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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11-13: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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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1 ㅣ No.782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1)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상)


공산정권 어둠 속 음악으로 구원의 희망 증언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와 그가 작곡한 ‘요한 수난곡’.(출처 juilliard)

 


현대인들과 음악, 그리고 영적 체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은 언제라도 음원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음악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이어폰을 끼고 주변과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머무는 모습은 일상의 풍경입니다. 원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쉴 새 없이 음악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걸을 때 이러저런 음악이 들려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대개는 음악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음악이 그저 소리로, 심지어는 소음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노래 한 곡이 우리들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차가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새삼 음악이 ‘도시의 광야’를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귀중한 ‘지상의 양식’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좋은 음악은 정서를 어루만져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때로는 사람들을 영적인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음악이 영성을 담고 표현하는 탁월한 도구라는 뜻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직접적이며 생생한 영적 체험의 순간을 만나게 하는 ‘영성의 샘’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기도인 ‘시편’이 노래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양 음악사에서 근대 시대가 도래하기까지는 성경 말씀과 전례문,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내용, 개인의 삶 안에서의 신앙과 영적인 체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성음악’(Sacral Music)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성음악들은 시대를 넘어서 언제나 새롭게 신앙인들에게 영적 회심과 신앙적 통찰의 계기를 주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레고리오 성가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b 단조 미사’, 헨델의 ‘메시아’와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들으며 정서적 감동과 미학적 숭고함을 넘어 영적 차원의 변화를 체험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숙고하고 관조하는 삶의 방식을 불필요하게 여기고, 마음은 삭막해지고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지며 관계는 피상적이 되어 마침내 종교적 체험도 울림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우리가 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이러한 음악의 영성적 힘은 더없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시대에도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영성적 자각을 체험케 하는 음악이 여전히 쓰여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 자체도 매우 다양하게, 그래서 때로는 왜곡된 의미로 쓰여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요즘입니다. 그러기에 영성적 음악이라 하면 먼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어느 정도는 도피적 정서를 만족시키는 ‘뉴에이지’ 음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성’이란 말 속에 담긴 체험의 풍요로움과 의미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식별하는 수고로운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문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만나기 위해서는 작곡자만이 아니라 듣는 이도 갈망과 개방성과 결단을 간직한 구도자이자 모험가의 자세를 지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분열되고 상처 입은 시대를 감싸 안으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을 거스를 줄 아는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간직한 음악은 나른함과 사탕발림의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도전을 대면하는 용기를 표현해야 하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신비체험에서 감도는 침묵이야말로 언제나 영성의 원천임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구원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희망을, 깊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기다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처럼 현대 음악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샘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Arvo Part, 1935~)의 음악과의 만남은 놀랍고 반가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르보 페르트의 ‘요한 수난곡’을 듣다

 

아르보 페르트는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현대음악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자신의 중요한 성악곡들의 텍스트와 주제 대부분을 성경과 전례문에서 가져오기에 교회합창 음악가로 분류되지 않는, 저명한 현대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치밀하게 음악언어를 탐색하면서도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일관되게 음악의 핵심적 요소로 삼고 있는 그의 음악은 그 자체가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영성적 가치를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스토니아의 파이데에서 태어난 그는 에스토니아가 아직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의 음악원에서 그의 스승 하이노 엘러 밑에서 작곡 수업을 하는 한편 탈린 방송국에서 음향담당을 하며 당시 서방의 가장 전위적인 음악작품들을 풍부하게 듣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공산진영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벨라 바르톡에게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풍의 작곡에서 시작하여 그는 점차 당시 서방 음악 작곡계의 중심 움직임이었던 ‘12음 기법’과 ‘음열주의’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공산주의 문화계 간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요주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만, 정작 시간이 지나 동구권 작곡가들도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게 일상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런 흐름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음악과 영성이 만나는 시원을 탐구하며 새롭고도 오래된 음악언어를 모색해 갑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그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며 받은 감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종소리’를 뜻하는 어원에서 온 ‘틴틴나불룸’(tintinnabulum)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게 되는 음악적 방향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음악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성경 묵상에서 오는 신앙적 확신과 영성적 체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한 초기의 대표곡이 바로 요한 복음 18-19장 수난기의 불가타 라틴어 번역을 텍스트로 삼은 ‘요한 수난곡’(Passio Domini nostri Jesu Christi secundum Joannem)입니다. 바리톤이 맡은 예수님, 테너가 맡은 빌라도, 4중창의 복음사가, 거기에 바이올린, 오보에, 첼로, 바순이 하나씩 선율에 참여하고 오르간이 곁들여지는 소규모지만 극히 정교한 편성을 지닌 이 곡에서 페르트는 수난 복음의 낭독 그 자체로 가장 깊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음악 미학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도 공산주의 정권 치하였음에도, 명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음악적으로 또 공적으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는 큰 논란이 되었고, 그는 결국 1980년에 가족과 함께 사실상 추방 위협 속에서 독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2)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중)

 

“작곡이란 절대자 앞에서 느끼는 겸허함 담는 것”

 

 

아르보 페르트의 새로운 종교 합창곡인 ‘아담 수난곡’을 수록하고 있는 영상물의 한장면.

 

 

신앙고백과 새로운 음악언어의 추구

 

아르보 페르트는 6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현대 음악의 다양한 전위적 기법들을 섭렵하며 다양한 작품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이러한 현대음악의 정형화된 실험들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됩니다. 1968년에 그가 내놓은 작품 ‘크레도’(Credo)는 자신의 초창기 작품경향의 요약이자 동시에 이와의 결별을 암시한 의미심장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곡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 나오는 C 장조 전주곡으로 시작하여 무조음악의 날카로운 파열음들로 현대의 위기를 묘사한 후 다시금 바흐의 음악으로 마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여러 음악을 조합하여 재구성하는 ‘콜라주’ 기법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곡이 탈린에서 명 지휘자 네메 예르비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이른바 ‘크레도?스캔들’을 일으킵니다. 음악미학 때문이 아니라 이 곡의 제목과 가사인 전례문이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곡가의 신앙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공식적으로 유물론적 무신론이 견지되던 상황에서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에게 많은 시련을 가져오게 됩니다만, 그는 음악미학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하고 영성을 깊이 추구하는 삶의 길을 그 이후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견뎌내고 첫 번째 결혼의 실패 등 개인적인 정신적 위기를 넘기며 새로운 음악적 길을 찾는 동안 그는 거의 어떤 음악도 발표하지 않으며 긴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전통대로 어린 시절 루터교에서 세례를 받았던 그는 이 은거의 시기 동안 동방 정교회 영성에 깊이 매료돼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그가 수도승들의 기도와 고요함의 전통에 접근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정신적, 영적 위기를 극복했을뿐더러 음악을 작곡하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됩니다. 그는 작곡이 절대자 앞에서 체험하는 겸허함과 침묵에서 얻는 고요함 평화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언젠가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러시아에서 한 수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하면 작곡가로서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수도사는 내게 답하기를 자신도 해결방안이 있지는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내가 지금 기도를 쓰고, 기도문이나 시편에 곡을 붙여보곤 하는데 이런 것이 혹시 도움이 될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닙니다. 틀렸어요. 모든 기도는 이미 쓰여 있습니다. 당신은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준비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 수도사 말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래가 어느 날에는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위대한 예술가에게도 그가 더 이상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거나 만들 필요가 없는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그때 그의 창작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넘어선 순간에 다다른 것이니까요.”

 

 

침묵과 고요의 음악

 

페르트 음악에 정교회 영성이 깊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를 자신의 음악 언어에 도입하려 시도하며 라틴어 전례의 본문들을 깊은 존중감을 가지고 연구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두 번째 부인 노라와 결혼하고 가정적 안정도 찾으면서 1976년, 마침내 비로소 침묵의 세월을 끝냅니다. 10월 27일 연주회에서 ‘틴틴나불리 조곡’을 발표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그의 음악을 상징하는 ‘틴틴나불리’라는 음악미학이 꽃 피었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틴틴나불리’는 종소리(Tintinnabulum)라는 뜻의 라틴어 복수 2격형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페르트는 자신이 중세 때 지어진 성당들 종소리와 같은 숭고한 단순함과 들리지 않게 감싸고도는 충만한 침묵과 고요를 간직한 음악미학을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침묵과 고요는 결코 ‘뉴에이지’적인 심리적 평안함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에 뿌리내린 영성적 체험과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07년 5월 4일 독일의 유서 깊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가톨릭 신학부는 이례적으로 아르보 페르트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당시 축하 강연을 한 신학자 헬무트 호핑(Helmut Hoping)은 페르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침묵과 고요의 미학이 그저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깊은 영성과 신학을 담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로마 가톨릭 전례에서 입당송으로 사용되고 있는 ‘솔로몬의 지혜’(Sapientia Salomonis)에서 따온 한 옛날 성탄절 성가 가사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침묵의 시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계시를 담은 하느님 말씀에 대해 듣게 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15) 이러한 하느님 말씀이 페르트의 ‘틴틴나불리’ 음악을 오늘날까지 깊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스러운 음악은 음악의 시학 형태를 한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청자를 ‘침묵의 고요’로 이끕니다. 그 안에서 듣는 이는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닌 또 다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추천 음반

 

Arvo Part, Tabula Rasa, ECM New Series 1275(1984)

수록곡: Fratres(형제들), Cantus in Memory of Benjamin Britten(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찬가), Tabula Rasa(빈 서판 - 순정한 마음)

연주자: 기돈 크레머, 키스 제릿, 슈투트가르트 주립교향악단(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지휘) 외

Arvo Part, Passio(Passio Domino Nostri Jesu Christi Secundum Joannem), ECM New Series 1370(1988) (연주자: 힐리어드 앙상블)

Arvo Part. Alina, ECM New Series 1591(1995)

수록곡: Spiegel in Spiegel(거울속의 거울), Fur Alina(알리나를 위하여)

연주자: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 세르게이 베즈로니, 알렉산더 말테르

Arvo Part, Music Selecta(선집), ECM New Series 2454/55(2015)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3)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하)


영혼을 비추는 음악, 사랑과 구원 갈망 담아

 

 

아르보 페르트의 여정과 그의 벗들

 

아르보 페르트는 침묵과 성찰, 모색과 시도의 긴 시간 속에서 시대를 위로하면서도 시류에서 자유로운 ‘영원함’의 흔적을 담을 수 있는 고유한 음악의 길을 발견합니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새롭고도 영적인 영감이 깃든 곡들을 잇달아 내놓고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안에서 페르트는 그의 신앙고백과 음악관에 대한 당시 정권과 예술계 관료들의 비판, 다른 음악가들의 질시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는 기관원들로부터 스스로 이민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해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번 받습니다.

 

결국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주 장소를 찾는데 난관을 겪었지만 저명한 음악가 알프레드 쉬니트케가 연결해준 한 음악 출판사 도움으로 난민수용소에 머무는 대신 바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에게 빠른 시간 안에 국적을 부여합니다.

 

이후 그 다음 해에 역시 쉬니트케의 도움으로 독일정부로부터 최소한의 안정적인 생활과 창작을 위한 여건을 가능하게 하는 장학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으로 이주해서는 서방에 정착하여 음악 창작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베를린은 계속하여 그의 거주지로 남습니다. 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맺고 있는 각별한 관계는 1990년 베를린대교구에서 개최된 90번째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을 위해 작곡한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성전에서의 미사 전례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 곡에서 ‘틴틴나불리’의 음악미학은 로마전례의 경건하고 간결한 고유양식에 잘 녹아들고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5월 24일 베를린대교구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봉헌된 ‘가톨릭의 날’ 정점이 된 장엄미사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음악에 전념한 페르트는 잇달아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고 그의 음악은 독일어권을 넘어, 전 유럽과 특히 영국으로, 이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2010년, 노년에 이른 아르보 페르트는 비로소 자신의 고국에 거처를 마련하고 긴 여정 끝에 귀향합니다.

 

아르보 페르트는 서방으로의 이주 이후 새로운 작품을 작곡했을뿐더러 자신이 예전에 내놓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수정 보완하고, 그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연주자들을 통해 실연해보려 애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음악을 알아보고 완벽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동반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영국의 성악가이자 지휘자, 음악학자인 폴 힐리어(Paul Hillier)였습니다. 그는 정교하고 완벽한 가창과 뛰어난 곡해석, 틀에 박히지 않는 음악적 모험으로 유명한 고음악 단체 ‘힐리어드 앙상블’(Hilliard Ensembles)의 공동 창립자로서 1990년까지 이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음악학자로서 페르트의 음악미학에 대해 중요한 연구와 저서를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1990년 이후에는 자신이 창설한 성악그룹 ‘Theatre of Voices’를 통해 페르트의 후기 걸작들을 뛰어난 연주와 녹음으로 전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폴 힐리어를 통해 페르트는 자신의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과 영적인 힘을 ‘힐리어드 앙상블’의 탁월한 연주로 구현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이들을 매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요한 수난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처음 뮌헨의 루카스 교회에서 초연되었을 때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입각한 수난복음의 영창과 그 음절 사이 침묵에 청중들이 익숙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지만, 연주자들 역시 이 곡의 낯선 기법과 정신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힐리어드 앙상블은 작곡가 페르트마저 탄복한 완벽한 음악적 테크닉과 해석력, 곡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이 음악의 가치를 연주회에서, 녹음에서 잘 드러냈습니다. 이 곡 외에도 폴 힐리어와 힐리어드 앙상블을 통해 ‘데 프로푼두스’(De Profundus)나 ‘칸타테 도미노’(Cantate Domino) 같은 페르트의 전환기 이후 중요한 곡들이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페르트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또 한 명의 벗은 독일 재즈 음악가이자 음반 제작자인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였습니다. 아이허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가장 혁신적인 음악 레이블인 ECM 레코드를 설립하고 키워온 사람입니다.

 

- 아르보 페르트는 1990년 5월 24일 베를린대교구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봉헌된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 장엄미사에서 이날을 위해 작곡된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를 연주했다. 사진은 성 헤드비히 대성당 전경. (출처 위키미디어)

 

 

새로운 유형의 실험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재즈 명반들을 제작하던 그는 우연히 차에서 방송되던 페르트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현대음악과 고음악, 클래식 음악, 민속음악 등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을 넘나들며 투명하고 심오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ECM 뉴시리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페르트가 이탈리아 음악학자 엔조 레스타뇨와의 대담에서 여전히 감탄하며 회고하듯, 아이허는 놀랄만한 정열과 장인적인 능력으로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 앨범 ‘타불라 라사’를 1984년에 내놓았습니다. 이 앨범은 페르트의 음악을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 바이올린 주자 기돈 크레머가 참여한 이 앨범은 ‘프라트레스’(Fratres 형제들이여) ‘칸투스’(Cantus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찬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빈 서판/순수한 마음) 등 그가 ‘틴틴나불리’ 기법을 확립한 후 아직 에스토니아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대표작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음악은 한동안 필립 글래스나 스티브 라이히 같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주도한 ‘미니멀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르보 페르트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라이히의 도시적인 사고와 감수성, 필립 글래스의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에 영향받고 뉴에이지적 경향을 지니는 종교관이 다르듯, 페르트의 음악적 방향 역시 현대의 미니멀 음악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비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침묵과 고요를 추구하는 음악이 지니는 독자성은 점점 더 함께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었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음악은 세월과 함께 ‘틴틴나불리’라는 기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렵게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자비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길을, 빛과 사랑의 침묵과 공허하지 않는 고요를 담은 소리 속에서 탐구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그의 음악은 ‘프리즘’처럼 우리의 영혼을 드러내고 청자로 하여금 내면에 깊이 간직된 사랑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만나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3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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