는 요원하지만, 그 첫걸음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고한다.17) 한국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한국어에 대한 접근은 무엇보다 ‘이야기’에 친숙해지는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이야기’는 “우선은 언어 연습이기도 했지만 이 민족의 사고까지 알려주는 것들”18)로서 선교지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법이었다.19) 엔스호프 신부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설화뿐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근대’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한국어 공부 수단이었던 ‘한국 이야기’는 총 51편의 설화로 엮어져 독일 민속학지에 실리기도 했다.20) 선교 잡지인 Missionsblatter21)에도 비교적 초기부터 한국 설화들이 소개되었다.22)

 

선교사들은 서울의 한 지역 언어를 수집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지방 말과 이야기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23) 한 민족에 대한 이해가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에서부터 출발하고, 민족문화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덜 훼손당한 채 남아있는 지역의 언어와 풍습을 몸으로 익힌다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엔스호프 신부를 비롯한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신부(P. Cassianus Niebauer),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P. Andreas Eckardt) 등 연혁에 드러나는 선교사들의 움직임은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을 아우르는 잦은 취재 여행으로 분주하다. 엔스호프는 1909년 5월에는 송도, 평양, 진남포 등 700리 길을 더러는 배를 타고, 더러는 걸어서 언어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24) 다음 달 6월에는 중부 지방으로 떠났다.25) 엔스호프 신부가 독일로 돌아간 후 그해 12월 28일 새로 충원된 니바우어 신부와 에카르트 신부는 도착하자마자 ‘한국의 지방 언어와 음식 문화’에 대해 익히기 위해 각각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황해도 청계동과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갔다.26) 이로써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는 ‘북쪽과 남쪽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27) 것이 되었다.

 

엔스호프 신부의 언어 연구 작업을 이어받은 것은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신부였다. 초창기 연혁에 드러나는 니바우어 신부의 이동 경로는 1909년 12월 한국 입국 - 1910년 2월 청계동 - 1910년 5월 서울 - 1910년 5월 청계동 - 1910년 8월 서울 - 1910년 12월 대구 - 1911년 5월 청계동 - 1911년 8월 최종 서울 귀원으로 확인된다. 특히 한번 떠나면 수개월씩 머물던 청계동 본당에서의 생활 후로는 ‘한국인이 다 되어서’ ‘모국어인 독일어를 떠올리려면 한참 고심해서 기억해내어야 할 정도’라고 쓰고 있다.28) 각 지방의 언어 공부와 취재 여행을 마치고 최종 서울 귀원한 1911년 8월에서 약 10개월 후인 1912년 6월에는 드디어 작은 책자가 만들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6월 26일, 부원장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신부가 후원자이자 친구인 빌렘 신부(P. Nicolas Joseph Marie Wilhelm)를 따라 청계동으로 갔다는 정보를 전하며 그의 업적으로 독-한 대화집 저술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날(1912. 6. 26), 부원장 신부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기차를 타고, 친구요 후원자인 빌렘 신부를 따라 청계동으로 갔다. 부원장은 청계동에서 한편으로는 좀 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한국어를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다. 우리 부원장의 특별한 업적이 여기서 언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독-한 대화를 담은 소책자 한 권을 저술한 것이다. 이 책자에는 읽기 쉽고 짧은 한국 이야기들이 독일어 번역과 함께 들어 있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마다 어휘와 대화 형태의 간단한 문장들이 들어 있다. 언급된 소책자가 다음 해에는 모든 신부님들이 함께 협력하여 올바른 대화 문법서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29)

 

이 책자의 모든 예문은 ‘짧은 한국 이야기들이고 거기에 독일어 번역을 붙인 것’이라는 설명에서 우리는 그것이 독일 선교사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대역 한국어 교본으로, 이후의 모든 독-한 대화 문법책에 계승되는 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독-한 대화 문법책은 선교사들에게 필수적인 지참물이 되었다. 1914년 8월 7일, 일본의 교주만 침공에 맞서, 독일 본국의 징집령에 동원된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Br. Paschalis Fangauer)가 전쟁터에서 한국어 초급 교본(koreanischen Fibel)을 들고 한국어 공부를 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덕분에 기도하고 공부할 시간을 많이 벌었다. 그 시간에 한국어 문법 공부를 열심히 했다. 사람들은 내가 항상 바쁘고, 또 항상 책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놀라와 했다. …어느 날 일본군이 불시에 요새를 포격하여 박살이 났다. 요새를 방어하던 군인들은 연기 자욱한 방공호에서 촛불에 의지하며 쪼그려 앉았다. …우리는 각자 최후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달 치 봉급이 생의 마지막 봉급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메모장에 유언을 적기도 했다. 젊은이들의 피가 사람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그때도 나는 한국어 초급 교본(koreanischen Fibel)을 들고 공부했다.30)

 

팡가우어의 이 증언을 통해 우리는 니바우어에 의해 쓰인 최초의 독-한 문법서 제목을 《한국어 초급 교본》(koreanische Fibel, 니바우어 1912)31)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니바우어 신부가 독일 패전 후 재정 상황이 악화된 선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 여행을 떠나면서 장시간 자리를 비우게 되고32), 퇴회에 이르게 되면서 한국어 연구는 다음 주자로 넘어간다.

 

언어 학습과 연구에 발군의 능력을 보인 에카르트가 물론 한국어 연구 작업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가 일찍부터 한국어 문법 연구에 매달리고 그러한 에카르트의 한국어 연구 진전에 많은 독자가 우호적인 기대를 표했던 증거는 1910/1911년의 Missionsblatter에서도 나타난다. 1909년 12월 한국에 도착한 에카르트는 “이미 한국 도착 전에 나는 이것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상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온 정신을 다 쏟아야 할 정도인지” 믿을 수 없어 하면서 한국어 공부에 매달렸다고 보고한다.33) 언어 연구와 관련한 에카르트의 기고문은 한국 설화 소개34), 《천자문》 독해35) 등으로 이어진다. 1913년에는 숭신학교 교재로 《조선어문전》을 비공개 출판했다.36)

 

1915/1916년 Missionsblatter는 에카르트 신부가 한국어 문법책의 인쇄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한다.37)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매우 불완전한” 한국어 문법책을 드디어 출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쟁 때문에 더 진전되지는 못했다”는 단서에서, 에카르트의 《조선어문전》을 비롯한 한국어 연구가 이미 수도원 형제들에게 알려진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한국어 문법책은 전쟁으로 물론 더 진전되지 못했다. 전지 6장(분량)은 이미 인쇄되었다. 이런 문법책은 정말 힘든 작업이다. 나는 주님의 도움으로 완전히 질서 지워져 있지 않은 이 언어에 어느 정도 체계를 부여했기를 바란다. 한국어 구조를 조금이라도 살펴본 사람은 그에 비한다면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언어에는 규칙이 이미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다. 로만계와 게르만계의 언어구조와 많은 비교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는 그 의미와 구조(Geist und Aufbau)가 다른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기다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sch) 혹은 드라비다어족(Dravidisch) 혹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Malaipolynesisch)에 속하는지 여부가 오랫동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와 별도로 나는 여러 문화사적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다.38)

 

늦어도 1915/1916년 이전의 부분 인쇄를 거쳐 1923년 최종 출간된 《조선어교제문전》(에카르트 1923)에는 한국어 연구에 대해 Missionsblatter에 털어놓은 그의 고민들이 잘 드러난다. 총 438쪽의 문법책은 “어느 정도 체계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한국어를 9품사 체계(명사, 동사, 대명사, 형용사, 부사, 수사, 접속사, 후명사, 감탄사)로 조직했다.39) 기본적으로 전체 구성은 품사를 중심으로 한국어의 문법을 체계화하여 제시한 범주 중심 접근 학습서이다.

 

그러나 단원의 설정 기준이 단순히 품사 분류에 제한되지 않고 27과 (Wollen과 Mogen의 번역), 38과(daß의 번역), 39과(zu와 ob의 번역)와 같이 독일어 학습자를 고려하여 독일어와 대조하여 단원을 기획하거나 13과(명사와 동사의 존칭 형태), 14과(거절, 긍정, 강조의 표현), 41과(원인의 표현), 42과(양보의 표현)와 같이 언어 사용이나 의미에 초점을 두고 단원을 설정했다. 이러한 단원 구성은 품사를 기준으로 교재를 구성한 리델(1881)과는 차별되는 특징이다.40) 특히 한국 최초의 문법서로서 리델(1881)이 여타 서양인들의 문법서 저술에 조금씩 다른 품사 체계와 이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토대이자 주요한 기반 지식으로 소환41)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차별성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부록에 해당하는 문제풀이집(Schlussel)은 본서에 실려 있던 연습 문장들을 별도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으로, 총 45과에 2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일상 회화 외에도 조선의 역사, 구전 설화, 문헌 설화 그리고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 등에서 뽑은 내용들이 상당수 실려 있다. 문제풀이집(Schlussel)에 수록된 연습문제들 중 설화에 해당하는 것들은 따로 분류되고 보강되어서 1925년 한국 설화집으로 다시 발간되었다.42) 한국어 공부와 병행했던 한문 공부는 Missionsblatter에서 《천자문》43)에 대한 흥미진진한 해석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에카르트는 “한문이 4만 자에 이르는 데 비해 한글은 21글자에 불과하지만, 문법 자체가 한국어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천자문’은 수 세기 동안 중국인과 한국인들에게 으뜸가는 입문서였고 지금도 누구나 익혀야만 하는 기초 서적”이라면서, 서당에서 좌우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어가며 익히는 정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어교제문전》이 발간되고 불과 4년 만에 새로운 문법책이 또 등장한 것은 다소 의아스러운 일이다. 1927년 안셀모 로머의 《한국어문법》(로머 1927)44)이 그것이다. 1911년 12월 12일 한국에 도착한 로머 신부 또한 안성의 공베르(Antonius Gombert) 신부 본당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언어를 익혔다.45)

 

로머(1927)는 근대 독일어체인 쥐터린(Sutterlin)46)체로 기록된 등사판본으로 총 3권(Band I, II, III) 447쪽, 본문 총 48과이며 연습문제는 각 권마다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첫 장에 한국어 철자와 발음을 소개하고, 도입부에 별다른 서문은 없이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원장 신부의 책을 계승하여”47)라고 한 줄 밝히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1~6쪽까지는 발음에 관련한 기본 설명이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각 단어에 대해 라틴식으로 발음을 제시하고 독일어 뜻을 병기했다. 7쪽부터 시작되는 본문은 동사 현재형으로부터 출발하여 격, 어순을 중심으로 마지막 48과에서는 문어체(Buchformen)48)로 마무리된다. 연습문제에 해당하는 부록은 각 권의 끝에 별도로 첨부되어 총 46과의 읽기 자료와 그에 동원된 어휘들이 제시되어 있다. 3부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하다’를 중심으로 동사 어간 변화에 대한 색인표를 제시하여 용례를 찾아보기 쉽게 첨부했다.

 

로머(1927)가 절판되고 1936년 간행된 루치오 로트의 《한국어문법》49) 서문은 “이 책은 원래 저자의 것이 아니며 앞선 연구들, 특히 로머(1927)를 기반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대폭 개편되어서 새로 쓰인 부분이 많지만 문법 체제는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거의 동일한 문법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발견되는 로머(1927)와 로트(1936)의 가장 큰 차이는 10여 년의 시간차가 담보하는 체계성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로머(1927)는 동사의 시제를 설명하면서 격조사를 덧붙이는 식으로 의미 활용에 중심을 둔 설명 방식이지만, 로트(1936)는 동사 활용 체계를 어간의 종류에 따라 15개로 분류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했다. 로머(1927)가 하나의 문법 용례를 설명하다가 예문에서 제기된 숫자 문제를 언급하며 갑자기 ‘수’에 관한 설명을 장황하게 개입시키는 반면, 로트(1936)는 독립된 장을 할애하여 서수와 기수, 단위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체계적으로 시도했다는 점도 보다 체계화된 측면이다.

 

로트(1936)의 특성을 보자면, 문법, 단어, 연습 순서로 체제를 구성하면서 단어와 용례를 모두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품사는 학습과 크게 관련된 것만 다루는데, 동사 일반, 격, 어순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에 의한 철자(綴字)를 신철자법(Neue orthographie)이라 하여 구철자법과 대조하고50) 도입부에는 ‘Hankeul(한글)에 대한 설명을 별도로 포함하고 있다.51) 한글의 자모 수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현재와 같은 모음자 10개, 자음자 14개로 되어 있고 자음자의 명칭도 오늘날과 같은 ‘기역, …히읗’으로 되어 있다.52) 각 과마다 본문 안에 예시된 어휘들이나 뒤에 첨부된 연습문제의 문장들은 로머의 그것을 계승하되 보다 확장되어 있다.

 

실물로 확인되는 위의 세 문법책을 대조해볼 때 형태론에서 드러나는 에카르트(1923)와 로머(1927) - 로트(1936) 사이의 차이를 대표적인 문법 용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카르트(1923)는 한국어의 동사를 크게 ‘자립동사’(eigentliches Zeitwort)와 ‘비자립동사’(uneigentliches Zeitwort)로 분류하였다. 에카르트(1923)의 가장 큰 문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반동사(Uneigentliches Zeitwort, ‘sein’, ‘~이다’)53)는 종래 서양인의 한국어 연구에서 동사가 의미 중심으로 분류되어 온 것에 비해 최초로 통사론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54) ‘~이다’의 성격 규명은 국어학 연구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이 지속55)되고 있는 한국어 특유의 문법 현상으로 한국학자에 의해 최초로 용언(用言)으로 규정된 것은 에카르트(1923) 이후 7년이 지난 1930년에 이르러서였다.56) 로머(1927)와 로트(1936)에서 ‘~이다’는 독립된 용언 값을 부여받지 못하고 독일어 현상에 포괄되어 있는 조동사(Hilfswort, ‘sein’)와 중성동사(neutrales Verbum, ‘sein’)로 분류되었다.

 

에카르트(1923)가 또 하나의 한국어 특유의 현상을 별도로 규정해낸 것으로 ‘중동사’(Mittelzeitwort)57)를 들 수 있다. 중동사는 형용동사와 자동사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주로 감정을 표시하는 ‘아프다, 심심하다, 원통하다, 분하다, 섭섭하다, 시렵다, 즐겁다’를 들고 있다.58) 로머(1927) - 로트(1936)는 이 같은 감정동사를 별도 규정 없이 앞의 ‘중성동사’(neutrales Verbum)에 포함시켰다. 즉 동작성이 부여된 일반 동사는 ‘aktiven Zeitwortern’으로 분류하고 독일어에 없는 현상으로 보조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를 ‘neutralen Zeitwortern’으로 분류했다.

 

형태론의 범주 외에 내적 체계를 볼 때, 연습문제로 활용된 문장과 어휘들은 로머(1927) - 로트(1936)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이 계승되고 있으며, 에카르트(1923)에서는 전혀 다른 문장들이 동원된다. 또한 에카르트(1923)만 모든 문장과 어휘를 라틴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도 에카르트(1923)만의 단독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에카르트(1923)와 로머(1927) - 로트(1936) 사이에 변별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공통부분 또한 당연히 존재한다. 동사의 활용 체계에서 에카르트는 ‘모음어간으로 끝나는 동사(1~5), 자음어간으로 끝나는 동사(6~10), 어간이 자음으로 끝나지만 자음이 탈락하거나 변하는 동사(11~17)’의 세 부류로 나누고 전체 17개의 활용규칙으로 설명하고 있다.59) 로트(1936)는 이 같은 동사 활용 체계를 모음어간과 자음어간으로 크게 A와 B 그룹으로 양분하고 ‘아’, ‘이’, ‘오’, ‘우’형 등 15개의 하위분류를 두었는데, 이는 동사 어간 변화에 대해 별다른 규정 목록을 제시하지 않은 로머(1927)보다는 에카르트(1923)의 체계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어에 비해 가장 큰 특이성을 보이는 한국어의 격조사 경우에도 거의 유사한 체제를 보인다. 에카르트는 8개의 격을 두었다. ① 주격(Nominativ, 이/가), ② 속격(Genitiv, 의), ③ 여격(Dativ, 에게/에), ④ 목적격(Akkusativ, 을/를), ⑤ 호격(Vokativ, 아/야), ⑥ 탈격(Ablativ, 으로/로), ⑦ 처격(Lokativ, 에게서/에서), ⑧ Casus absolutus(은/는)가 그것이다. ①~④격은 독일어의 격 체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리델(1881)이 ‘oppositif’로 설정했던 ‘은/는’을 ‘Casus absolutus’로 바꾸고 그 분포 및 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로머와 로트 역시 8개의 격을 두었다. 그러나 처격을 Lokativ I과 Lokativ II로 나누고, 방위격과 장소격으로 규정한 것은 에카르트와 차이를 보인다. 에카르트의 Casus absolutus(은/는)는 로머(1927) - 로트(1936)에서 Oppositionspartikel로 명명되어 대위를 이루는 용법에 활용됨을 보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독일 선교사들에 의해 출판된 독-한 문법서는 니바우어(1912) - 로머(1927) - 로트(1936)의 계보로 이어지는 한 종과 에카르트의 《조선어문전》(1913) - 《조선어교제문전》(1923)으로 이어지는 또 한 종의 문법서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수도원 내에서 활용이 높은 문장과 어휘를 중심으로 문법적 요소는 가장 기본적인 것만 중요도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고, 후자는 새로운 분류 체계와 통사론적 접근으로 학문적 연구 성과를 표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도원의 공동 작업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온 듯한 인상을 주는 에카르트의 한국어 연구 활동은 어떤 계보 선상에 놓이는 것일까? 1914년 팡가우어 수사가 징집되기 전에 이미 《조선어문전》(에카르트 1913)60)이 발간되었음에도 그가 소지하고 떠난 책은 에카르트(1913)가 아닌 니바우어(1912)였다. 1923년 전반기 연대기에는 중국 선교를 앞두고 ‘조선말 문법책을 중국말 문법책으로 바꾸는’ 작업에 대한 보고가 나온다.61) 에카르트(1923) 발간이 1923년 6월이므로 이미 그 전에 존재했던 ‘조선말 문법책’, 즉 니바우어(1912) 또는 에카르트(1913)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3년과 1923년의 연대기에는 에카르트(1913)는 물론이고 에카르트(1923)의 언급도 전혀 없다.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은 에카르트가 일본에서 한국의 언어와 민족의 기원 등에 대해 발표한다는 언급뿐이다.62)

 

에카르트 신부는 계속 연구를 위해 교토, 나라, 가나사와, 도쿄, 닛고, 미야노시타, 가마쿠라 시즈오카, 나고야 등의 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박물학과 민속학을 연구하는 독일협회와 교토의 제국대학에서, 한 번씩 강연을 하도록 초청되었다. 그는 두 번 모두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주제로, 처음에는 독일말로, 다음 도쿄에서는 일본말로 했다.

 

에카르트의 한국어 연구 활동에 대해서는 보고를 누락시키지 않는데, 유독 그 저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에카르트(1913)의 명칭과 존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1923년판 에카르트이다. 에카르트는 서문에서 “어려운 동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 문법서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체계가 시도되었다. 이 체계는 같은 저자에 의해 먼저 숭신학교를 위한 한국어 문법서 《조선어문전》(서울, 1913)으로 비공개 출판된 바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읽기 자료로 제시된 문장들은 모두 원래의 것들이지만 4과, 10과, 11과만 1910년 《경향신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덧붙였다.63)

 

국내외에서 꽤 유명했던 에카르트(1923)64)에 대한 언급이 수도원 내에서 전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정황들 속에서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에카르트의 문법책 저술이 처음부터 독자 대상을 달리 고려한 전문적인 문법 저술이었을 가능성이다. 1915/1916년 Missionsblatter의 보고에서 나타나듯 부분적인 인쇄 작업들을 수년에 걸쳐 진행했고, 정식 출판은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 이루어졌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실상 에카르트(1923)가 지닌 전문성은 선교사들에게 다소 어렵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비교적 훗날이지만 학계에는 그의 문법책이 어렵다는 비판이65) 제기되기도 했다. 1926년 동경에서 발표하고, 1928년 소책자로 출판된 그의 Der Ursprung der koreanischen Schrift66)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자에 의한 논평이 첨부되었다.67) 언더우드(H.H. Underwood)의 서지 목록에는 《조선어문전》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 대신 에카르트의 한국어 어휘모음집을 비롯하여 에카르트(1923) 등 일련의 저작들이 수록되어 있다.68) 이 같은 정황들은 선교 현장 한국이 아닌, 독일 본국에서 발간된 에카르트(1923)의 주요 독자층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라기보다 한국 또는 동아시아에 대한 민속학적 관심을 표명하는 지식인층과 독일 내 한국어 학습 수요자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들은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문법책보다는 처음부터 시도되었던 이야기식의 친근하고 쉬운 책을 선호했다. 다음의 《연대기》는 에카르트의 문법책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체제를 보이는 로트(1936)의 발간을 반가워하는 정황을 보여준다.

 

12월 7일에 루치오 원장 신부가 거의 600면에 달하는 큰 책을 출간했는데, 그것은 특히 그의 동료들, 이미 조선에 와있는 동료들뿐 아니라 앞으로 조선에 오게 될 동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은 연습문제가 포함된 독한(獨韓) 문법서이다. 이 책의 초판은 안셀모 신부가 편집하여 백 권이 등사판으로 발행되었었다. 그것은 이미 절판된 지가 오래이고 또 안셀모 신부가 증보판을 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루치오 원장 신부가 이 수고를 맡게 되었다.

 

이제 이 작업이 완료되어 8절 호화판으로 모든 교과과정이 포함되어 나왔다. 이로써 이제 조선어 공부가 즐겁고 쉬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30세로 젊어져서 그 책을 가지고 말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 조선어 공부에 대한 불안은 사라졌다. 그들은 그 책을 좀 복잡한 소설을 읽듯이 공부하면 되고, 라틴어의 학습을 위해 그들이 했던 노력의 3분의 1도 들이지 않아도 된다. 고향에서 오는 친애하는 많은 동료들은 이 책을 고맙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1천 권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구할 기회는 충분히 있다.69)

 

둘째, 위의 《연대기》에서 언급하는 로트(1927)의 ‘초판’에 해당하는 “안셀모 신부가 편집하여 백 권이 등사판으로 발행된” 로머(1927) 첫 장 도입부에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원장 신부의 책을 계승하여”70)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25년 에카르트의 갑작스러운 팔도구 본당 주임 해임과 1928년의 독일 귀환, 그리고 퇴회까지에 얽힌 수도원 내의 상황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배경에 대한 열쇠라 할 수 있다. 1925년 8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Abt. Norbert Weber)의 두 번째 한국 방문에서 에카르트 신부와 나눈 ‘간도교구 분리’ 논의가, 공교롭게도 덕원 수도원 건립과 관련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아빠스(Abt. Bonifatius Sauer)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불과 두 달 후인 1925년 10월 에카르트는 팔도구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후 서울 수도원에서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한 에카르트 신부가 독일로 귀원하고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난감한 사태로 인해 부득이 퇴회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에는 수도원 내에서 에카르트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하게 하는 요소들이 잠재되어 있다.71) 그러나 로머(1927)가 발간된 1927년 시점은 에카르트가 아직 퇴회 전이며, 더구나 아직 한국에서 한창 활동하는 시기였다.72) 그럼에도 저술 계보가 다름을 새삼 확인케 하는 표명에 가까운 로머(1927)의 한 줄 기록은 에카르트(1923)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에서 독-한 문법서 저술과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독-한 사전 편찬의 문제이다. 한국어 학습에서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답답함은 손쉽게 대응어를 찾는 작업, 즉 사전이 있다면 단어 대 단어의 초보적인 의사소통이라도 가능하리라는 데 대한 욕구로 한국 선교의 초기 개신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척 선교사들은, 아마도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공책이나 묵은 편지의 뒷장이나 소매, 종이 등 무엇이든 가까이에 있는 평평한 바닥에다 단어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아, 사전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열망을 가졌다. 문법의 서법이나 시제, 혹은 관용구 등을 찾아내면서 그들은 마치 자기가 콜롬버스나 아르키메데스가 된 것 같은 느낌을 흔히 가졌다. 다행히 프랑스의 선교사인 리델 주교가 숲 속에 길을 뚫어놓긴 했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용어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깊은 고뇌의 경험으로부터 정확한 단어들을 찾는 것은 격심한 펌프질을 연상시키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많은 단어 목록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사전으로 편찬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사전들 중에서는 언더우드와 게일의 것이 제일 유명했다.73)

 

1909년 비교적 후발주자로 한국 선교에 뛰어든 독일 선교사들에게는 어휘 학습의 도구로 이미 활용도가 높은 게일(J.S. Gale)의 《영한자전》과 특히 종교적 어휘 수록에 친화성이 높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불?뎐》(韓佛字典)74)으로도 훌륭한 대처 수단이 되었음을 연혁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게일의 한영사전의 제3증보판이 나왔기 때문에 조선어 공부가 이제 더 쉬워졌다는 사실을 후에 올 사람들을 위해 말해둔다. 이 사전은 오래전에 매진되어서 쓸 만한 사전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미 8년 전에 재판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고, 이미 그 원고가 동경에서 인쇄 중에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지진으로 유실되고 말았다. 새 사전은 1,780면에 75,000개의 조선어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호화판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고, 이 사전에도 결점은 있다. 찾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75)

 

독일 선교사들 또한 사전 편찬에 착수했었던 기록은 확인된다. 지난 1973년 한국 선교 60주년을 기념하여 회고록 형태로 출판된 《환갑》(HWAN GAB :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Mandschurei)에서 카스파르 신부(Dr. P. Adelhard Kaspar)는 루치오 로트 신부의 한문사전인 Han-Moun76)을 비롯하여 1916년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P. Kanisius Kugelgen)의 등사판본 문자사전과 1924~1928년의 표제어 4만에 이르는 한-독 사전, 1931년 종래 사전에 종교 어휘를 보강한 한-독 사전 작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퀴겔겐 신부의 사전류는 견본책으로 등사판본을 소수 인쇄하였을 뿐, 일제 강점기 동안 정치적 환경 때문에 사전류는 정식 출판되지 못했고, 미발간의 자료마저 1949년 공산주의자에 의한 수도원 해산 당시 소실되었다고 카스파르 신부는 전한다. 종래 독일 선교사들의 독-한 사전 작업이 알려진 바가 없는 가운데, 퀴겔겐 신부의 한-독 사전 작업에 대한 이 회고는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카니시오 신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 당국에 의해 직접적인 선교 활동이 금지되자 문자사전(Zeichenlexikon)을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1916년 ‘문자사전’(Mundja-Lexikon)은 필사 작업을 마쳤고…등사판본(hektographisch)으로 견본 75부를 인쇄하였다. …가장 필수적인 3000개의 한자 표의문자를 수록한 이 사전은 당시 모든 선교사들이 지참하고 있던,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레온(Leon Wieger)의 《한자어원사전》(Lecons etymologiques des caracteres Chinois)에 수록된 모든 한자들을 다루었다. 이 사전은 한자의 발음과 그에 대한 한글 및 독일어 해석을 병행했다. 1917년에는 사전 편찬의 두 번째 작업으로 ‘알파벳-음성’에 따른 문자 배열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이는 출판되기도 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서 소실되었다. …사전 편찬의 세 번째 작업은 앞의 ‘문자사전’과 동일한 연작(Wurzelreihe)으로…독일어와 한국어 번역을 병행하여 약 1만 단어를 배치하였는데, 각각 80쪽짜리 10권으로 엮어졌다. 또한 1924년부터 1928년 사이에 카니시오 신부는 독-한 사전 작업에 착수하여 등사판본으로 70부가 인쇄되었다. 그것은 총 1350쪽에 달하는, 4만 개의 독일어 대응어를 배치하는 작업이었다. 1931년에는 종교 어휘를 특히 고려하여 보완된 한독사전 작업이 이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치적 환경의 전개 때문에 사전으로 간행되지는 못했다.77)

 

《환갑》에서 언급되는 퀴겔겐 신부의 사전에 대해서는 사전명이 아니라 ‘Umfangreiche Vorarbeiten fur ein Lexikon der chinesischen Zeichen’(중국어 부호 사전을 위한 방대한 사전 작업)으로 명명하고 있다. 1916년과 1917년의 ‘문자사전’이라는 한문사전 작업에서 더 진보된, 1924년 이후의 한-독 대응어사전에 대해서도 정확한 명칭이 언급되지 않아 카스파르 신부의 기억에 의지한 이 기록 외에 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마르의 《분도통사》에서도 퀴겔겐 신부가 전쟁으로 선교 활동이 소원하던 기간 동안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 한자사전 편찬 작업’을 했으며78) 1924년 만주 팔지 본당에서 그해 성탄 15,000개의 표제어가 수록된 두 권짜리 독-한 사전의 첫 권을 출판했다79)고 언급하지만 역시 정확한 서지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그 외에 사전류는 의료인을 위한 라틴어 사전 Latein fur Mediziner(P. Gerold Fischer, 덕원, 1947)가 언급되고 있다.

 

독일 선교사들의 초기 사전 편찬이 주로 한문을 중심으로 한 작업이었다는 점은 “고전이나 학술서를 읽을 때 꼭 필요한 수많은 한자”80)의 어휘 학습에 별도의 참고서가 필요했던 상황을 말해준다. 실상 말하고 쓰기에 쓰이는 한국어 학습과는 별도로, 문서를 해독하거나 성경과 교리교육에 동원되는 한국어에서 한자의 침투는 한국어를 이중 언어로 느낄 만큼 깊은 것이었고, 독일 선교사들의 선교 초기에 해당하는 1914년 무렵부터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 한자사전 편찬 작업’은 절실한 것이었다. 나아가 독일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훨씬 전부터 중국 만주에서 로스 등 중국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 의해 한글 성서가 번역 · 출판 반포되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한국인에 의해 한글 성서와 한문 성서가 간행되었으므로, 이러한 자료들이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에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는 점도 이러한 편찬 작업의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인식

 

독-한 문법책의 출판 외에, 선임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문법책을 들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안 형성되는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인식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 선교사들이 한국어 공부에서 난항을 겪는 요소는 서양 언어에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경어와 존칭,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안에서 한국어가 가지는 고유함과 동시에 한국어와 한문과의 착종 관계, 거기에 준전시 체제 이후 강화되는 식민지의 강요된 국어인 일본어라는 3개 언어의 요구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존칭법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서양 언어에 비해 한국어의 까다로운 존칭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것으로 여겨졌다. 존칭은 상대방에 대한 높임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화법인지 간접화법인지, 또 전달하는 이의 고하 여부에 따라 달랐다. 훗날 자신의 문법책에서도 장황한 설명에 한 부분을 할애하게 될 존칭어 부분에 대해 에카르트는 Missionsblatter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로 이것이 언어를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기 위해 대상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사제에게 밥 먹었는가를 물으려 하면 “진지 잡수십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제는 “너, 밥 먹었냐?”라고 말해야 한다. ‘진지’는 ‘밥(쌀)’에 대한 존칭어이고, ‘잡수시다’는 ‘먹는다’의 존칭어, ‘십니까’는 ‘었나?’ 의문사의 존칭어이다. ‘밥 먹었는가?’라는 질문은 또 경우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아버지, 혹은 사제는 아이에게 “먹었니?”라고 하고, 장성한 아들에게는 “먹었느냐?”라고 한다. 사제는 몇몇 외교인들을 만나서 다소 높임을 하여 “먹었소?”라고 한다. 형제들 혹은 친구들끼리는 “먹게”, 사제가 높은 사람에게는 “잡수시오”, 한국인들은 사제에게 “잡수십니까?”(역자 주 : “잡수셨습니까?”의 오기) 하면서 다른 동격의 사람에게는 “잡소”라고 하는 등등이다. 거기다 아직 다른 양식이 더 있는데, 같이 자리에 없었던 사람의 말을 전할 때 또한 다른 방식의 존중을 표해야 한다. 게다가 누구에게 말하는가에 따라 또 다르다. 이러한 말하기의 까다로움은 삶의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 있고, 현지에서 직접 살아가면서만 배울 수 있다.81)

 

이와 같은 경험들은 에카르트(1923)에서 존대법에 대한 5단계 설정으로 잘 나타난다. (서술형 1 - 극존칭, 서술형 2 - 동등한 지위, 서술형3 - 친구들 사이, 서술형4 - 축약형, 서술형5 - 아이들이나 아래 사람에게) 그리하여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 따라 동사 어미가 구별되고 동사 자체까지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82) 로머(1927)와 로트(1936) 또한 경어의 사용법에 대해 낮춤말은 ‘niedere Form’, 수평적 관계에서 행하는 말투를 ‘mittlere Form’, 높임말은 ‘hohe Form’으로 규정하면서, 별도로 ‘반말투’를 ‘Zwischenformen’ 양식 안에서 설명했다. 그 외에도 어미 ‘시’를 붙여줌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경어를 ‘Ehrende Zeitworter’로, ‘부친’, ‘가친’, ‘춘부장’ 등 고유 명칭 자체로 높임의 등급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을 ‘Ehrende Heistworter’로 규정했다.83)

 

그러나 “그나마 이것은 연습을 통해 조금 나아지는 것”이었다. 더 어려운 것은 한국어와 한문이 섞인 말을 하는 것이었고, 또 별도로 한문만 더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책들이 한문”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호노라트 밀레만(Honorat Millemann)은 한글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였지만 “신문이나 대부분의 책, 편지들, 문서들, 매장 안팎의 대형 간판들, 철도 등등에서는 모두 한자를 사용”하므로 “한국에서는 한자를 모른다면 언제나 고생스럽고 당혹감을 느낄 것”이라고 충고했다.84) 에카르트 또한 “한글을 배우는 것은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고전이나 학술서를 읽을 때 꼭 필요한 수많은 한자”도 배워야 한다면서 초기 한국어 학습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85) 그러나 에카르트(1923)의 서문에는 뿌리 깊은 한자문화의 영향 아래 “한국에는 사실상 이중 언어가 있”지만, “만일 언어로써 그 문화 수준을 잡는다면 한국이 전 지구의 문화 중 제일위를 점할 것”이라면서 “한국 언어는 간단하고 쉽고 표현 능력이 가장 많은 문자로 어느 문자에도 비할 수 없”고, “한국어의 수만 마디의 형용사와 동사는 그들의 예민(銳敏)한 관찰 능력을 증명한다”고 피력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독일 선교사들은 한글 자체에 대해 장점이 많다고 파악했다. 밀레만은 한국어 문법을 “폭풍 속의 요새”와 같다고 표현했지만 “매우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배우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사도, 성도 없으며, 명사 변화도 단순하고 규칙적일뿐더러 25개의 자모는 하루 만에 배울 수 있고, 발음도 거의 다 독일어에 있다”는 것이었다.

 

동양의 언어구조는 서양의 그것과 정말 다르다. 문장 구조는 말하는 즉시 각 구절을 뒤에서부터 번역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주님의 집에서 부족함이 없는 이는 복되도다”라는 말을 한국말 그대로 옮기면 “집에서, 부족함이 없는, 복되다, 그 사람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진짜 그렇다. 이 외의 다른 심각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어가 매우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우리 독일어를 배우기보다 더 쉽다고 확신한다. 사실 한국어는 매우 단순하다. 관사도, 성도 없으며, 명사 변화도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25개의 자모는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다. 거의 모든 발음이 독일어에 있는 것들이다.86)

 

베버는 “한자(漢字)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탁월한 문화적 성취”라면서 한글의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구조는 그 철자 조형의 용이함과 함께 인쇄문화의 발달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87) 토마스 옴(Thomas Ohm)은 한글의 조형이 “2원적 음절문자 체계(den beiden japanischen Silbenschriften)인 일본어보다 완성도가 높다”88)고 평가했다. 밀레만은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안에서 한중일 세 언어가 각각 지니고 있는 고유성을 설명하며, 한국어의 자모 체계와 중국어로부터 확실하게 변별력을 가지는 철자 형성에 대해 짚어냈다.

 

이들 세 언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는 문법적 구조에서 매우 광범위한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각 해당 문자의 암시나 상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어는 뜻글자라서 각각의 글자에 완전한 뜻이 담겨있다. 일본어는 음절문자 체계라서 각 글자가 철자이다. 한국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자모의 언어로 각 글자가 철자로서 모든 유럽 언어처럼 음가를 지닌다. 차이점은 서로 동등하게 배치하는데 때로는 아래에, 때로는 나란히 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글자에 따라 철자는(1-4개 정도 있다) 작게, 또는 크게, 넓게 혹은 좁게도 쓴다. 그 결과 한국어 활자체는 먼 친척 관계인 중국어와 매우 다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언어는 수천 년 동안 서로 고유한 의사소통으로 기능하면서 상호 접합점으로 발달해왔다.89)

 

 

4. 결론

 

선교 활동을 위해서는 선교지의 언어 습득이 최우선 과제였다. 선교지에 정착하기 위한 가장 초기의 실무에 속하는 관청 업무에서부터 선교 활동에 요구되는 한국인과의 의사소통과 성경 번역, 선교사 개인 생활의 필요에까지 현지 언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학습교재에 대한 편찬과 저술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선교사들은 1909년을 출발점으로 하여 니바우어(1912) - 에카르트(1913) - 에카르트(1923) - 로머(1927) - 로트(1936) 등 총 5책에 이르는 독-한 문법책을 발간했다. 초기의 독-한 대화집 형태를 띤 소책자 니바우어(1912)로부터 출발하여 훨씬 체계화된 동사 분류를 보강한 로트(1936)에 이르기까지 초기의 문법 분류와 읽기 연습으로 주어진 문장들과 어휘들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거나 부분 확장되었다. 중간에 숭신학교 교재로 출판되었고(1913), 보다 조직적인 문법 체계를 구축한 에카르트의 저술(1923)은 수도원 내에서 학습교재로 활용되던 여타의 문법책들과는 성격과 계보를 달리하는 책으로 무엇보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학계에는 그 명칭만 알려졌을 뿐 실물 확인이 된 바 없는 로머(1927)라는 중간 단계를 건너뜀으로 해서, 현전하는 기록과 출판물에 의거, 에카르트(1913)로부터 로트(1936)까지 이어져 오는 일련의 문법책 발간을 단선적 계승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새로이 발굴된 로머(1927)의 서문에 “카시아누스 니바우어 원장 신부의 책을 계승하여”라는 언명을 통해 에카르트(1913) 이전의 니바우어 문법책의 존재가 드러나고, 1912년 연혁을 통해 니바우어(1912)의 출판 사실이 명확히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니바우어(1912)로부터 새롭게 설정되는 문법책 발간의 계보는 문법 설명의 내적 체계와 수도원 내 선교사들의 학습서 활용을 근거로 할 때 니바우어(1912) - 로머(1927) - 로트(1936)로 이어지고, 에카르트(1913) - 에카르트(1923)는 독일 내 한국어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보다 전문적인 한국어 교재로 파악할 수 있다. 문법서 편찬과 함께 독-한 사전에 대한 작업은 1916년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에 의해 등사판본 한문사전 작업이 시작되어, 1924년 이후에는 한-독 대응어사전으로 확장되었고, 1931년 종교 어휘를 보강하는 등 지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정식 출간되지는 못했다.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인식은 문법서 저술에 고스란히 용해되어져 나오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 선교사들이 한국어 학습에서 난항을 겪었던 요소는 서양 언어에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경어와 존칭,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안에서 한국어가 가지는 고유함과 동시에 한국어와 한문과의 착종 관계, 거기에 준전시 체제 이후 강화되는 식민지의 강요된 국어인 일본어라는 3개 언어의 요구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어와 달리 관사도, 성도 없고, 명사 변화도 규칙적인 한국어가 학습하기에는 더욱 용이한 면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한글의 조형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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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ippon. 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 und dessen Neben- und Schutzlandern : Jezo mit den Sudlichen Kurilen, Krafto, Koorai und den Liukiu-Inseln 7 volumes, Leiden, 1832~1852.

《일본》의 발간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본고는 1832년부터 1851년 사이에 20책으로 분책 발간되었으나, 합본이 이루어진 1852년 판에서 한국 기술이 포함되었다는 설을 따랐다. 고영근, <지볼트(Fr. von Siebold)의 韓國記錄 硏>, 《동양학》 19, 1989, 4~5쪽 참조.

 

2) 지볼트의 한국어 관련 연구는 고영근, 위의 글, 《동양학》 19, 1989, 11~20쪽 참조.

 

3) Andreas Eckardt,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 mit Lesestucken und Gesprachen, Heidelberg : Groos, 1923(김민수 · 고영근 편, 《역대한국문법대계》 8, 박이정, 1979). 이하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에카르트(1923)로 약칭한다.

 

4) 이극로의 베를린 대학 한국어 강좌에 대해서는 조준희, <이극로의 독일 조선어강좌 관계 사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9, 2004 참조.

 

5) 전성기, <번역과 이중어사전>, 《한국사전학》 1, 2002 ; 이상현, <언더우드의 이중어사전 간행과 한국어의 재편과정>, 《언더우드 내한 125주년 및 ‘언더우드자료집 출판’ 기념 학술회의 발표집》, 2010 ; 이은령, <19세기 이중어 사전 《한불자전(1880)》과 《한영자전(1911)》 비교 연구>, 《한국프랑스학논집》 72, 2010 ; 황호덕, <번역가의 왼손, 이중어사전의 통국가적 생산과 유통 - 언어정리 사업으로 본 근대 한국(어문)학의 생성>, 《상허학보》 28, 2010.

 

6) 황호덕, 위의 글, 《상허학보》 28, 2010, 112쪽.

7) 국어학계에서 통칭 쓰는 번역어로 ‘한어문전’을 따랐다. 이하 리델(1881)로 약칭한다.

 

8) 송기중, <개화기에 이루어진 서양인의 한국어 연구>,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I,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심지연, <개화기 프랑스 사람들의 한국어 연구에 대하여>, 《민족문화연구》 48, 2008.

 

9) 이숭녕, <천주교 신부의 조선어 연구에 대하여>, 《아세아연구》 8-2, 1965 ; 고영근, <國語文法硏究 一世紀(上)>, 《한국학보》 12, 1978 ; - - -, <19세기 전반기의 서양인의 국어연구 자료>, 《관악어문연구》 3, 1978.

 

10) 강이연,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 GRAMMAIRE COREENNE 연구 -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수법과 번역학적 의의>, 《프랑스어문교육》 29, 2008 ; 이은령, <한어문전의 문법기술과 품사구분>, 《프랑스학연구》 56, 2011 ; - - -, <《한어문전 Grammaire Coreenne》과 19세기 말 문법서 비교 연구>, 《한국프랑스학논집》 78, 2012, 456쪽.

 

11) 원윤희 · 고예진, <최초의 독일어권 한국어 학습서 《조선어교제문전》 연구>, 《독일어문학》 56, 2012 ; 고예진, <19세기 서양인의 한국어교재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12) 고영근, <國語文法硏究 一世紀(上)>, 《한국학보》 12, 1978.

13) 조현범,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교회사연구》 33, 2009.

14) 원윤희 · 고예진, 앞의 글, 《독일어문학》 56, 2012 ; 고예진, 앞의 글, 2013.

15) Chronikbrief aus Seoul, April 1909.

16) Chronikbrief aus Seoul, April 1909.

17) Chronikbrief aus Seoul, April 1909.

 

18) Andreas Eckhardt(옥낙안), Wie ich Korea erlebte, Frankfurt/Main : Lutzeyer, 1950(이기숙 역,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살림, 2010, 76쪽).

 

19) 민족 언어와 사고(심리)는 19세기 독일 민속학의 주요 연구 대상이었다. 독일 민속학을 의미하는 Volkskunde라는 용어는 18세기 인간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계몽주의 지식인 그리고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행정가들에 의해서 최초로 쓰이게 되었다. 당시 이들은 Volkskunde를 지역문화 기술학으로 이해하여 각 지역의 독특한 풍습을 기록하는 분야로 인식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Volkskunde는 농촌과 과거의 세계를 동경하는 낭만주의 지식인의 일반적인 태도와 프랑스 지배를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민족주의가 어울려 낭만적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민속학 연구에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민족정신으로서 당시 많은 민속학자는 신화 혹은 동화 등의 구비문학에 민족정신이 잘 함축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역사적 연구와 비교 연구를 하였다. 그림(Grimm) 형제의 신화학 연구는 당시의 대표적인 민속학 연구였다. 이상현, <18세기와 19세기의 독일민속학 - 민족주의 이념과 민속학 연구 ->, 《비교민속학》 17, 1999, 452~453쪽.

 

20) Zeitschrift des Vereins fur Volkskunde Heft. 4, 1911, S. 355-367 ; ibid. Heft. 1, 1912, S. 69-79.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 설화 수집과 설화를 통한 한국 문화 이해에 대해서는 박보영, <20세기 초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설화 번역 - Missionsblatter(宣敎誌)와 독일 《민속학잡지》를 중심으로 ->, 《대구사학》 117, 2014 참조.

 

21) 성 오틸리엔의 선교지 Die Missionsblatter von St. Ottilien은 오틸리엔 수족이 첫 선교지로 동아프리카에 진출하던 당시부터(1887. 11. 16) 선교지의 소식을 나누기 위해 발행했던 선교지이다. 이하 각주에서는 MBO로 약칭한다.

 

22) Andreas Eckhardt, “Was die Koreaner erzahlen”, MBO 12, 1911, S. 165-170 ; 한국인 Jean An, “Die vier Leichen am Berge”(4구의 시체), MBO 17, 1916, S. 296-297 ; - - -, “Das Siegel”(인장), MBO 17, 1916, S. 361-363 ; Chrysostomus Schmid, “Sa-Humuksang-Betrachtung vom Tode”, MBO 23, 1922, S. 169-170.

 

23) 이는 리델의 《한어문전》(Grammaire Coreenne)이 ‘서울 공용어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어 문법 전반을 체계화’했다는 평가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강이연, <최초의 한국어 연구 - 한-불, 불-한 사전들과 한국어 문법서>, 《프랑스학연구》 31, 프랑스학회, 2005, 13쪽.

 

24) Chronik aus Korea, Mai 1909.

25) Chronik von St. Benedikt, Seoul, Korea, Juni 1909.

26) Chronik aus St. Benedikt, Seoul, Korea, Februar 1910.

27) Chronik St. Benedikt, Seoul, Korea, Mai 1910.

28) Chronik aus St. Benedikt, Seoul, fur die Monate August · September & Oktober 1910.

29) Chronik von St. Benedikt, Seoul, Mai - Juni - Juli 1912.

30) Br. Paschal Fanguer, “Kriegsgefangen in Japan”, MBO 15, 1914, S. 202-206.

 

31) 이하 니바우어(1912)로 약칭한다. 단, 팡가우어 수사가 전쟁 와중에 독일 모원에 보낸 편지인 이 글에서 특정한 문법책의 고유명사로서 제목을 쓰지 않고, 일반적인 문법책으로서 ‘한국어 초급 교본’이라 명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뮈텔 주교 일기》 6, 1920. 7. 26.

33) P. Andreas, “Aus Korea”, MBO 11, 1910, S. 30-40.

34) P. Andreas, “Was die Koreaner erzahlen”, MBO 12, 1911, S. 165-170.

35) P. Andreas, “Die koreanische = chinesische Fibel”, MBO 14, 1913, S. 172-175.

 

36) “Vorwort der Verfassers IX”, 에카르트(1923). 1913년이라는 출판 연도를 주목해 볼 때 《조선어문전》이 앞서 연혁에서 보고되었던 “다음 해에는 모든 신부님들이 함께 협력하여 올바른 대화 문법서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던 그 책자일 개연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나 연혁의 보고에 부합하는 여러 정황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조선어문전》이 니바우어(1912)의 연속선상에 놓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검토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37) P. Andreas, “Kleine Missions Post / Aus Korea”, MBO 16, 1915, S. 180-181.

38) P. Andreas, “Kleine Missions Post / Aus Korea”, MBO 16, 1915, S. 180-181.

 

39) 에카르트 신부의 1923년 한국어 문법책에 대한 국어학적인 내용 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고영근, 앞의 글, 《한국학보》 12, 1978, 150~152쪽 ; 원윤희 · 고예진, 앞의 글, 《독일어문학》 56, 2012 참조.

 

40) 고예진, 앞의 글, 2013, 178~179쪽.

41) 이은령, 앞의 글, 《한국프랑스학논집》 78, 2012, 456쪽.

42) Andreas Eckhardt, Koreanische Marchen und Erzahlungen : zwischen Halla- und Paktusan, St. Ottilen, 1925.

 

43) P. Andreas, “Die koreanische = chinesische Fibel”, MBO 14, 1913, S. 172-175. 에카르트는 이 글에서 《천자문》 첫 페이지의 도판을 첨부하였다. 에카르트가 원용한 《천자문》은 주흥사(周興嗣) 《천자문》으로, 한국어 이중모음 사용, 구개음화 발생 전 판본이며 19세기 후반 간본으로 추정된다.

 

44) Anselm Romer, Koreanische Grammatik II Auflage, St. Benedikt, Seoul, 1927. 이하 로머(1927)로 약칭한다. 2판이라는 서지사항으로 미루어 초판본의 발간이 언제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독일 선교사들의 출판 기록에 대한 회고록에 해당하는 P. Adelhard Kaspar의 “Die Veroffentlichungen der Benediktinermissionare in Tokwon und Yenki”(Adelhard Kaspar · Placidus Berger, HWAN GAB :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Mandschurei, Munsterschwarzsch, 1973)에는 로머(1927)의 발간을 ‘1930년 이전’으로 불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등사판본인 로머(1927)의 보급이 대량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요한네스 마르(Johannes Mahr)의 《분도통사》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몇 년 동안 로머 신부가 한국어 문법책 작업에 매달렸다는 내부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요한네스 마르, 왜관수도원 편역,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187쪽). 그렇다면 늦어도 1918년 이후부터, 한편으로는 동아프리카 선교 파견이 차단되고 한국에서는 원산교구 사목을 맡게 되면서 선교사 파견이 늘어난 1924년과 1925년, 특히 1925년 원산 수녀원에 독일 수녀들의 파견이 결정되면서 문법책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한 시점 무렵으로 초판 발행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로머(1927) 2판의 한국 내 유일한 소장본은 원산 수녀원을 전신으로 하는 대구 툿징베네딕도회 수녀원의 것이다.

 

45) Chronik von St. Benedikt, Seoul, Mai - Juni - Juli 1912.

 

46) Sutterlinschrift. 1911년 베를린 출신의 글꼴 제작자인 쥐터린(Ludwig Sutterlin, 1865~1917)이 프로이센 문화부의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만든 새로운 필기체. 1915년부터 쥐터린체는 필기체로 학교에서 가르쳤다. 인쇄 글꼴인 프락투어와 병행하여 쓰기 수업에서 쥐터린체를 교육받은 세대인 독일 선교사들의 초기 문헌은 대부분 쥐터린체로 파악된다. 독일어 서체인 프락투어와 쥐터린체 등에 대해서는 최경은, <나치의 문자정책>, 《독일언어문학》 62, 2013 참조.

 

47) “Einleitung”, 로머(1927).

 

48) 48과 문어체(Buchformen)에서는 보통 구어체와는 다른, 책에서 쓰이는 여러 어법을 다룬다. 로머(1927)는 48과, 루치오 로트의 Grammatik der Koreanischen Sprache(Tokwon, Korea, Abtei St. Benedikt, 1936)는 44과에서 각각 다루는데, 양쪽 다 맨 마지막 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49) Lucius Roth, Grammatik der Koreanischen Sprache, Tokwon, Korea, Abtei St. Benedikt, 1936(김민수 · 고영근 편, 《역대한국문법대계》 9, 박이정, 1979). 이하 로트(1936)로 약칭한다.

 

50) 루치오 로트 신부의 1936년 한국어 문법책에 대한 국어학적인 내용 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이숭녕, 앞의 글, 《아세아연구》 8-2, 1965, 214~216쪽 ; 고영근, 앞의 글, 1978, 152~154쪽 ; 김정대, <외국 학자들의 한글에 대한 평가 연구 - 서구학자들을 중심으로 ->, 《국어학》 43, 2004, 344쪽 참조.

 

51) 로트(1936), p. 2.

52) 로트(1936), pp. 3~4.

 

53) 에카르트(1923), p. 31. 이는 현행 학교 국어문법에서 서술격 조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지정사 혹은 접미사로 분류하는 학자군도 있다. 송창선, 《국어통사론》, 한국문화사, 2010, 13~14쪽 참조.

 

54) 고영근, 앞의 글, 《한국학보》 12, 1978, 152쪽.

55) 송창선, 앞의 책, 한국문화사, 2010, 13쪽.

 

56) 최현배, <朝鮮語의 品詞分類論>, 延禧專門大學校文科論文集 I 《朝鮮語文硏究》, 1930(고영근, <國語文法硏究 一世紀(上)>, 《한국학보》 12, 1978, 152쪽에서 재인용).

 

57) 에카르트(1923), p. 142.

 

58) 에카르트의 중동사에 대해 고영근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동사’를 설정하고 이중언어를 論議한 것은 國語統辭構造에 대한 그의 높은 안목을 엿보게 한다. 중동사란 ‘아프다, 즐겁다’ 등과 같이 心狀과 惑淸을 表示하는 이른바 主性形容詞를 가리킨다. 중동사를 취하면 主語가 第1人稱이 되나 그것이 ‘아/어’를 매개로 하여 ‘하다’를 취하게 되면 目的語의 要求와 함께 다른 인칭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동사’는 자동사와 형용동사의 중간이라고 말한다. ‘형용동사’란 ‘높다, 약하다’ 등의 객관성 形容詞를 가리킨다. 그 중간이 되는 증거로 그는 중동사가 본질적으로 이중성격을 취함을 들고 있다.” 고영근, 위의 글, 《한국학보》 12, 1978, 152쪽.

 

59) 고예진, 앞의 글, 180쪽.

60) 이하 에카르트(1913)로 약칭한다.

6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수도원, 1923년 1~7월’, 《원산교구연대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45쪽.

6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수도원, 1926년 후반기’, 위의 책, 97쪽.

63) “서문 IX”, 에카르트(1923).

64) 정희준, <에카르트와 한글>, 《한글》 59, 1938. 9, 6~7쪽.

 

65) “Eckardt 文法의 最大缺陷은 動詞語幹의 變異規則을 17가지로 잡은 데 있다. 그는 語幹의 자동적 교체도 비자동적 교체와 같이 다루고 있다. 또 變則活用에 의해 만들어진 語幹을 단축된 語幹으로, 媒介母音 ‘으’를 語幹에 所屬시켜 확대된 語幹으로 각각 부르고 있다. 이러한 처리는 분명히 國語의 구조를 왜곡시킨 것이다. 그것은 國語의 성질을 복잡화시킨다는 비난도 있었고(小會進平, 1964), 西洋人에게 한국어를 어렵게 보이도록 했다는 此判도 있다(Vos, 1963).” 고영근, 앞의 글, 《한국학보》 12, 1978, 152쪽.

 

66) Andreas Eckardt, Der Ursprung der koreanischen Schrift, Deutsche Gesellschaft fur Natur und Volkerkunde Ostasiens, Teil C, Bd. 22, Tokyo/Leipzig, 1928.

 

67) P.F.X. Biallas, “Der Ursprung der koreanisehen Schrift”, Anthropos, Bd. 25, H. 3./4., May~Aug, 1930, p. 736.

 

68) H.H. Underwood, “한국에 관한 서양문학의 서지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XX, Seoul, 1931, p. 169 ; P. Andreas Eckardt, “Koreanische Sprichwortes”, Geist des Ostens Vol. 1, 1913, pp. 757~759 ; - - - - -, “192.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Heidelberg (L.), 1923, p. 422 ; - - - - -, “193. Schlussel zur Koreanischen Grammatik”, Heidelberg (L.), 1923, p. 204. 이 외에도 언더우드 서지의 색인표에 나타나는 에카르트의 저작 일련번호는 다음과 같다. Eckardt, P. Andreas - 169, 192, 193, 251, 379, 383, 884, 1509, 1510, 1557, 1570, 1585, 2398, 2436, 2437, 2504, 2505, 2511, 2512.

 

69)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덕원수도원, 1936년 후반기’, 앞의 책, 333~334쪽. 번역 부분 수정.

70) “Einleitung”, 로머(1927).

71) 요한네스 마르, 왜관수도원 편역,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327~329쪽 참조.

 

72) 에카르트의 독일 귀환 시점은 1928년 7월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덕원 수도원 1928년 7월 1일~1929년 1월 31일’, 앞의 책, 122쪽.

 

73) 이만열, 《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167쪽.

 

74) 《한불?뎐》(韓佛字典)의 종교 용어에 관한 분석은 조현범, <선교와 번역 : 한불자전과 19세기 조선의 종교용어들>, 《교회사연구》 36, 2011 ; 이은령, <한불자전에서 종교 관련 번역어휘의 해석과 의미>, 《프랑스문화연구》 26, 2013 참조.

 

7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덕원수도원, 1931년 1~6월’, 앞의 책, 180쪽.

 

76) Lucius Roth, Han-Moun 漢文 Hilfsbuch zur Gramwatik der Koreanischen Sprache, Tokwon : Abtei St. Benedikt, 1937(600부) ; Adelhard Kaspar · Placidus Berger, “Die Veroffentlichungen der Benediktinermissionare in Tokwon und Yenki”, HWAN GAB :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Mandschurei, Munsterschwarzsch, 1973, p. 127.

 

77) Adelhard Kaspar · Placidus Berger, “Die Veroffentlichungen der Benediktinermissionare in Tokwon und Yenki”, HWAN GAB :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Mandschurei, Munsterschwarzsch, 1973, pp. 128~129.

 

78) 요한네스 마르, 앞의 책, 187쪽.

79) 요한네스 마르, 위의 책, 349쪽.

80) 옥낙안, 이기숙 역, 앞의 책, 76쪽.

81) P. Andreas, MBO 11, Aus Korea, 1910, S. 30-40.

82) “13. Lektion”, 에카르트(1923), pp. 113~118.

 

83) “10. Lektion Verbal und Relativ Partizip” · “11. Lektion Der An hluß an der Ehrendeformen(시)” · “20. Lektion Zwischenformen fur Aussage” · “Frage und Befehl”, 로머(1927) ; “10. Lektion Ehrende Form mit(시)” · “17. Lektion Ehrende Zeitworter und Hauptworter” · “20. Lektion Zwischenformen”, 로트(1936).

 

84) P. Honorat Millemann, “Was ein Koreaner-Missionar lernen Muß”, MBO, 1942, S. 57-58.

85) 옥낙안, 이기숙 역, 앞의 책, 76~77쪽.

86) P. Honorat Millemann, “Was ein Koreaner-Missionar lernen Muß”, MBO, 1942, S. 57-58.

87) 노르베르트 베버, 박일영 · 장정란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분도출판사, 2009, 155쪽.

88) Dr. P. Thomas Ohm, “Koreanische Geschichte 2”, MBO, 1930, S. 133-136.

89) P. Honorat Millemann, “Was ein Koreaner-Missionar lernen Muß”, MBO, 1942, S. 57-58. 

 

[교회사 연구 제47집, 2015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보영(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전임연구원)]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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