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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 평화를 찾다2: 4년간의 봉쇄, 사라예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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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2 ㅣ No.367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② 4년간의 봉쇄… 사라예보의 기억


내전과 봉쇄로 피폐해진 땅에도 봄은 왔습니다

 

 

- 1990년대 초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포격으로 심각하게 파괴된 사라예보 밀야츠카 강 왼쪽의 그르바비차 구역 브르바냐 다리 근처 아파트.

 

 

사라예보는 평화를 되찾았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서울 청계천보다 약간 큰 밀야츠카 강은 잘 정비돼 있고, 그 곁으로 빨강과 파랑 등 원색으로 칠해진 노면전차가 지나친다. 강가에는 낮은 건물 사이로 작은 호텔이 들어서 있고, 서구 유명 브랜드 제품이 다 들어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 보인다. 흰색이나 검정, 원색의 히잡을 두른 여인들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유럽의 도시마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난민이 정착하면서 히잡을 두른 여인들이 많은 걸 고려하면, 여느 유럽 도시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가톨릭과 정교회, 유다교, 이슬람이 잘 어우러진 다종교 도시답다. 사라예보라는 지명조차 터키어로 성, 혹은 요새를 뜻하는 ‘사라이(Saray)’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400년간 이 땅을 지배한 오스만튀르크의 영향이 크긴 큰가 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 화해의 상징으로

 

- 보스니아의 평화를 기원하며 사라예보를 찾았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상과 사라예보의 한 건물.

 

 

하지만 1992년 4월 5일에 시작돼 1996년 2월 29일까지 이어진 ‘1425일간의 광기 어린 사라예보 봉쇄’가 남긴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무너진 건물이나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추도 공간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사라예보 구시가지 페르하디야 거리에 있는 브르흐보스나대교구 예수성심주교좌성당 앞에도 1993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의 진상을 기억하는 사진전 개최 표지판이 맨 먼저 눈에 띌 정도다. 그 앞에는 보스니아의 평화를 기원하고자 사라예보를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동상이 세워져 종교 간 화해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1890년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보스니아 본토인 수도회인 아기 예수의 종 수녀회 마리아-아나 쿠스트우라 수녀의 증언을 들어보자. 

 

“4년간의 봉쇄로 사라예보는 거대한 수용소가 돼 버렸지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독립을 저지하고자 일으킨 전쟁은 민간인 희생자만 5400여 명을 냈어요. 군인들까지 포함하면 1만 34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전쟁 전 52만여 명이던 사라예보 인구는 봉쇄가 끝난 이후 43만여 명으로, 9만 명이나 줄었어요. 전쟁으로 무너진 건물만 3만 5000여 채나 됐다고 해요. 하지만 전쟁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굉장히 슬픈 경험을 많이 했지만, 저희의 신앙을 굉장히 굳건하게 해주는 계기도 됐지요.”

 

 

봉쇄 당시 종교 가리지 않고 원조 활동  

 

봉쇄 당시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사라예보를 지켰던 쿠스트우라 수녀는 4년 내내 전쟁의 포화를 뚫고 시민들을 보살폈다. 봉쇄 동안 하루 평균 329회, 많을 땐 하루에 3700여 회나 쏟아부은 포격을 이겨내며 구호에 매달렸다. 구호물자는 1993년 뚫은 사라예보 터널이나 사라예보 공항을 통해 주로 조달했는데, 나토군 중 프랑스군의 지원이 가장 컸다. 종교를 가리지 않고 원조한 덕에 쿠스트우라 수녀는 “진정한 의미의 애덕을 체험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보스니아 내전의 또 다른 특징은 군대 간 전쟁이 아니라 수백 년을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총부리를 들이댄 슬픈 전쟁이라는 점이다. 정치인들의 선동에 휘말려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적이 돼 버린 전쟁이 바로 보스니아 내전이었다. 그러기에 종전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이고, 날마다 배우자의 묘에 헌화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매일같이 포탄이 떨어지고 피가 뿌려지던 거리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군데군데 포탄과 총탄 자국이 남아 있긴 하지만, 나지막한 2∼3층 건물 사이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이어지고, 구시가지에는 전통 공예품과 실크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구시가지를 지나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 건축물인 가지 후스레프 베이 모스크(Ghazi Husrev-bey’s Mosque)를 보고 들어가 봤다. 16세기 당시 보스니아 지배자인 가지 후스레프 베이의 지시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을 위해 세워졌다는 모스크는 정문에 남녀 출입구가 각각 따로 나 있고 그 옆에는 손발을 씻는 무슬림들로 가득했다. 모스크 옆에는 팔각형 건물 두 채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로, 하나는 기도와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모스크 앞에서 재잘대는 젊은이들을 보려니, 이들이 언제 ‘이웃끼리’ 서로를 죽이는 잔인한 전쟁을 했는가 싶다.

 

 

기도 바탕으로 대화 통해 평화 추구

 

브르흐보스나대교구 종교 간 대화위원회 간사 보자나 이벨리치 카타바(34)씨는 “당시 전쟁이 끝난 크로아티아에 살았지만, 주위에서 정말 많은 분이 희생됐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면서 “그래서 1998년 사라예보에 온 뒤로 저는 종교 간 대화 모임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구가 운영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청소년센터를 통해 종교가 다른 청소년들 간에 함께 어울리고 공부하며 친분을 쌓고 만남의 장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기도를 밑바탕에 깔고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뤄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노을이 지는 교구청을 나서려니 지난해 6월 사라예보를 찾아 “서로 다른 목소리로 증오에 찬 광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대신 숭고한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멜로디를 만들어 달라” 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부가 머리에 맴돌았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2일, 글·사진=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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