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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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타마르, 슬기로우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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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07 ㅣ No.751

[레지오 영성] 타마르, 슬기로우신 어머니

 

 

하와는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에서, 또 그것을 먹어서 배부르게 됨을 통해서,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보다 더 높아짐을 통해 행복해지려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모든 후손에게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행복을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에 두셨습니다. 남자를 통한 자연적 임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세상에서는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커다란 범죄행위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세상에서의 정숙한 여인이 되기보다는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심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참 행복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움이고 슬기로움입니다. 성모 호칭 기도에 “슬기로우신 어머니”가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모 마리아와 같은 지혜를 지녔던 사도가 있었습니다. ‘마태오’입니다. 마태오는 구원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씨를 받음에서 옴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씨란 성령을 의미하고 성령으로 하느님을 잉태하는 것만이 참 행복이요 구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족보는 거룩한 씨의 흐름입니다. 그 안에 끼일 수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족보에서 성모 마리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보통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마태 1,2)라는 식입니다. 이스라엘의 족보에서 자녀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낳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오는 유독 그리스도만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은연중에 성모 마리아께서 인간의 씨가 아닌 하느님의 씨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태오는 구원의 족보에 성모님만이 아닌 구약의 다른 지혜로운 네 여인을 소개합니다. ‘타마르,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모두 구원의 씨가 흐르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끼일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하느님의 씨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줄 알았던 지혜를 지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받은 ‘타마르’

 

성모님의 지혜를 지닌 네 구약의 여인 중, 오늘은 ‘타마르’에 대해서만 묵상해 보겠습니다(창세 38장 참조).

 

타마르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는데 에르와 오난과 셀라입니다.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타마르라는 여인을 아내로 얻어줍니다. 하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에르가 악하여 주님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당시 형이 죽으면 그 아내를 동생이 책임져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난은 자신의 재산이 형의 자손에게 가게 될 것 같아서 씨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오난도 악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도 죽이십니다. 그러자 유다는 막내 셀라마저 죽게 될까 봐 며느리 타마르를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셀라가 다 크면 부르겠다고는 했지만, 실상 그녀를 부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제 타마르에게 다윗 가문 혈통의 자손을 낳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타마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아버지의 아내가 죽자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직접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씨를 받습니다. 타마르는 본래 염소 한 마리의 값을 받아야 하지만 그 담보로 시아버지의 ‘인장과 줄, 지팡이’를 받습니다.

 

이 담보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보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2)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곧 인장입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잉태되는데, 이는 인장을 내어주고 염소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속죄를 위해 사용되는 염소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렇듯 타마르는 야곱 가문의 씨를 받기 위해 세상에서는 창녀가 된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성령으로 잉태하여 자칫 불결한 여인으로 세상에서 단죄받을 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유다에게 “그대의 며느리 타마르가 창녀 노릇을 했다네.”(창세 38,24)라는 말을 합니다. 유다도 처음엔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 짓을 한 것에 분개하지만 결국 자신 가문의 씨를 원했던 타마르를 칭찬합니다. 유다는 말합니다.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세 38,26)

 

타마르는 야곱의 며느리에서 이제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족보에 속하게 됩니다. 이는 타마르가 세상에서는 창녀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야곱 집안에 흐르는 씨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씨란 바로 성모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에게서 흐르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씨가 흐르는 교회에 머물 수밖에 없어

 

배우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전쟁 난민을 위한 봉사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다 쓰러져가는 움막으로 들어갔을 때 흑인 여성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몸을 눌러보니 누르는 자리마다 역겨운 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기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김혜자 씨와 의사는 몇 시간에 걸쳐 소독약으로 그녀의 몸을 닦고 고름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다 마쳤을 때 30대 중반의 그녀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치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신창이인 몸을 닦아주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처음의 괴로웠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빛이 나는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김혜자 씨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행복해요.”<출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더숲>

 

우리도 온몸이 고름 덩어리가 되었고 숨이 곧 멎을 상태에서 사랑 한 번 받아보는 것만을 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타마르나 성모 마리아처럼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참 행복으로 바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아담과 하와처럼 세상 행복을 찾습니다.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지혜를 배운 우리는 하느님의 씨가 흐르는 교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용기가 성모 마리아의 지혜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6월호, 전삼용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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