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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밀레비의 옵타투스: 교회일치와 친교 운동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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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61

[교부들의 가르침] 밀레비의 옵타투스


교회일치와 친교 운동에 앞장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를 통해서 동방교회, 개신교, 성공회를 한 형제라고 고백하며 교회일치운동에 힘찬 시동을 걸었다. 그렇다면, 교부 시대에도 교회일치운동이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갈라져 나간 형제들'(裂敎, schisma)이 있었고, 잃어버린 교회 일치와 친교를 회복하려던 교부들의 땀방울이 교부 문헌 곳곳에 배어있다.

 

그러나 동서방 교회를 통틀어서 교회일치운동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교부는 밀레비의 주교였던 옵타투스(384년 이후)이다. 옵타투스가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밀레비의 주교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옵타투스의 작품 '도나투스 열교'를 읽노라면, 그분이 지녔던 평화의 정신과 고매한 인품을 넉넉히 느낄 수 있다.

 

 

치프리아누스, 일치의 걸림돌

 

옵타투스가 주교로 일하던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인물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순교한 치프리아누스(?~258년)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떼를 지어 이 존경스런 순교자의 무덤을 방문하였을 뿐 아니라, 치프리아누스가 남긴 작품들은 교회 안에서 마치 '성서'처럼 읽히고 있었다. 그 결과, 치프리아누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성사론과 교회론마저 갖가지 신학적인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큰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쉽사리 치프리아누스의 신학에 '아니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도나투스 열교가 치프리아누스의 신학과 권위를 등에 업고서 교회 안에서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마땅히 대응할 길이 없는 딱한 형편이었다.

 

 

도나투스 열교의 탄생

 

312년경, 카르타고의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곳 부제였던 체칠리아누스는 이웃 주교들의 동의 없이 몇몇 측근 주교들만 참석한 가운데 서둘러서 주교품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 선출을 위해 뒤늦게 카르타고에 도착한 누미디아 지방의 주교들은 체칠리아누스의 주교품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체칠리아누스의 주교서품식을 공동집전한 세 명의 주교 가운데, 한 명(펠릭스)이 배교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이 베푼 성사는 무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체칠리아누스의 편을 들어 그의 서품이 유효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톨릭 교회를 '배교자들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야말로 '순교자들의 교회', '거룩한 사람들의 교회'라고 내세웠다. 이렇게 두 동강난 교회는 100년 가까이(411년까지)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도나투스 열교(裂敎)라고 부른다. 그 까닭은 이 분열을 주도한 핵심인물의 이름이 도나투스였기 때문이다.

 

 

평화와 일치 운동의 선구자

 

가톨릭 교회와 도나투스 열교는 서로 증오하고 미워했다. 그러나, 가톨릭 주교였던 옵타투스는 도나투스파를 '형제들'이라 부르면서 화해와 일치에로 초대한다. 옵타투스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와 도나투스 열교는 서로 끊을 수 없는 '거룩한 형제애의 사슬'에 묶여있다. 도나투스 교회도 가톨릭 교회와 똑같은 성사, 똑같은 성서를 지니고 있으며,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똑같이 기도한다. 도나투스파가 믿는 하느님과 가톨릭 교회가 믿는 하느님은 똑같은 분이시며, 모두들 똑같은 어머니 교회에서 태어난 형제들이다. 단지 '사랑'이 부족해서 지금은 갈라져 있지만, 다시 하나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제의하는 옵타투스는, 교부 시대에 드물게 만나게 되는 교회일치운동의 선구자이다.

 

 

성사의 주인은 하느님, 인간은 도구

 

도나투스파는 거룩한 사제만이 성사를 유효하게 집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옵타투스에게 있어서 성사의 유효성은 집전자의 거룩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이 성사의 주인이시며, 인간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성사를 베푸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성사 집전자가 거룩하냐 거룩하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성사가 유효하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이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 성사론의 소중한 초석이 되었다.

 

 

거룩하고 죄스런 교회

 

도나투스파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만 교회 안에 머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옵타투스에 따르면, 교회가 거룩한 것은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지, 교회의 구성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거룩한 교회는 그 품안에 죄인들도 품고 있다. 마치 밭에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듯이 교회 안에는 거룩한 사람과 죄인이 뒤섞여 있다(마태 13,24~30 참조). 교회라는 밭에서 가라지, 곧 죄인을 솎아낼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우리는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고 견디어 내며 이 세상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옵타투스의 이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서른 셋에 세례를 받고 서른 일곱에 늦깎이 신부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옵타투스가 깔아놓은 성사론과 교회론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신학을 활짝 꽃피웠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옵타투스를 일컬어 "공경해 마지않는 가톨릭 주교"라고 칭송하며 깊은 존경과 사랑을 표시했다.

 

 

아름다운 주교 옵타투스!

 

서울대교구 시노드에서 참관인으로 발언한 정철범 대주교(대한성공회 관구장)의 고마운 쓴소리는 오늘의 한국 가톨릭 교회가 가슴을 찢으며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한국 가톨릭은 열린 자세가 아닌 유아독존식 자세로 역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가톨릭이 아니라고 배척하지 말고 연대하고 양보해서 하느님의 선을 이룹시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이단시하는 경향이 많은데, 매우 슬픈 일입니다. 가톨릭이 솔선해 주었으면 합니다"(요약). 아름다운 주교 옵타투스의 열린 마음과 평화의 정신이 더욱 그리워진다.

 

[가톨릭신문, 2003년 5월 4일, 최원오 신부(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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