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유딧, 다윗의 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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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2 ㅣ No.777

[레지오 영성] 유딧, 다윗의 망대

 

 

현수는 시골에 중풍으로 누워계신 홀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월세를 살며 서울에서 막일로 돈을 버는 청년입니다. 그런데 일하다 그만 손을 다쳐 깁스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나가보았지만, 공사장 감독은 그를 쫓아내다시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에 대낮부터 소주를 한 병 사서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병나발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고급 승용차들이 주차된 아파트 바닥에 빈 병을 집어 던졌습니다. 마침 그때 작은 공이 데구루루 현수의 발 앞으로 굴러왔습니다. 공을 집어 들고 주위를 살피니 한 여자아이가 뛰어왔습니다. 현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수진아, 나 아빠 친군데, 맛있는 거 사줄 게 함께 갈래? 아빠가 너랑 놀아주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네 이름까지 알지.”

 

공에 ‘수진’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수진이는 아무 말 없이 현수를 따라갔습니다. 현수는 지하 셋방으로 수진이를 데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노끈과 테이프를 사러 나갔습니다.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올 거니까 어디 가면 안 돼?”

 

빵과 우유, 과자까지 사서 방으로 돌아왔더니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큰일입니다. 현수는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가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는 약국에서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현수는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말합니다.

 

“아저씨, 팔 아프시잖아요. 저희 아빠도 병원에서 그렇게 붕대를 감고 계셨어요.”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손에는 대일밴드가 들려있었습니다. 그제야 현수는 제정신이 듭니다. 그래서 수진이에게 자신은 아빠 친구가 아니라고 솔직히 말합니다. 수진이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다친 손을 보고 수진이는 아빠 생각이 나서 따라왔던 것입니다.

 

현수는 아이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엄마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혼나는 것까지 보고서 뒤돌아 집으로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고 힘이 나는 것만 같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사랑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란 내용입니다.

 

현수는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교만과 탐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약하디 약한 수진이가 현수의 철옹성 같은 자아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힘은 ‘깨끗함’과 ‘사랑’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여성으로 세상의 교만을 이긴 영웅 ‘유딧’

 

성모 마리아도 수진이처럼 약해 보이지만 교만한 사탄의 머리를 밟는 놀라운 여인이십니다. 이런 분이시기에 성모님은 호칭기도에 “다윗의 망대”로 나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에 견고하고 높은 망대를 쌓았습니다. 견고한 요새나 망대가 있는 성은 공략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굳건한 망대를 세우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십니다.

 

여성으로서 구약에도 ‘다윗의 망대’와 같이 세상의 교만을 이긴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유딧’입니다. 이 때문에 유딧도 성모 마리아의 전형으로 여겨집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4, 489항 참조).

 

홀로페르네스는 아시리아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다음 가는 장군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에게 보병 십이만과 만 이천 명의 기병을 주며 모든 민족이 자신을 섬기도록 합니다. 당시 어떤 누구도 감히 아시리아 군대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모든 나라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종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작고 약한 나라인 유다 민속만이 아시리아에 항전을 결의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파견된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유다인의 도시 배툴리아를 포위하고 그 속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끊습니다. 이렇게 쉽게 유다 족속을 이길 줄 알았습니다. 34일이 지난 뒤 마실 물이 다 떨어진 배툴리아 시민들은 분노합니다. 시민들은 지도자 우찌야에게 홀로페르네스에게 항복하고 네부카드네자르의 종이 되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찌야는 5일만 더 참아보고 그래도 별수가 없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유딧’이 나섭니다. 유딧은 남편의 사망으로 세 해 넉 달 동안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르고 단식하며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세 해 넉 달은 40개월입니다. 유딧은 닷새 동안 하느님의 응답이 없으면 항복하겠다는 말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닷 세 안에, 그러니까 홀로페르네스가 자신들을 포위한 지 40일 안에 그들을 무찌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딧은 과부의 옷을 벗고 어여쁘게 단장합니다. 그녀는 절세미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여 하녀와 함께 성문 밖으로 나갑니다. 유딧은 아시리아 군인들에게 자신들만 홀로페르네스의 종이 되기 위해 몰래 성에서 빠져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길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새벽에는 하녀와 함께 기도하러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며칠 뒤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에게 음탕한 마음을 품고 술잔치를 벌입니다. 유딧의 미모에 정신을 온통 빼앗긴 홀로페르네스는 생전 처음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고꾸라져 잠이 듭니다. 유딧은 단둘이 남았을 때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넣고 하녀와 함께 기도하러 나가는 척하며 다시 배툴리아 성으로 돌아옵니다.

 

배툴리아 시민들은 그 머리가 홀로페르네스임을 확인하고는 용기를 얻어 아시리아 군대를 치러 내려갑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홀로페르네스가 머리가 잘린 채 있는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합니다. 아시리아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유다의 한 여인에 의해 목이 잘린 것입니다. 그들은 달아나기 바쁩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들을 뒤쫓으며 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차지합니다. 유딧이 그들의 교만을 꺾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위대한 망대인 성모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힘 얻어

 

교회는 마치 배툴리아 사람들처럼 세상의 힘에 짓눌립니다. 그런데 세상을 이기는 힘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작고 보잘것없는 여인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워놓으신 위대한 망대인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라면 악과의 전쟁에서 기필코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겸손과 깨끗함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여인 앞에서 남자의 교만은 무너집니다.

 

수진이가 깨끗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았다면 현수 안에 세워진 교만의 망대를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무너뜨리려면 먼저 성모 마리아를 이겨야 하는데, 그분 안에는 그들이 원하는 교만이나 욕심이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종’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순결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여 주님께 봉헌하는 과정이 성경에서는 숫자 ‘40’으로 표현됩니다. 유딧이 남편을 애도한 40개월과 물 없이 지내야 했던 40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40년 생활과 예수님께서 삼구(三仇)와 싸우셨던 40일의 광야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40의 수련으로 주님의 종이 되시고 세상 교만을 이기는 ‘다윗의 망대’가 되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세상 탐욕과 교만을 이기는 참 교회의 군사들이 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1월호, 전삼용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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