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협ㅣ사목회

미래 교회의 평신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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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9

미래교회의 평신도상

 

 

우리가 흔히 평신도라고 번역하는 교회용어 laikos(평민)는 laos(백성)에서 파생된 말이다. 70인역 구약성서에서는 라오스가 이교도(에트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때로는 제관계급에 대한 일반 백성을 뜻하기도 하였다(이사 24, 2; 예레 34, 19; 에즈 2, 70; 7, 16; 8, 15; 네헤 10, 35). 라이꼬스라는 말은 평민, 서민, 속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공동체를 교회, 백성,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렀고, 이 공동체의 멤버를 불리운 자, 성도, 제자, 형제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대 교회에는 공동체의 건설을 위하여(Ⅰ 고린 12, 7)특별한 은혜, 즉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공동체 안에서 특수한 직무를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도, 예언자, 교사, 목자, 감독, 장로, 집사(로마 12, 6-8; Ⅰ고린 12, 28; 에페 4, 11; Ⅰ디모 3, 1-13; 디도Ⅰ, 5-9; 사도 20, 28) 등의 직책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 지도자에 대하여 일반신자들을 양떼(사도 20, 28; Ⅰ베드 5, 2)라, 혹은 형제라 부르고 있다. 

 

글레멘스 교황의 고린토 서간(95년)에 처음으로 laikos라는 말이 장로나 집사와 구별되는 평신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고, 3세기부터 글레멘스, 떼르뚤리아노, 오리게네스, 치프리아노 등에 의하여 일반화되었다. 그 후 시대에는 평신도를 서민, 속인, 무식인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Ⅰ. 교회사에 나타난 평신도상

 

평신도라는 개념이 성직자, 수도자에 대한 상관개념이기 때문에 전자들과 무관한 평신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간략하게라도 교회사에 나타난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보아야 미래의 평신도상을 窺視할 수 있겠다.

 

1) 박해시대의 교회는 크리스챤 생활을 임박한 종말과 결부시켜 생각하였고 현실적으로 교회의 조직에 크게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기에, 교회와 세상의 대립 상황에 민감하면서도 안으로는 성직자 평신도의 구별에 구애되지 않고 단결하여 박해를 견디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플라토니즘의 영향으로 천상적 이념적인 것을 본체로 보고 지상적, 현실적인 것을 그림자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거룩한 것을 취급하는 성직은 하느님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주교직은 하느님의 대리직이라고 생각하였고(이냐시오, 치프리아노),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론적 구별이 점점 뚜렷해졌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주재하는 주교와, 사도단을 대신하는 장로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직을 맡은 집사들과 함께 모든 일을 화목하게 처리하도록 격려하는 바이다”(이냐시오). “교회는 자기 주교에게 결합된 백성이요, 목자를 따르는 양떼이다. 그러므로 주교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주교 안에 있으며, 주교와 함께 있지 않으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치프리아노). 이러한 교리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합심하여 복음선포에 임하고 있고, 외형상으로 성직자가 평신도에서 두드러지게 구별되지 않는다.

 

2) 콘스탄티노(313) 이후로 교회는 자유를 얻었고, 테오도시오(395) 이후로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로마제국과 공존하면서 여러가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미구에 서로마가 망하고 게르만족들이 침입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교회의 품 안에서 개종하고 개명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은 후부터 박해시대의 평신도들이 하던 교회의 옹호를 정치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게 되었으니, 왕공들이 개종하는대로 평신도로서 국가 사회를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조직하는 신생국가들은 그 모든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이 교회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요구되었으며, 교회의 고유한 업무를 관장하는 성직자들은 사회적으로 특대를 받는 계급이 되어갔다. 4세기부터 성직자의 독신제가 도입되고, 5세기에는 특별한 옷을 입기 시작하고, 5세기말에는 삭발을 하였다. 7세기부터는 일반 신자들이 라틴어를 모르게 되어 전례에서 멀어져갔다. 이 시기에 신자 대중은 무식한 노동력 제공자에 머물렀고, 귀족등 일부 평신도와 성직자들만 다소 교육을 받았으므로 성직자는 유식자요, 유식자는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동로마제국에는 교육받은 평신도들이 많아서 교회와 국가에 활발히 봉사할 수 있었다. 

 

9세기경에는 거의 모든 봉건제후들이 신자가 되었고 서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 이념으로 통일된 거대한 그리스도교 사회를 이루었고, Ecclesia는 본래의 교회와 이 그리스도교 사회를 포함하는 말이 되었다. 정치생활이나 사회생활은 직접으로 교회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조직되었고 교회법의 규제를 받았으니, 마치 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도원이고 평신도들은 그 수도원의 결혼한 수사가 된 느낌이다. 

 

이 그리스도교 사회(Christendom)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성무를 관장하기 때문에 영신적 크리스챤이라 하였고, 평신자들은 세속 사물에 종사하기 때문에 육신적 크리스챤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플라토니즘에 의하여 세계를 대립하는 두개의 세계로 관념하였지만 고대 교회에서처럼 현세와 내세와의 대립이 아니고,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로 대립시켰다. 이 육적인 세계에서 일반 평신도는 노동을 제공하고 기사들은 국가와 교회를 방어하고 군주들은 교회와 국가를 보위하고 확장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좋은 군주들을 가지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귀중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교육에 특히 유의하였고, 군주의 대관식을 성직자의 축성식처럼 하였고, 군주들은 각급 공의회에도 참석하였고, 세력이 커진 군주들은 지방 주교의 임면에까지 간여하였다. 물론 교회에서도 군주의 계승에 깊이 간섭하였다. 군주들은 교회의 발전을 위한 의무(십자군)와 동시에 권리도 가지게 되었으나 그 권리의 남용으로 성직계에도 누를 끼쳤던 것이다.

 

3) 지리적 대발견과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시작되는 근세는 세상이 자기의 고유한 영역과 가치를 발견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중세에서 교회의 목적에 종속되던 여러가지 세속 사물들이 교회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되었다. 먼저 정치가 교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경제 사회조직이 국가 목적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문예와 기술과 학문의 각 분야가 자립하였고, 심지어 자선사업과 윤리체계까지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14세기에는 문예가 성서와 교리를 떠나고, 15세기에는 철학이 신학에서 벗어나고, 16세기에는 개신교가 카톨릭에서 이탈하고, 17세기에는 자연주의가 시작되고, 18세기에는 정치가 교황에게서 완전 독립을 하고, 19세기에는 과학주의, 무신론, 민주주의, 정교분리가 보편화되고, 20세기에는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가 교회의 영향력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반교회적 양상을 띠고 있다. 

 

근세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주로 평신도들이 교육을 통하여 발전시킨 것이었고 세속 사물의 자립추구 과정에서 교권과의 마찰도 있었다(갈릴레오 사건). 그러나 이 세상이 그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시킨 것은 정당한 것이요 세상의 성숙을 뜻하는 것이고, 평신도의 인간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4)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는 세상이 세상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현실을 수긍하게 되었고 이러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일어난 교부학, 성서학, 전례학의 발전에 힘입어 교회의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재검토되었다. 우리 문제에 국한시켜 보면, 성서연구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개념을 재발견하여 평신도의 신원을 재인식하여, 모든 평신도는 세례와 견진으로 축별되어 성직자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라는 동등한 신분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도 교회에 대하여 의무뿐 아니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사명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있어서 초기에는 카톨릭 운동, 또는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이름으로 평신도들을 성직자의 보조원으로 동원하였으나, 점차 평신도의 신원에 관한 인식이 깊어지고 그들의 참여의 경험이 누증됨에 따라, 평신도의 교회참여는 당연한 권리이고 나아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평신도에게 고유한 사도직 분야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나날이 세속화되는 세상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의 터전에서 실생활로써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평신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이렇게 현세 사물의 상대적 자율성과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을 인식한 교회는,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공의회 문헌에 평신도에 관한 교의를 수록하고 선포하였다(교회헌장, 사목헌장, 평신도 교령, 선교교령등등).

 

 

Ⅱ. 평신도의 신원

 

공의회 문헌에 나타난 평신도의 신원에 관하여 기본적인 교의를 생각해본다. 교회헌장(4장) 31조에서 “여기서 말하는 평신도는 신품과 교회에서 인정된 수도신분에 속하지 아니하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를 말하는 것”이라한다. 이 귀절은 우선 교회의 구성원 중에서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와 수도서원을 발한 수도자에서 평신도를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외적구별은 소극적으로 평신도를 규정하는 말이지만 실용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다. 교회의 외적 구성을 학문적으로 분류하자면, 먼저 모든 신자는 교회 내의 직분상으로 볼 때, 사목자(성직자)와 피사목자(신품받지 않은 모든 신자)로 구분되고, 생활조건과 양식상으로는 수도자(수사?수녀)와 재속인(재속사제, 평신도)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헌장은 통속적인 관찰대로 성직자, 수도자를 제외한 일반 신자들을 평신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평신도는 누구가 아니라는 지적이지 누구라는 지적은 아니다. 

 

헌장은 다음 귀절에서 평신도의 신원을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세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 백성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실 평신도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고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지만 평신도가 평신도이기 전에 먼저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가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구세사명에 참여하여 교회의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평신도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든 신자들처럼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본 신분에 있어서나, 보편적 법률인 사랑의 실천 의무에 있어서나,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목표에 있어서나 완전히 동등한 능동적 구성원이다(교회헌장 9 참조). 또 그는 구원의 제도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의 구원사명을 세상 안에서 수행하는 능동적 구성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금구는 “우리는 다함께 거룩한 신비의 혜택을 받게 되어 있으므로 사제와 일반 신자의 차이는 없다”고 하였고, 아우구스띠노는 “당신들을 위하여 나는 주교요, 당신들과 함께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였다(Serm, 340, 1: PL38, 1483). 

 

이렇게 평신도의 존재론적 신원을 제시하고서, 헌장은 평신도의 기능적 특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세속적 성격은 평신도의 고유한 특성이다??? 평신도의 고유한 소명은 현세적 사물을 취급하면서 그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속적’이라는 것은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현세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saecularis=temporalis). 

 

모든 신자는 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지만 성직자는 주로 사제적 사목을 통하여 추구하고, 수도자는 충실한 서원생활로 추구하고, 평신도는 주로 일반사람들이 취급하는 세상일들, 즉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특성인 세속성, 혹 在俗性은 그가 단순히 세속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계를 가진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속 가운데서 세속 생활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미신자와 구별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평신도의 그리스도교적 관계에 대하여 헌장은 두가지 면을 지적하고 있다. 그 하나는, 평신도가 세속생활을 영위하면서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실천을 통하여 성화되어 그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증거하고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함으로써 세상을 성화하는 누룩이 될 것이다. 그 둘째는, 복음정신에 입각한 평신도의 활동으로써 현세의 사물들이 창조주께서 설정하신 본래의 질서에 의하여 가치를 발휘하도록 하여 모든 자연 피조물과 인간의 업적 안에서 하느님의 외적 영광이 현양되도록 하는 것이다. 

 

때로는 성직자나 수도자도 복음선포를 위하여 세속적인 사물에 직접 관련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이거나 보조수단일 수밖에 없다. 만일 어떤 성직자나 수도자가 자기 존재나 활동의 항구적인 목표나 수단으로 세속적 사물에 몰두한다면 그는 이미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신도도 때로는 영성적 교회적 사업에 관여할 수 있지만 성직자적 방법이나 수도자적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에게 고유한 방법으로 관여하는 것이며, 원칙적으로 평신도의 본래의 임무는 세속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특별한 사명은 평신도를 통해서만 교회가 소금이 될 수 있는 그 장소와 환경 속에 교회를 현존케 하고 활동케 하는 것이다” (교회헌장 33). 세상일의 많은 분야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원격작용 밖에 할 수 없는 분야이다. 그런 분야에 대하여 성직자들은 직접 개입하기보다 자격있는 평신도를 양성하고 격려하여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작용한다. 가정생활 직업생활을 위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현세적 인간활동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평신도는 몸소 직접 참여하여 복음과 교회를 현존케 할 수 있지만, 성직자 수도자들은 예외적으로만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헌장은 평신도 중에 필요한 여건을 갖춘 사람은 보다 직접적으로 성직계의 사도직을 돕기 위하여 불릴 수 있고, 영적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직무를 성직계로부터 위임받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교회헌장 33). 그렇다면 평신도 사도직의 본래의 장소가 사회라 하지만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 안에서도 응분의 임무와 권리가 있을 것이다. 또 그러한 권리와 의무는 순전히 수동적인 수용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일 것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교요, 인간 상호간의 친교의 공동체이고,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공동체이며, 세상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증거하는 공동체인 바, 평신도는 이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교회적 친교와 봉사와 증거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항에서 평신도의 교회참여에 대하여 논하고, 그 다음 항목에서 평신도의 사회참여의 몇가지 분야를 고찰하고자 한다.

 

 

Ⅲ. 평신도의 교회참여

 

이 제목은 자명한 듯 하면서도 생소한 제목이다. 모든 평신도가 신자인 만큼 교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평신도는 제2급 신자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에 그 신분에 마땅한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평신도가 친교와 봉사와 증거의 교회사명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하여 미래의 교회에서는 성직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참여의 폭이 넓혀져야 한다.

 

1) 친교의 공동체인 교회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차이점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때문에 이 공동체가 원만하게 친교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같은 신앙을 전제로 하면서도 구성원간에 간단없고 성숙한 대화가 필요하다. 종래 교회는 항상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치중해 왔지만 개방적인 미래의 교회에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나날이 민주화, 대중화되는 사회 안에 공존하는 교회 안에서도 교구와 교구 사이에, 본당과 본당 사이에, 각 사목 현장 사이에, 각 사도직 활동 분야 사이에,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사이에 활발한 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사목 현장에서의 긴장과 마찰을 많은 경우에 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대화의 부족으로 상호 이해가 결핍되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권리와 의무, 명령과 순명이라는 단순 논리로 처리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되어간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한 공동체요, 한 집안이라는 인식에서 깊이있는 대화로써 관계지어져야 할 것이다. 교구나 본당이 교구장이나 본당신부의 봉건영토가 아니고 그 구역의 신자들이 구역담당 사목자의 봉건신민이 아니라면, 일치와 순명의 정신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심사 토의된 것이 명령되고 수락됨으로써 친교를 돈독히 하고 일의 효과를 얻을 것이다. 

 

대화는 걸맞는 상대사이에 원만하게 진행된다. 성직자와 평신도사이에 대화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양편에 있다. 성직자는 교회일의 전문가로 자처하고 또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평신도의 산발적, 즉흥적 개입을 환영하지 않고, 평신도 편에서도 깊은 연구도 없이 제안하거나 인식부족 상태에서 개입하기 때문에 대화가 단절된다. 그래서 우리는 평신도 중에서 교회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고대한다. 교회 학문이나 사목 내용들이 성직자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고, 평신도들이 그런 것을 잘 알면 대화하기가 쉬울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성직자들도 사회의 현실과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여 대화의 터전을 넓혀 놓아야 하겠다. 

 

다른 한편, 평신도 상호간의 대화도 크게 진전되어야 하겠다. 카톨릭성당의 냉랭한 분위기는 유명하다. 성직자의 불찰도 있지만 신도들의 이기적 자기 구령위주의 태도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초대교회에서 신도들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던 것은 같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형제적인 사랑의 교류를 실천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성당은 전례거행 장소임과 동시에 친교의 장소이다. 구체적으로 신자들 사이에 정보 교환 체제가 개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기구를 이용하여 상호원조도 할 수 있고 관면혼배, 냉담자 문제를 크게 줄일 수 있고, 취업알선도 용이해질 수 있겠다.

 

2) 교회가 봉사의 공동체라면 봉사하는 체제에 당연히 평신도의 역량이 수렴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성직자 일변도로 체제가 짜여져 있고 평신도는 필요한 때에 동원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헌장 37조에는 평신도가 사목자에게서 말씀과 성사를 통한 영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과 자격에 따라 교회의 이익을 위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가 있다”고 원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의 이런 권리 의무에 대하여 성직자도 의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호의적인 고려를 하는 정도라면 그런 권리선언은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사목협의회 등 기타 기구들이 단순한 자문기관 이상의 기능을 가진 민의 수렴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의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본연의 임무에 더욱 헌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 각급 기관의 재정운용에 있어서 기획단계에서부터 평신도들의 유권적 참여의 길을 열어야 한다. 평신도들의 헌납으로 조성된 교회개산은 신자들이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친 것이지 결코 성직자에게 바친 것이 아니므로, 재정운용까지 성직자의 독단에 일임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예산의 편성이나 집행에 경험있고 능력있는 평신도들이 유권적으로 참여하면 훨씬 효과적인 재정운용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의 교리교육은 신자의 증가에 따라 본당마다 큰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한정된 수의 성직자, 수도사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간다. 이미 선진국의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직접 주일학교운영과 수업에 조직적으로 가담하는 길 밖에 해결책이 없다. 다른 한편 남을 가르치는 것이 자기가 배우는 최선의 길이므로 학부모들의 교리교수 참여는  본인들의 교리지식을 깊이 해 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선교의 호기를 맞고 있지만 성직자의 부족으로 이 호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성직이나 수도성소의 개발과 후원은 평신도의 중차대한 과제이다. 그들의 가정에서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교회는 선교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신자 가정은 자기 집안에 성직성소나 수도성소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자질있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격려하여 부르심에 응하도록 도와주는 한편, 물질적으로도 이들의 양성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직자, 수도자를 충분히 확보해야 되겠다.

 

3)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라면, 사회에 대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평신도의 주된 사도직이지만, 우선 교회 자체가 복음적 이미지를 나타내게 하는데 평신도가 기여할 점이 많이 있다.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현실 때문인지 한국 교회도 교회영성의 중요한 부문인 가난의 정신과 해탈의 태도가 희박해지고 있다. 재정적으로 빈약한 시골 교회들이 고전을 하고 있는데, 일부 대도시의 본당이나 기관들은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고 화려하게 외화내빈한 행사들을 벌리고 있다. 여유있는 본당이라도 사치스러운 일로 예산을 탕진할 권리는 없으며 마땅히 절약하여 어려운 본당이나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교무금이나 주일헌금에는 인색하면서도 본당신부나 기타 성직자 개인의 무슨 기념일 행사는 지나치게 요란하고 미사예물은 과다해지는 경향이 있다. 담당 사목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야 잘 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이 너무 물량적이고 세속적일 때에는 그 성직자를 타락시키고 남들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가난한 신자들을 울리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 35) 하신 말씀대로 교회의 증거력은 애덕의 실천에서 나타난다. 신자 개개인의 애덕의 의무는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고,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조직적, 지속적 애덕의 실천이 필요하다. 본당의 능력에 따라서 불우한 형제들을 돕는 예산 항목이 설정되어야 하겠고, 길흉사에 조직적인 협력제도가 마련되면 좋겠다. 일부 열심교우의 성의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신앙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기복종교적인 신앙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은 당연하지만(마태 7,7 ; 루가 11,9),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루가 12,31) 신앙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핵심에서 벗어나 기복적인 신심에 흐르거나 성물숭배 같은 양상을 띤다면 그리스도교적 의복을 입힌 샤머니즘에 불과하다. 미래의 교회에서는 평신도들도 철저한 전례교육을 받아서, 비전례적 대중 신심행사로써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하겠다. 여기에는 성직자들의 제도도 필요하지만 평신도들도 교리지식을 깊이하여 관념을 고칠 필요가 있다. 

 

교회의 모든 신심운동이나 행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 성모나 어느 성인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따라서 개별적인 신심운동의 방법과 절차가 다를지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심화라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Ⅳ. 평신도의 사회참여

 

사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평신도이다. 일반 사람들과 같은 환경에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신앙생활과 일치시킴으로써 복음을 증거한다. 

 

교회의 모든 봉사는 결국 선교를 위한 봉사이다. 미래의 평신도들은 한국 교회 초기의 평신도들처럼 스스로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박해시대가 끝난 후부터 지난 공의회까지는 선교의 주체가 성직자에게 옮겨진 인상을 주었으나 그것은 정상적 상태가 아니었다. 모든 신자는 세례성사로써 넓은 의미의 선교사로 축성되었기 때문에, 착한 표양으로써만 아니고 직접 말로써 선교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선교에 종사할 평신도 선교사도 양성되어야 하고 양성된 인재를 충분히 활용하는 뒷받침도 필요하다. 

 

평신도 사도직의 첫 무대는 가정이다. 가정은 신앙의 우산을 간직하고 후세에 전하는 요람이다. 그런데 근자에는 구교우들의 가정에서조차 가족기도의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가 사라지면 신앙도 식어진다. 교우가정에서도 문제아가 속출하는 것은 부모들이 물질추구에 여념이 없어서 자녀들에게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인생관을 심어주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다. 신자가정들이 기도하는 작은 성당이 되어야 이땅이 참으로 복음화될 수 있다. 기도가 없는 가정은 물기없는 화분이다. 

 

또 가정은 신앙교육의 일차 학교이다. 웬일인지 작금에는 교육이라면 무조건 학교에 일임하는 풍조가 생겨서 신자가정에서 직접적인 종교교육이 허술해지고 있다. 가정의 기능이 자녀의 육신 양육만이 아니고 인간성 함양에 있다면, 성당이나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시킬지라도 가정의 종교교육 역할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으며, 더욱이 한국처럼 공립학교가 무종교적인 상황에서는 부모의 종교교육 의무는 더욱 무거운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의 제2의 무대는 각자의 직업이다. 직업은 인간의 생계수단만이 아니고, 하느님이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맡기신 창세(2, 15. 19) 물질세계를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에, 직업생활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교리를 아는 평신도는 터무니없이 물질세계를 천시하는 플라토니즘에서 탈피하여 하느님이 좋다고 평가하신(창세 1, 4-31)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개발함으로써 창조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수행하는 업무자체가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의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직장인으로서 주님의 뜻을 받들고 물질에 관한 복음적 의미를 증거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에는 평신도의 사도직을 교횐 공동체에 대한 심부름으로 착각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더러 있다. 사도직을 강조하면, 사업이나 직장의 일이 바빠서 신부님을 도와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나 평신도 사도직은 먼저 그들의 가정과 직장에 있다. 그들은 먼저 가정을 잘 영위하여 사회의 거룩한 세포가 되게 하고, 직업에 충실하고 유능하게 되어 직업과 직장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들이 신자이기 때문에 모범적인 가정인이고 유능한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될 때에 하느님의 영광이 현양되고 미신자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에게는 직접적인 교회활동이 오히려 2차적인 사도직이다. 

 

가정이나 직업에는 등한하거나 무능하면서 노상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평신도는 결코 모범신자일 수 없다. 마땅히 그는 자신의 개별적 성소인 평신도의 소명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가정은 쪼들리고, 자녀들은 문제아이고, 직장인으로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간섭하고 개입하는 사례는 없어져야 하겠다. 그런 사람일수록 교회에 대하여 요구사항이 많고 성직자들의 인간적 약점이나 비난하고 신자들 사이에 불목을 조성한다. 때로는 그가 교회를 위하여 좋은 의견을 제시해도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서는 따라가지 않는다. 모름지기 자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의 말이라야 권위가 서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또 타인과의 사회생활을 통하여 인간세계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문명건설의 담당자들이다. 참된 문명은 인간이 이 세상을 경영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자유를 신장시키고 인간의 존엄성과 영성을 개발하여 하느님 나라에로 지향하게 하는 문명이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그들의 노동과 기술과 지식으로 물질을 개발하면서 사람들과 협력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제도와 기구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개선하고, 그것들이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조직운영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책임수행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왕직에 참여한다는 말은 왕답게 봉사한다는 말이고, 왕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유인으로서 결단을 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일차적 임무는 자신이 먼저 영성적으로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사악한 욕망과 죄악에서의 자기해방이 선결조건이다. 더 쉽게 말해서 신자 스스로가 성화되지 않고서는 결코 세상을 성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기성화에 힘쓰지 않으면서 사회정의나 세상의 복음화를 논하는 것은 위선적 사회참여이다. 

 

나날이 유물론적 세계관에 오염되고 있는 앞으로의 세상에서 평신도들은 현세 사물의 윤리적 가치를 옹호하고 증진시키는데 특별히 유의할 것이다. 물질세계의 개발과 향상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한 개발의 결과가 인류전체의 공동선에 기여하지 못하고 일부 계층에 편중된다면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손상시킬 것이요, 또 그 물질자체가 인간활동의 목적이 될 경우에는 인간의 영성이 무시되고 그 존엄성이 유린되어 창조질서에 위배되고 구세경륜에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사회참여는 과거보다 더욱 절실한 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예견되는 미래의 세계에서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인격의 존엄성 옹호의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현대의 개개인은 자신의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 커지고 있으며 자유의 신장을 갈망하고 있는데 반하여, 폭발적으로 인구가 팽창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점점 더 대중화하고 비인격화하며, 어느 나라에서나 과잉입법, 과잉행정으로 인하여 개인의 자유는 부당하게 제한되고 그 인격은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하느님이 당신 모상을 반영하여 창조하셨고 그리스도의 빠스카로 구원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선양하는 것이 자기 사명의 이행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평신도도 이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교회는 영성적으로 성숙하고 시대의 징표를 식별할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70년대처럼 성직자, 수도자들이 이런 일의 최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 활동까지도 사회와 교회의 대립으로 오인되기 쉽고,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제한되기 때문에 전시적 경고적 효과 이상의 결과를 내지 못한다. 평신도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몸으로써 참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해당 분야에서 발휘함으로써 그 분야를 내부에서부터 향상시키고 필요하다면 개조할 수도 있다.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실천은 바로 시회 안에서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유사이래 가장 발전하지 못하였으면서도 오늘의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는 그 막강한 권력으로 인간의 영원한 구원문제에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다. 정치는 이미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양심과 세계관을 좌우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회의 복음화를 도모하려면 평신도 중에서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들이 배출되어야 하겠다. 유린된 인권을 회복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훌륭한 정치로써 인권이 유린되지 않고 더욱 신장되는 세상을 만드느 것이 더 긴요하다. 

 

우리는 이상으로써 선교 300년대를 전망하면서 친교와 봉사와 증거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구현하는 평신도의 바람직한 모습의 일부를 고찰하였다. 친교는 정신과 물질을 타인과 나눔으로써 달성되고, 봉사는 하느님과 인간을 섬김으로써 하며, 증거는 복음을 가리우는 장식물을 벗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평신도들도 이 나눔과 섬김과 벗음으로써 복음정신에로 복귀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마태 5, 13)

 

[신학전망, 1982년 9월(가을)호, 鄭夏權(神父, 善牧神學大學長) / 인천교구 시노드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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