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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자들의 증언 속에 드러나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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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1 ㅣ No.1472

[보고서] 신자들의 증언 속에 드러나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활동1)

 

 

2021년은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서 짧은 삶 속에서도 한국천주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특집으로 신자들의 증언록에서 드러나는 신부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해 보았다.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이하 ‘시복재판록’으로 줄임)2)에는 병오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에 대해 여러 신자들이 진술한 증언이 나온다. 이 내용은 2011~2012년에 걸쳐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대조 · 역주 편찬한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3)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97년에 펴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제3장 시복 재판의 증언 기록(208~239쪽)에도 신자들이 진술한 내용[주제별로 편집됨]이 나오지만, 한글고어로 된 원본인 ‘시복재판록’을 저본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뮈텔 주교가 시복 수속을 위해 ‘시복재판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바티칸 문서』)을 재편집한 『79위 시복 조사 증거서』(『103위 시복시성자료』 Ⅱ에 해당)를 다시 한글로 번역해 놓았다. 또한 ‘시복재판록’에는 김대건 신부에 대해 진술한 신자가 전체 증언자 42명 중 32명이 확인되는데,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에는 16명만 나와 있다. 한글고어 원본을 바탕으로 시복 재판의 증언 기록을 수정 · 증보해야 할 것이다.4)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차기진이 발표한 주제도 이 보고서와 동일하다.5) 관련 내용을 함께 검토하면 좋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부모와 고향

 

시복재판 51회차 증인 함 막달레나는 “내력은 자세히 모르오나 말 들은즉 충청도 교우 자손”이라고 진술했다. 95회차 증인 서 야고보도 “본디 충청도 사람”이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70회차 증인 오 바실리오는 “본래 충청도 내포(內浦) 사람”, 102회차 증인 이 마리아도 “본디 내포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더 나아가 81회차 증인 김 프란치스코는 “본래 충청도 내포 사람이라. 부친은 기해년(1839)에 치명한 김(제준) 이냐시오”라고 했으며,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도 “내포 사람이온데 기해년에 치명한 (김제준) 이냐시오의 아들”이라고 진술했다. 즉 김대건 신부가 충청도 내포 출신으로 김제준의 아들이라는 것이 신자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용인 지역에서 사목 활동할 때 나온다.[68회차 임 루치아의 증언. ‘은이 상뜸이 모친댁’ 모친 이름은 나오지 않음]

 

김대건 신부의 고향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한 신자도 있는데, 97회차 증인 이 베드로는 “본래 충청도 면천(沔川) 사람이온데 태중교우”라고 했다. 충청남도 아산만 일대와 서해안 지역을 아우르는 내포 중에서도 면천[현재 당진군에 속함]이 김 신부의 고향이고 부모가 모두 신자라는 것이다. 모방 신부의 서한에 첨부된 신학생 서약서(1836.12.2)에서 언급되는 김대건의 고향 ‘면천 솔뫼(Mintsiensolmay)’와 가장 비슷한 증언이기도 하다.

 

 

김대건의 신학생 선발과 중국[마카오] 유학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서 그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간 사실에 대해서는 증언 기록이 많지 않다. 신학생 파견 자체가 선교사제와 일부 신자들이 은밀히 주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학 장소에 대해서도 막연히 타국(他國)으로만 알고 있는 신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김대건 신부의 유학에 대해 진술한 12명의 신자 중 절반만이 중국(中國)으로 유학 갔다고 증언했다.

 

김대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증언은 신학생 선발과 연결되어서 확인된다. 시복재판 81회차 증인 김 프란치스코와 95회차 증인 서 야고보, 97회차 증인 이 베드로,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 102회차 증인 이 마리아는 김대건이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신학생으로 뽑혔다고 증언했다.

 

조선천주교회의 파발꾼으로 변문과 북경을 왕래했던 김 프란치스코는 1836년 ‘노(盧)’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학동(學童, 신학생)을 뽑아 유방제(劉方濟, 본명 余恒德)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이 보냈다고 좀 더 상세하게 증언했다. 증언자 이 베드로와 최 베드로, 이 마리아도 모방 신부가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뽑았다고 진술했다. 최양업 신부의 제수인 이 마리아는 모방 신부가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 토마스도 신학생으로 뽑아 타국으로 보냈다고 진술에 덧붙였다.

 

 

김대건 신학생의 조선 입국 시도 (1842년 12월 말~1843년 1월 초)

 

시복재판에 나온 증인들은 대부분 김대건의 신학생 선발과 유학에 대해 언급한 다음 바로 그가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사정을 진술했는데, 파발꾼 김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신부의 동생인 최 베드로[최선정] 두 사람만은 김대건이 혼자서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한 사실을 증언했다.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신이 연행사의 일행으로 변문에 다다랐을 때 김대건과 만났다. 당시 김대건은 같이 조선으로 나가기를 간청했지만, 영접 준비도 없고 위험했기 때문에 김 프란치스코는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에 김대건이 혼자 의주까지 왔다가 잡힌 뻔하고 도로 요동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김대건 신부의 1843년 1월 15일자 서한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다만 1884년 당시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는 몇 가지 사실과 다른 점이 확인된다. 김 프란치스코는 계묘년(1843) 동지달[음력 11월]에 김대건을 만났고 당시 김대건이 부제였다고 했지만, 둘이 만난 것은 1842년 말이고 당시 김대건은 신학생 신분이었다. 대략 4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김 프란치스코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이 단독으로 의주로 들어왔다가 되돌아간 시기는 1843년 1월이고, 최양업과 같이 부제 서품을 받은 것은 1844년 12월이다.

 

최 베드로의 증언도 이와 비슷한데 김 프란치스코의 반대에 부딪히자 김대건이 혼자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와서 숯막에 자러 들어갔는데 순찰하는 포교에게 잡힐 뻔한 것을 모면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다. 다른 이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부제, 유학길을 떠난 지 9년 만에 조국에 돌아오다 (1845년 1월)

 

1836년 12월, 사제가 되기 위해 유학길을 떠났던 김대건은 만 8년, 햇수로는 9년 만인 1845년 1월에 그리운 조국 땅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관련되어 자세히 증언을 한 사람은 김대건의 입국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김 프란치스코였고, 최양업 신부의 동생이자 현석문의 대자였던 최 베드로[최선정]도 관련 내용을 증언했다.

 

시복재판 81회차 증인 김 프란치스코는 1842년 말 연행사의 일행으로 변문을 지나갈 때 김대건 신학생과 만났고,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도중인 1843년 3월[양력]에 변문에서 김대건과 만나 그해 8월[양력 9월]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약속대로 8월에 변문에서 김대건을 만난 김 프란치스코는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기로 했으며 1844년 12월에 현석문, 이재의 등과 함께 변문으로 갔다. 이때 김대건 부제와 함께 페레올 주교도 왔지만,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주교는 들어오지 못하고 김대건 부제만 김 프란치스코 일행을 따라 의주를 통과하여 무사히 서울에 들어왔다.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에 의하면, 이재의, 현석문, 한 베드로 등이 김대건 부제를 모시고 서울로 들어왔다고 했다.

 

 

김대건이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에 들어오다 (1845년 10월 12일)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부제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를 조선에 입국시키는 것이었다. 바닷길을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지시를 받은 김대건 부제는 수개월간 준비를 한 후 조선 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상해에 도착했다. 연락이 닿은 페레올 주교는 새로운 조선 선교사제인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로 왔고, 1845년 8월 17일 김가항성당에서 김대건에게 사제 서품을 했다. 이후 8월 31일 김대건 신부 일행은 타고 왔던 배[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했고, 이번에도 풍랑을 만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0월 12일 강경에 도착했다. 1839년(기해) 이래 선교사제가 없었던 조선천주교회는 프랑스인 대목구장과 선교사제, 본방인 사제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 자세히 나오지만, 시복재판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72회차 증인 김성서 요아킴과 102회차 증인 이 마리아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 신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가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김 프란치스코와 최 베드로의 증언에 나온다.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건 부제가 입국한 후 3~4개월간 서울 돌우물골[현재 서울 중구 산림동 일대]에서 지내다가 배를 장만하여 조선 신자들과 함께 상해(上海)로 갔으며, 거기서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 ‘강경이’에 도착했다. 최 베드로의 증언에서는, 김대건 부제가 선교사제를 모실 준비를 한 다음 현석문, 이재의, 최형 등 신자 11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상해로 갔으며 거기서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 ‘강경이 황산 동네[현재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도착했다고 나온다.

 

최 베드로의 증언은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비해 상해 여정에 참여한 신자들의 숫자와 이름, 조선에 돌아올 때 최종 도착지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상해 여정에 참여했던 현석문이 최 베드로의 대부였기 때문에 관련 사실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 서울과 용인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1845년 11월경~1846년 4월)

 

1845년 10월 12일 강경을 통해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지방에서 조선말과 조선 풍습을 배웠고, 김대건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신자들과 함께 중국에 남아 있는 선교사제[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입국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사목활동[성사 집전]에 나섰다. 당시 선교사제들의 조선 입국 시도[훈춘-경원 경로]는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1845년 12월경 페레올 주교가 서울로 올라온 후 김대건 신부는 지방까지 사목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는데 용인과 그 인근 지역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것이 증언록에서 확인된다. 81회차 증인 김 프란치스코는 김 신부가 ‘서울도 전교하시고 용인 지방과 근처에도 성사를’ 주었다고 했다.

 

72회차 증인 김성서 요아킴과 97회차 증인 이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동안’ 전교했다고 증언했고, 95회차 증인 서 야고보는 ‘이태[2년] 동안’,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는 ‘2~3년이나’ 전교했다고 했다. 김대건 신부는 실제로는 5~6개월 정도 사목활동을 했는데 신자들은 ‘1년’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햇수로 1845년(기사)~1846년(병오)에 걸쳐 있으므로 2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회차 증인 김 막달레나와 27회차 증인 김 막달레나, 35회차 증인 변 아나스타시아, 45회차 증인 정 아가타, 56회차 증인 남 데레사, 59회차 증인 한 바울라, 62회차 증인 김 도로테아, 97회차 증인 이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그 장소를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증인들 이 밝힌 자신의 고향이나 거주지들을 살펴보면 김 막달레나에서 한 바울라까지의 증인들은 서울에서, 김 도로테아와 이 베드로는 용인이나 그 인근 지역에서 성사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김 도로테아는 1846년 여름 당시 용인 굴암 회가마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에 거주했다고 증언했다.

 

51회차 증인 함 막달레나는 1845년 가을에 서빙고[현재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54회차 증인 유 바르바라는 무쇠막[현재 서울 마포구 신수동 지역] 심 주부의 집에서 성사를 받았다고 했다. 91회차 증인 박 가이아나는 남대문 밖 쪽우물골[현재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나 베드로의 집에서 김 신부를 보았다고 했다. 93회차 증인 원 마리아는 미나리골[현재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지역] 공소 김 회장 집에서 세례와 견진성사까지 받았다고 했다.

 

66회차 증인 정 바르바라는 양지 정쇠[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정수리]에 살 때 첫 성사를 양지 음달안이[응다라니. 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받았다고 했다. 68회 차 증인 임 루치아는 첫성사를 김 신부에게 양지 터골[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에서 받았고, 1846년에 김 신부가 은이 상뜸이[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추정] 모친댁에 있었다고 했다. 70회차 증인 오 바실리오는 양지 은이에서 김 신부를 보았다고 했다.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는 용인 공소에서 성사를 받았다고 했는데, 용인 공소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62회차 증인 김 도로테아가 살았던 용인 굴암일 가능성이 있다. 102회차 증인 이 마리아도 김 신부가 용인 지방에서 전교할 때 한 번 보고 성사를 받았다고 했으며, 그 이듬해 부활대축일[4월 12일]에 양지 본댁에서 다시 보았다고 했다. 여기서 ‘양지 본댁’은 김 신부의 모친이 살던 ‘은이 상뜸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가 모친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가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은 1842년 말 파발꾼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때 부친인 김제준(이냐시오)은 순교했지만 모친 고 우르술라는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월 부제로 귀국했을 때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제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 모친을 찾아갈 수 없었다. 1845년 10월 신부로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도 바로 모친을 만난 게 아니라 그해 연말이나 다음 해인 1846년 초 사목 활동을 위해 용인 지역으로 내려갔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신학생 선발 이후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증인 임 루치아는 1846년에 김대건 신부가 은이 상뜸이 모친댁에 있었다고 했고, 증인 이 마리아는 1846년 부활대축일에 양지 본댁에서 김 신부를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들의 만남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46년 봄 다시 김 신부는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임 루치아의 증언에 의하면 김 신부의 모친이 ‘부활대축일까지 기다리기를 청하여’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그 다음날[4월 13일]에 올라갔다고 했다. 이후 김 신부는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모친과는 지상에서 이별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황해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다 (1845년 6월)

 

용인에서의 짧은 사목활동을 마치고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 13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5월 김 신부는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황해도의 연평도와 순위도, 백령도를 탐방했다.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서한과 지도를 건네주면서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6월 서울로 귀환하려고 했는데 순위도에서 군사들에게 붙잡혔고, 황해도의 감영이 있는 해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김 신부 체포 이후 중국 어선에 넘겨주었던 서한과 지도는 군사들이 쫓아가 압수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어 압송된 사정에 대해서는 시복재판에 나온 증인들이 많은 진술을 했다. 그중 김 신부와 같이 체포되었던 선장 임성실 베드로[1880년 사망]의 가족과 지인, 같이 배를 타고 서해로 갔던 신자들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증언했다.

 

임성실 베드로의 누이동생인 임 안나[67회차 증인]와 처제인 이 데레사[61회차]는 김대건 신부 체포 사정을 임성실에게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임성실의 외종사촌인 김 마리아[89회차]와 사돈 관계인 원 마리아[93회차], 지인 박 가이아나[91회차]는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임성실에게 직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서해 탐사에 참여했던 김성서 요아킴[72회차]과 박성철 베드로[84회차]는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증언했다. 김성서의 아내인 함 막달레나[51회차]도 증인으로 나왔는데 남편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진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성실의 지인인 박순집 베드로는 임성실과 김성서 등 김 신부 일행에게서 당시 체포 상황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김 프란치스코[81회차]도 김 신부 배에 탔던 사공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진술했다. 누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서 야고보[95회차], 이 베드로[97회차], 최 베드로[100회차], 이 마리아[102회차]도 김대건 신부 체포 사정을 진술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배를 타고 시골[황해도]로 내려갔다가 군사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내용은 앞서 언급한 증인들의 진술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김 신부 일행이 황해도로 간 목적에 대해서는 선교사제 영입을 위한 경로 탐색이었다는 증언[51회차 함 막달레나], 서양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증언[81회차 김 프란치스코, 100회차 최 베드로], 이 두 목적을 모두 진술한 증언[72회차 김성서], 서양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증언[95회차 서 야고보]이 확인된다. 당시 탐사 여행에 참여했던 김성서의 증언이 사실에 가장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의 배가 서울로 돌아가기 전 정박했던 곳[순위도]에서 배잡이령이 내려져 민간 어선이 징발될 때 김 신부가 이를 거부하자 군사들이 배에 올라탔다. 배에서 실랑이를 하던 와중에 군사들이 김 신부를 ‘타국 사람’[밀입국자]으로 알고 체포했다고 대부분 증인들이 진술했다.[51회차 함 막달레나, 81회차 김 프란치스코, 84회차 박성철 베드로, 86회차 박순집 베드로, 89회차 김 마리아, 100회차 최 베드로] 시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성교(聖敎, 천주교) 봉행하는’ 사실이 드러나 잡혀갔다는 진술도 있다.[95회차 서 야고보] 그중 최 베드로는 실랑이 중에 김 신부의 상투가 군사들에게 잡히면서 머리카락이 풀어지자 타국 사람임이 드러났다고 증언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김 신부의 말이 서툴러서 군사들이 타국 사람으로 알고 잡아갔다고 진술했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일행이었던 김성서[72회차]와 박성철[84회차]은 김 신부를 포함해 8명이 배에 탔었고, 김 신부와 임성실[관찬 기록에는 ‘임성룡’], 사공 엄 서방[관찬 기록에는 ‘엄수’] 등이 체포될 때 둘이서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김성서는 배잡이령이 내려졌을 때 김 신부가 “호령하시어 (배잡이령을 내린 무관인) 첨사(僉事)더러 ‘너’라 하거늘 첨사가 노하여 관차(官差, 관아의 아전)를 보내어 배 임자와 사공을 잡으라” 했다고 진술했다. 이 내용은 “한 명이 배 위로 뛰어올라와 서울 양반이라고 하여 진장(鎭將)[첨사]를 공갈하면서 ‘너’라고 욕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 모양을 보니 아주 수상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과는 현저히 달라서” 체포했다는 황해도 감사의 보고[『일성록』 1846년 5월 20일(음력) 기록]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붙잡힌 김 신부 일행은 황해도 감영이 있는 해주로 이송되었다가 감사의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때 신부와 신자들이 칼[목에 채우는 형틀]과 몽두(蒙頭, 중죄인의 얼굴을 가리는 보자기)를 썼다는 증언[72회차 김성서]이 있다.

 

 

김대건 신부, 서울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다 (1846년 6~9월)

 

체포된 후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을 거쳐 서울로 이송되었고, 포도청에서 40여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을 목격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웠고, 시복재판에 나온 증인들도 대부분 구체적인 질문과 답변을 진술하지는 못했다. 대신 몇몇 증인들은 전반적인 심문의 분위기라든가 옥중 상황, 일부 심문 내용을 진술하기도 했다.

 

김 마리아[89회차 증인]는 김 신부가 포도청에 갇혔을 때 신발이 없자 자신의 조부가 짚신을 삼아 드렸다고 진술했다. 김 마리아의 조부는 관찬 자료에 나오는 김중수(金重秀, 78세)와 동일 인물로 보이며, 서빙고에 살다가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 붙잡혀 함께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아마 포도청으로 이송될 때 김 신부가 신발을 잃어버리자 김중수가 짚신을 삼아서 준 것으로 보인다.

 

한 바울라[59회차]는 김대건 신부가 포도청 옥에 갇혔을 때 ‘성교(聖敎, 천주교)의 말’[교리]로 권화(勸化)하자 비신자들[관장과 포졸]이 옳다 하면서 김 신부를 죽이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고 진술했다. 이 내용은 김성서 요아킴[72회차]의 증언에도 확인된다. 박 가이아나[91회차]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진술했는데, 포도대장이 김 신부에게 호의를 베풀어 대청마루에 올라와 책을 읽게 하고 교리를 강론하게 했으며, 심지어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했다. 최 베드로[100회차]는 김 신부를 아낀 포도대장의 이름이 이응식[관찬 사료에 ‘李應植’이 확인됨]이며 조선 정부 내의 여론도 김 신부를 살려두자는 분위기였다고 진술했다. 

 

구체적인 심문 내용에 대해서, 원 마리아[93회차]는 관장이 김 신부의 재주를 알고자 조선의 팔도지도를 그릴 수 있느냐고 묻자 김 신부가 보천하지도(普天下地圖, 세계지도)도 그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진술했다. 최 베드로[100회차]의 증언에 의하면, 중국으로 보내려다가 압수된 주교의 편지를 포도대장이 내놓으면서 김 신부의 서체와 왜 다르냐고 묻자 김 신부는 자신이 쇠붓[펜]으로 썼기 때문에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슬기롭게 넘어갔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대건 신부의 1846년 8월 26일 자 옥중서한에서도 확인된다.

 

임 루치아[68회차]와 정 바르바라[66회차]는 김 신부가 감옥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냈는데 자신들도 보았다고 했다. 임 루치아는 서한 자체를 외운다고 했고, 정 바르바라는 일부 내용을 증언 장소에서 직접 외우기까지 했다. 김성서[72회차]는 김 신부가 이 편지를 신골[신을 만드는 데 쓰는 표본] 속에 넣어 보냈다고 진술했다. 이 편지는 ‘회유문’으로 알려진 김 신부의 마지막 한글 편지이다. 이 데레사[61회차]는 자기 집에 그 편지 베낀 것이 한 장이 있다면서 시복재판 판사인 뮈텔 신부에게 바쳤다. 이것이 증언 당시[1884년]까지 남아 있던 ‘회유문’의 필사본이었다.

 

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는 심문을 받는 중에도 형벌이 심하지 않았고 그의 재능을 아껴서 살려주려는 분위기가 조선 정부 안에 있었다. 하지만 최 베드로[100회차]의 증언에 의하면, 대신 중 하나가 국법대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김성서[72회차]의 증언에도, 권 정승이 나서서 김 신부를 풀어주면 후환이 될 것이라고 하여 사형 판결로 결정되었다고 나온다. 당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사학(邪學)의 괴수’를 살려두면 계속해서 들어오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사형 판결이 확정된 사실이 관찬 사료[『일성록』 1845년 7월 25일 기사]에서 확인된다.

 

 

김대건 신부, 치명(致命)을 통해 새남터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목숨을 바침[致命]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 신자들은 김 신부가 치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치명 과정은 잘 몰랐던 것 같다. 증언 중에는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김 신부보다 3일 뒤인 9월 19일 새남터에서 치명한 현석문 가롤로가 김 신부와 같은 날 치명했다는 내용을 신자에게 전해 들은 김 베네딕타의 증언[20회차]을 들 수 있다. 이는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 듣는 과정에서 내용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복재판에 나온 증인 중 치명 과정을 직접 목격한 이는 박순집 베드로[86회차]뿐이었다. 사형장인 새남터로 갈 때 길에서 김 신부를 목격한 이는 박순집 외에 변 아나스타시아[35회차]와 박 가이아나[91회차]가 있었지만, 그 두 명은 처형 장면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한편 유 바르바라[38회차]와 함 막달레나[51회차], 김 도로테아[62회차], 최 베드로[100회차], 이 마리아[102회차]는 치명 사정을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진술했다.

 

김대건 신부가 사형장에 갈 때 상투가 풀어진 상태로 보라색 저고리를 입고 들것에 묶여서 갔다는 점은 세 명의 목격자[박순집, 변 아나스타시아, 박 가이아나]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여기에 덧붙여 박 가이아나는 김 신부가 굵은 베로 짠 여름용 홑바지[삼승 고의]를 입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서소문 밖부터 사형장까지 따라갔던 박순집은 도중에 군인 한 사람이 김 신부의 상투를 다시 짜주었다고 진술했다. 또, 박 가이아나는 김 신부가 사형터에 간 날, 즉 치명일이 (음력) 7월 27일이라고 했다. 관찬 기록에 확인되는 치명일인 9월 16일(음력 7월 26일)과는 하루 차이가 나지만, 시복재판 증언 중에서 날짜가 언급된 것은 박 가아이나의 증언이 유일하다.

 

치명 현장에 있었던 박순집은 김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받을 때 매우 기뻐하는 모양이었고 칼을 받을 때 두 번 만에 머리가 베어졌다고 간략히 진술했다. 최 베드로는 전해 들은 내용을 전하면서 김 신부가 사형장에서 군사에게 “내가 천당에 올라가 이렇게 볼 것이니 너희도 성교(聖敎)를 봉행하여 내 뒤를 따르라”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목격자에게 전해 들은 증인들도 대부분 치명 과정을 간략하게 진술했는데, 김 신부의 치명을 목격했던 이들은 용인 굴암에 살던 이 마르코[김 토로테아의 증언], 김 신부의 5촌 김 요한[이 마리아의 증언], 김공숙[김 신부의 5촌]과 김 프란치스코[시복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 프란치스코와 다른 사람][이상 최 베드로의 증언] 등이었다. 이중 김 신부의 5촌 김 요한과 김공숙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전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 신부가 치명했을 때 포도대장과 다른 관장들이 “아까운 양반을 죽이니 원통하다”는 말을 했다고 임 베드로[88회차]가 진술했다. 또한, 김 신부가 치명했을 때 기이한 현상[이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김 가타리나[5회차]는 김 신부가 치명할 때 상서로운 기운[瑞氣]이 새남터의 공중에 무수히 섰다는 말을 비신자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임 루치아[68회차]와 오 바실리오[70회차]는 1846년 음력 8월 (초승) 무렵에 비가 쏟아지고 천둥소리가 요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이 김 신부의 치명일이었다는 내용을 진술했다.

 

두 증인이 언급한 날짜인 음력 8월 초승은 실제로 치명한 음력 7월 26일과는 차이가 있고 모두 전해 들은 소문을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서 젊은 나이에 치명한 김대건 신부를 안타까워했던 신자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 수습과 안장, 미리내로 이장 (1846년 가을)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형장에서 치명한 이후 그 시신은 새남터 모래밭에 묻혔다. 얼마 후 감시가 느슨해지자 신자들은 몰래 새남터로 가서 시신을 수습했고, 미리내[현재 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유해를 안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도 시복재판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증인 중에는 김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직접 참여한 신자도 있었고 참여한 사람의 가족과 지인도 있었다.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김 신부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밭에서 바로 미리내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두 차례 가매장을 거친 다음에 장례 의식을 치르고 현재의 묘소에 안장되었다. 1901년 시복 절차를 위해 김 신부의 유해는 발굴되었지만 묘 자리는 계속 남았고, 현재 ‘김대건 신부 시복기념성당’(1928년 건립)과 새로 단장된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서 야고보[95회차 증인]는 1846년 가을에 그 자신이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 모래밭에 가서 김 신부 시신을 찾아 홑이불에 담아 3마장[약 1,2km] 떨어진 왜서[와서(瓦署). 현재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일대] 건너편에 묻었는데, 다음 날 다른 신자들이 다시 시신을 왜고개[현재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용산동 일대]로 옮겼다고 진술했다. 김 마리아의 증언에 의하면, 박순집 베드로의 부친[박 바오로]과 다른 신자들이 새남터 모래밭에서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았는데 시신의 손에 강아지에게 물린 흉터를 보고 김 신부인지 알았다고 했다. 박순집[86회차]은 그의 부친이 시신 수습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신자들이 시신을 찾아 문배부리[현재 서울 용산구 한강로1동에 속한 문배동 일대]에 가매장했고 박해가 잦아진 후 미리내로 발인해서 장사지냈다고 진술했다. 박 가아아나[91회차]는 한경선과 나창문이 자신의 집에 와 있다가 10월 어느 밤에 나가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 장사지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증언을 종합해 보면, 새남터 모래밭에서 김 신부의 시신을 수습한 신자들은 박순집의 부친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서 야고보 등이며 이들은 모두 서울에 사는 신자들이었다.

 

박순집의 증언대로 1846년 천주교 박해가 잦아들자 신자들은 다시 김 신부의 시신을 발굴하여 미리내로 안장했다. 김성서 요아킴[72회차]은 서울 신자들이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 미리내에 장사지냈다고 진술했다. 유 바르바라[54회차]는 자신의 남편 이 요한과 다른 신자들이 미리내 안장에 참여했으며 남편에게 그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진술했다. 오 바실리오[70회차]는 신치관과 다른 신자들이 미리내 안장에 참여했으며 직접 신치관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임 루치아[68회차]는 그해 가을에 신자들이 시신을 찾아 염하여 겹관[외관과 내관으로 관을 두 개를 씀]에 넣고 미리내 최 회장 공소에 관을 모셨다가 그 근처에 장사지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김 프란치스코[81회차]도 신자들이 시신을 찾아 행상(行喪, 상여를 묘지에 나름)하여 미리내에 묘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증언들로 볼 때 서울 신자들이 적절한 때를 골라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김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에 안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 프란치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고(高, 페레올) 주교의 분묘 곁[옆]’이 된다고 진술했다. 이는 마치 페레올 주교 무덤 옆에 김 신부의 무덤 자리를 쓴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실제로는 1846년 김 신부의 묘소를 만들고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이후 주교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묘소 옆자리에 주교의 묘소를 만든 것이다.

 

 

신자들의 김대건 신부 묘소 순례 (순교자 현양운동의 시작)

 

천주교가 금지되고 탄압받던 시기에 치명한 사제나 신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신자들은 서로 돈을 모으고 힘을 합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안전한 곳인 미리내에 안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스스로 김 신부의 묘소를 찾아가 그의 신앙과 희생을 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김 막달레나[29회차]는 미리내에 있는 김 신부의 묘소에 가 보았다고 진술했으며, 신치관에게 미리내 안장 소식을 들은 오 바실리오[70회차]는 여러 번 미리내를 찾아가 김 신부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러한 신자들의 모습은 ‘순교자 현양운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에 나오는 신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해 보았다. 동료 선교사제의 서한이나 관찬 자료와 함께 신자들의 증언은 김대건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 과정에서 핵심 자료로 활용되었다. 현재에도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기해 · 병오 순교자들과 그 시대의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복재판록’의 분석과 연구가 필수적이다. 교회사의 저변 확대와 연구 심화를 위해 ‘시복재판록’을 비롯한 교회사 자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수원교회사연구소 대조역주,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2, 천주교 수원교구, 2011~201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21. (개정판)

『일성록(日省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이트 ‘원문검색서비스’)

차기진, 「『기해·병오 순교자 교황청 수속록』과 김대건 신부 관련 기록」,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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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소식지인 『상교우서』 71~77호(2021년 4월~10월호)에 연재된 내용을 수정 · 정리한 것이다.

 

2) 기해 · 병오 순교자들의 시복재판(수속)을 위해 시복대상자들과 관련이 있는 신자들을 증인으로 소환하여, 엄격하게 비밀 준수를 선서하게 하고 그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자료이다. 원본은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의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영인본은 2004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상하, 2책)으로 간행되었다.

 

3) 원본 1~5권 중 1~2권은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2011년)에, 3~5권은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2012년)에 실려 있다.

 

4)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2021년에 개정판으로 간행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3집) 제3장 시복 재판의 증언 기록(306~345쪽)에도 위의 주제별 진술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도 한글 고어 원본인 ‘시복재판록’ 대신 『79위 시복 조사 증거서』의 내용을 저본으로 삼았고, 이 프랑스어 저본을 새로 번역하면서 수정·보완한 것이 확인된다.

 

5) 차기진, 「『기해·병오 순교자 교황청 수속록』과 김대건 신부 관련 기록」, 『당신이 천주교인이오?』(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21, 83~104쪽.

 

[학술지 교회사학 제19호,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00945&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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