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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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65: 프란치스코의 오상, 그리스도와 일치 확인시킨 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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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4 ㅣ No.1704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5) 프란치스코의 오상, 그리스도와 일치 확인시킨 표징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것은 프란치스코가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이른 모습을 프란치스코의 육신에 확인시켜 주고 각인시켜 주고자 하신 하느님의 은총이다. 피에트로 로렌제티 ‘오상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16. 프란치스코의 오상과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① 프란치스코의 오상과 그 의미

 

프란치스코는 귀천 2년 전(1224년)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한 부분인 ‘라 베르나’라고 하는 산에서 40일간 단식재를 지키던 어느 날 (십자가 현양 축일 무렵) 십자가에 못 박힌 세라핌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다섯 가지 상처를 받게 된다.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일은 프란치스코가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이른 모습을 프란치스코의 육신에 확인시켜 주고 각인시켜 주고자 하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 안에서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인물이다. 한 종교의 체험에 있어서 신비적 차원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실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도달점으로서의 초월의 세계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체험은 이 세상의 원인, 결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신비적 차원을 띠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한 종교의 신비들이 신비 그 자체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절대 무의미한 종교적 환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모든 신비 체험은 한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을 위한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기에 그것을 단순한 경이와 놀라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거나 그런 신비 체험을 한 한 인물에 국한하여 그 인물을 찬양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사건 역시도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오상은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고, 또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복음적 삶의 이상에 이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삶의 이상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였고, 모든 피조물과의 일치였다. 사실 이 두 목표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창조된 세상과의 일치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복음적 삶의 목표가 아닐까! 이런 문제를 더욱 심오한 차원에서 고찰해 본다면 우리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위되어 가야 할 것인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명백하고 자명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기만 하면 우리는 이미 본향에 있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늘나라의 상속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라서거나 증명해 내려고 기를 쓰거나 자기를 방어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고 삶을 참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모든 종교가 다 조금씩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 가짜 자아는 우리가 “실제로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프란치스코가 1226년 죽음을 맞이하면서 말했듯이, 우리도 진지하게 “죽음 자매여, 어서 오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이 첫 번째 죽음을 현세의 삶에서 (특히 인생의 후반기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참된 현실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찬가’에서 노래하듯이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죽음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현실이 오직 “참으로 복된 삶을 향해 계속해서 문을 열어주고 또 열어주는 참된 희망의 현실”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자아에 대해 죽는 이들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과 일치하기 위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35; 마태 16,24-25; 루카 9,23-24)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살아가는 주님의 참 제자일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의 동일화에 들어선 이들이다.

 

프란치스코의 전기 중 하나인 「잔꽃송이」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기 전 다음과 같은 기도 두 가지를 바쳤다고 한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없는 당신의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소서. 먼저 제가 살아있는 동안 제 영혼과 육신에, 사랑하는 당신 예수님께서 가장 괴로웠던 수난 시간에 견디어 내신 그 고통을 기꺼이 견디어 내실 만큼 불타올랐던 넘치는 사랑을 제 마음에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주소서.”

 

첫 번째 기도는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에서 단식재를 지키는 동안 계속 반복해서 바쳤던 기도이고, 두 번째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던 날 새벽에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바쳤던 기도라고 「잔꽃송이」는 전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14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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