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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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한국사회의 정의와 공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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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25 ㅣ No.1257

[기억, 아남네시스] 한국사회의 정의와 공동선



순교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국사회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는 모습인지,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교황님이 보여주신 정의

본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을 뜻한다. 이 공정한 분배 행위는 모든 사람이 억울함을 갖지 않게 하고 사회를 정의롭게 이루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교회는 ‘공동선’이라 하고, 공동선을 이루는 방법을 ‘정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의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그런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교황님의 행보가 지난 여름 한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유는 ‘정의’, ‘공동선’, ‘화해’ 등과 같은 윤리적 어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언행일치, 이만큼 신뢰를 보여줄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한국인들이 굶주린 정의는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롭고, 겸손을 말하면서 겸손하며, 단호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바로 ‘실천’이었다.

교황 방한 때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 복자가 탄생한 사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방한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103위 성인이 탄생한 그때는, 전 세계에 알려진 한국 천주교 교세의 확장으로 그야말로 가톨릭교회의 축제 한마당이었다. 103위 성인 한 분 한 분에 대한 관심 또한 더할 수 없이 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는 복자 124위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 보였다. 이름 없는 수많은 순교자와 상처 받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다. 교황님의 언행일치는 바로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선교지 한국이 선교하는 나라가 된 지금 한국교회는 ‘승리에 도취’되어선 안 된다는 일침이다(8월 14일,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참조). 오히려 교황님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들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으셨다. 이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정의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정의의 본뜻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하신 삼종기도의 말씀이다. “우리는 특별히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이와, 이 국가적인 대재난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모든 한국 사람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되었으니,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성모님께서, 우리 중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특별히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 존엄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자비로이 굽어보시도록 간청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 그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사람들, 슬픔 속에 있는 모든 이, 그리고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 지금 한국사회의 억울한 사람들을 교황님은 짚어내셨다. 더 나아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라는 당부로써, 억울함을 만든 불의한 상황을 상기시키신다.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사람의 생명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기업의 횡포, 가난을 만들어내는 경제체제, 분배되지 않는 일자리, 이로 말미암아 상처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 이것이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탄생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후손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한국사회에서의 정의의 실천

한국사회는 번영한 사회이며, 한국교회 또한 번영한 교회이다. ‘번영’은 늘 강한 ‘유혹’을 동반한다. 그 유혹은 ‘물질주의’와 ‘편의주의’다. 교황님은 이 유혹을 도덕 상대주의, 중산층 교회,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등 구체적으로 지적하셨다. 정의실현의 첫걸음은 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유혹에서 벗어날 힘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있다. 교황님의 여러 강론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정의 · 연대 · 대화는 하나로 묶여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가라.’ 그렇게, 나의 정체성과 공감, 열린 마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갑니다. 나는 그를 내 편으로 끌어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를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 ‘교회는 개종 권유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아버지 앞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흠 없이 살아갑시다. 이 첫 계명을 지킵시다. 거기에서 만남이, 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이것이 더 깊은 이해와 우정과 연대로 가는 길입니다”(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이 말씀은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한국 방문을 마치며 여러분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 화해시키는 은총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총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의 공동체들 안에서, 그리고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힘차게 증언하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8월 18일,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강론).

번영한 사회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과제는 사회나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 사회 안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그 일은 “여러분의 친구들이, 직장 동료들이, 그리고 여러분의 국민들과 이 거대한 대륙의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그 자비로,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8월 17일, 제6차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강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 나눔은 자선활동이 결코 아니다. 그 일은 모든 형제자매와 이루는 구체적 연대로 드러난다. 그 활동은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인간 증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8월 16일,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의 만남 연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자비 나눔은 나의 구원을 위한 선행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품위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는 활동이다.

교황님은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특별히 실업자들을 언급하셨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양식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품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렇듯 인간 증진은 종교, 문화, 인종, 나이, 성별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게 하는 것, 곧 그들이 모두 마땅한 몫과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 일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기쁨을 누리는 일인 동시에 그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이렇게 시민들이 이루는 정의와 복음의 정의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개인의 선행이나 자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사회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 정의실현은 사회적 실천이며, 구원은 늘 공동체적이고 사회적 실재(「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14항)이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모습은 제도적 정의, 곧 정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이런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5년 5월 7일 한 접견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며, 정치참여는 공동선을 위한 가장 뛰어난 자선”이라 강조한 것이다.

“교황의 행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던 한 국회의원의 말은 이해되지 않는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국민의 정치참여로 통치되는 국가사회이다. 민주공화국 체제를 포기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정교분리를 말하는 것인가? 정교분리는 교회가 직업적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사목헌장」, 76항).

현대인들의 삶은 어떤 국가사회에서도 정치제도를 통해 영위된다. 정치는 관계와 삶의 조건이기에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공동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과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를 남겨주셨다. 그 내용은 공동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마지막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실 때 교황님의 제의에는 세월호 배지와 희망나비 배지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미사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북한이탈주민과 납북자 가족, 밀양 ·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초대되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강렬한 메시지이다.

희망나비는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갯짓하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있다. 공동선의 시작이다. 공동선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욱 자유롭게 자신의 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의 총체적 조건(「어머니요 스승」, 65항)이기 때문이다.

공동선의 가장 기본적 과제는 어떤 사람도 번영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엄한 삶을 위한 권리들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을 스스로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와 정당한 임금, 정치 · 사회 · 문화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모든 질병과 공격 · 사고로부터 안전할 권리 등이 제도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도 계속 강화되어야”(8월 14일, 공직자들과의 만남 연설)한다.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인권과 인간 안보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공동선은 한반도의 공동선으로 확장된다. 한반도의 공동선은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며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한다.

또한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공직자들과의 만남 연설 참조).

교황님은 한반도의 평화를 아시아 지역의 공동선과 전 세계 인류가족의 공동선으로 확장하신다(공직자들과의 만남 연설 참조).

아시아 지역의 공동선을 위해 교황님은 대화를 강조하셨다. 아시아 지역은 종교시장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종교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며, 국가 간 빈부차가 가장 큰 대륙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이념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라 정치적 대립 또한 심각하다.

교황님은 사회주의 국가들을 “성좌와 완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라 칭하셨고, 이들 국가와도 함께 주저 없이 대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희망하셨다(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아시아의 공동선을 위해 한국은 문화의 다양성, 국가 간 균형성장, 정치이념을 뛰어넘은 인간 중심의 정치질서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의 공동선은 전 세계 공동선으로 다시 확장된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이 나라가 앞장서주기를 바랍니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공직자들과의 만남 연설).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개인들의 권리와 안녕을 기반으로 한 세계의 공동선이다. 이는 모든 사람의 전인적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

또 개인들은 국가사회, 지역사회, 세계사회의 공동선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마땅히 자신의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정의를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연대하고,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인류구원의 동반자인 교회는 “희망 지킴이”가 되도록 ‘예언자적 증거를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내야’ 한다(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참조).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메시지를 요약한다.

“회심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긴박한 부르심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 도전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이바지했는가를 점검해 보라는 부르심입니다”(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강론).

* 심현주 율리아나 -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가톨릭 사회윤리를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8월호, 심현주 율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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