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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천주교 활판 인쇄와 인쇄 장소에 관한 연구: 코스트 신부의 인쇄 ·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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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2 ㅣ No.983

한국 천주교 활판 인쇄와 인쇄 장소에 관한 연구 - 코스트 신부의 인쇄 ·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

 

한국천주교 활판 인쇄 출판 및 인쇄 장소에 대한 코스트(Coste) 신부의 활약은 다음과 같다. 한국 최초의 활판 인쇄로 된 간행물인 《한불자전》은 코스트 신부에 의해 요코하마 예수성심당 인근의 외국인 거류지 183번(番)에 위치한 《레코 뒤 쟈퐁》 신문사의 인쇄소에서 1880년 12월 11일에 발간되었다. 둘째는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에서 1881년 5월 21일에 조선어 문법서인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가 활판 인쇄되었다. 셋째는 나가사키로의 인쇄소 이전은 방인 성직자 양성과 문서 선교라는 과업을 실시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또 선교사들의 거점으로 요코하마보다는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넷째로는 나가사키에서 정동으로 이전된 인쇄소의 위치는 현재의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자리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섯째로는 정동에서 종현으로 이전한 인쇄소의 위치는 현재 파밀리아 채플이 있는 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한국천주교 활판 인쇄 및 인쇄소 위치 연구를 통해 코스트 신부의 역정을 간략하게 언급해 보았다. 본 연구는 향후 보다 완전한 역사를 기술하는 데 중요한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인쇄 및 출판의 역사 연구에서 코스트 신부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1. 서언

 

코스트(Coste, Eugène Jean Georges1), 高宜善, 1842~1896) 신부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약현성당 건축2), 명동성당 건축3)과 명동성당에 있는 코스트 홀4)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활판 인쇄에 대해 언급을 시작하려면 파리 외방전교회의 노력, 특히 코스트 신부의 역할을 차치하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교황 비오 10세는 “만일 교회가 출판 기관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교황으로서의 제의와 지팡이와 가구까지라도 팔아서 바치겠다.”5)며 그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6) 역시 새로운 전교지인 조선에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교리서 및 문서를 통한 선교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지침 교리서나 한문서학서를 번역 · 편찬하는 것은 초대 대목구장 때부터 진행해왔다. 특히 1862년에 목활자로 간행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 2판)를 시작으로 1881년에는 조선 내에 있던 인쇄소에서 《천주성교공과》(4판), 《신명초행》(3판), 《천주성교예규》(2판)이 목활자로 인쇄됐다.7) 이러한 목활자로 인쇄된 서책의 발행은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이 교리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전례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함으로써 더욱 굳은 신앙을 갖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불자전》과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8)의 발행에 대한 시작은 제5대 조선대목구장인 다블뤼 주교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는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고, 교우들을 위해 교리서와 신심서를 번역 · 저술하였으나, 1863년에는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버렸다. 더군다나 1866년의 박해로 인해 소중한 문서가 소실되었고, 다블뤼 주교가 1866년 3월 30일 순교함으로써 《한불자전》의 출간은 부득불 그의 뒤를 이은 제6대 조선대목구장인 리델 주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리델 주교에게 넘어간 자료는 리델 주교 자신이 조선 입국에는 성공하나, 곧 체포되어 결국 조선에서 추방당하는 등 일련의 사건으로 《한불자전》 발행의 임무를 조선에서는 수행할 수 없었다. 여러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던 리델 주교가 사전과 문법서의 인쇄 작업에 대해 달레 신부와 몇 차례 의견을 교환한 것 등을 통해서,9) 리델 주교의 인쇄에 대한 열의와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리델 주교는 중국 차구10)에서 조선으로 재입국의 기회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 간행을 이어갔으나, 마침 조선 선교를 자원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코스트 신부에게 이 중차대한 일을 맡기게 되었다. 문서 정리가 완성단계에 있던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원고를 지니고 간행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코스트 신부는 요코하마에서 적절한 장소를 찾아 발행하게 되었다. 이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발행한 코스트 신부는 다시 나가사키로 인쇄소를 이전시켰으며, 나가사키에서 다시 서울 정동으로, 이후에는 다시 명동성당으로, 그런 연후에는 현재의 가톨릭출판사가 있는 중림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본고는 이전의 연구 성과11)를 바탕으로 코스트 신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부 새로운 시각 및 구체적 장소를 언급하면서 한국 인쇄 출판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몇몇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첫째로 코스트 신부가 중국 상해에 활판 인쇄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요코하마를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발행하는 장소로 선정한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간략하게나마 《한불자전》과 《한어문전》 및 《천주성교공과》의 출간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다시 나가사키라는 곳으로 인쇄소를 이전하게 된 몇 가지 이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쇄소가 한국으로 이전되어 정동과 종현성당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인쇄소가 있었던 위치 및 출간 서적 등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 성과에 더하여 본 논문은 활판 인쇄 및 인쇄 장소를 여러 번 옮기게 된 이유를 밝혀 당시 상황을 보다 완정하게 이해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국 파리 외방전교회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편, 2011)12)을 중심으로 보면서, 일문 자료인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 1~3集과 프와넬 신부가 작성한 NOTICE NÉCROLOGIEQUE sur le PÈRE COSTE(Gustave FIRMIN et MONTANE 출판사, MONTPELLIER, 1896), 《奉敎自述》 한문본(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및 한글 번역본(《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그리고 《바오로 뜰안의 哀歡 85年》,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를 함께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2. 조선 선교사 배속(1875년 11월 21일) 전후 코스트 신부의 활동

 

코스트 신부는 1842년 4월 17일 프랑스 에로(Hérault)주의 몽타르노(Montarnaud)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몽(Belmont) 소신학교와 몽펠리에(Montpellier) 대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그곳에서 소품을 받은 뒤, 1866년 12월 10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8년 6월 6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해 7월 15일 코스트 신부는 홍콩 대표부의 부대표(sous-procureur)로 임명받고, 프랑스에서 홍콩으로 떠났다.13)

 

코스트 신부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경리부 대표 일과 건축 일을 담당하였다. 홍콩에서 2년간 업무를 보던 코스트 신부는 1870년 12월 30일부터 1872년 6월 22일까지 싱가포르 대표부(경리부)의 대표(procureur)를 맡아보면서, 요양소 건설에 대한 건축 관련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72년 6월 말부터 2년간 코스트 신부는 홍콩의 베타니 요양소(Sanatorium de Béthanie) 건설에 종사하기 위해 홍콩으로 돌아왔다. 홍콩에서 그는 이 건축을 위해 고딕건축에 조예가 깊은 기술자들과 교류하면서 건축에 대한 기술을 확보하였다.14) 그리고 2년 뒤에 그는 상해대표부15)장(경리부장, procureur)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지에서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을 지녀왔던 그는 1875년 9월에 조선 대목구 선교사로 지원하였고, 1875년 11월 21일 청원이 허락되어 조선대목구 신부로 배속되었다.

 

코스트 신부가 조선대목구에 배속된 후, 당시 조선대목구를 담당하였던 제6대 조선대목구장인 리델 주교는 조선포교지의 선교사로서 차구로 오게 될 코스트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 몇 가지 준비사항을 알리고 있다.16) 1876년 4월 9일 리델 주교는 코스트 신부에게 《한불자전》을 인쇄할 인쇄소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7) 1876년 4월 26일 리델 주교는 《한불자전》과 블랑 신부가 만든 《한어문전》의 원고18)를 탈고하였다. 또 리델 주교는 코스트 신부에게 조선에서 구한 책들의 사본들을 인쇄할 수 있는지 홍콩 인쇄소의 인쇄 작업이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는 내용19)과 또 “서적 인쇄를 위해 원판(planches)을 새기고 싶은데, 중국에서는 조선에서보다 비용이 많이 나가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나는 길에 상해에 들러 알아보려 한다.”20)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리델 주교 자신도 서적 인쇄 장소 물색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리델 주교는 코스트 신부와 함께 1876년 9월 5일 상해를 떠나 10월 19일 차구(岔溝)의 노틀담 데 네쥬[Notre-Dame des Neiges, 일명 성모설지전]에 도착21)하여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22) 리델 주교는 자신과 동료 선교사와 조선인 교우들23)이 함께 저술하고 작업한 《한불자전》(Dictionnaire-Coréen-Français)과 《한어문전》의 마지막 작업 단계인 대조작업과 인쇄를 코스트 신부에게 맡겼다. 1877년 3월 3일 리델 주교는 코스트 신부를 인쇄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원고를 넘겨주었다. 이러한 자료에 대한 출판의 의무를 지게 된 코스트 신부는 자료를 간행할 수 있는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877년부터 코스트 신부가 《한불자전》을 필사하고 조선어를 학습하는 데 몰두했다는 내용을 볼 때도 이러한 이유가 신빙성 있다. 그는 《한불자전》 및 《한어문전》의 인쇄를 위해 만주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차구에는 이렇게 두터운 저작물을 인쇄할 기재와 설비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활판을 주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24)

 

코스트 신부의 위의 행적을 살펴볼 때 1877년 코스트 신부가 만주 차구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고 했는데, 차구에서는 바로 일본으로 가는 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의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대표부25)와 홍콩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로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1877년 10월 6일 코스트 신부는 《한불자전》 등을 간행하기 위한 인쇄소 물색을 위해 홍콩, 상해,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후 요코하마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3. 요코하마에서 코스트 신부의 활동26)

 

코스트 신부가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출판을 위해 왜 요코하마로 들어갔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요코하마 이외 지역의 출판 관계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코스트 신부의 요코하마행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학자는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을 인쇄하게 된 것은 당시 동양에서 이러한 시설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그곳 요코하마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27)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미 상해에는 상해 미국 북장로회 인쇄소인 미화서관(美華書館)28)과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토산만인쇄소(土山灣印刷所)29)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스트 신부가 《한불자전》의 출판을 위해 요코하마로 들어가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코스트 신부와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오주프(Osoup Pierre-Marie, 1829~1906) 주교30)의 적극적인 지원 약속31)과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 80번(番)32)에 지라르33) 신부가 건립한 예수성심당(1862~1873년)34)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에서는 이 성심당 지하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일본인 신자들을 위한 교리서를 인쇄하고 있었다.35) 요코하마의 예수성심당에서는 코스트 신부가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드 로36) 신부에 의해 교리서가 인쇄되었던 전력이 있었고, 드 로 신부는 1873~75년까지 이 예수성심당에서 인쇄를 담당하고 있었다.37) 뿐만 아니라 일본 천주교 재건38)은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의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39)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을 건축하였고 재 선교 시기 교회의 책임자였던 지라르 신부는 프티장(Bernard Thadee Petitjean, プティジャン, 1829~1884)40) 신부를 나가사키로 보내 오우라 천주당 건립41) 및 파리 외방전교회의 두 가지 선교방침인 신학교 건립과 인쇄소 설립을 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 기리시당의 발견 등 일본 천주교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둘째는 일본에서 대외 개방된 개항장42)이었으며, 홍콩에서 요코하마까지 운항하는 배편이 있었다는 것이다.43)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 요코하마까지의 연락선이 운행44)되고 있었으므로 교통이 편리하였다는 것이다. 이 개항장에 외국인의 거류가 법적으로 허가된 거류지가 있어서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거주와 활동이 보장된다는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셋째는 외국인 거류지가 있었던 이곳 요코하마에서는 활판업무45)와 인쇄기의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46) 인쇄기의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쇄기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던 코스트 신부에게는 아주 큰 흥밋거리였다. 뿐만 아니라 활자와 식자공(植字工)에 대한 수요와 공급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고,47) 활판 잉크와 활자 등도 판매48)되고 있어서 구매가 용이하였으며, 또 외국인 거류지가 있어 외국인의 활동에 제약이 없었다는 것 등도 지역을 선정하는 중요한 이유였을 수 있다.

 

넷째는 한글 종자 조각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1878년 2월 도쿄츠키지활판제조소에 입사한 다케구치 쇼타로[竹口正太郞]가 1878년에 최지혁체(한글 5호)를 종자 조각사로 조각하였고, 이뿐만 아니라 성서체 한글 3호(1879년), 나가사키 성서체 한글 3호 활자(1881년), 한글 2호 활자(1882년), 한성체 한글 4호 활자(1883년)를 조각했다.49)

 

다섯째는 요코하마에 프랑스 신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신문사인 《레코 뒤 쟈퐁》(L‘Echo du Japon, 일본의 소리, 1875~1882)에서 프랑스 활자를 쉽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한불자전》을 간행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50) 특히 이 신문사가 있던 외국인 거류지 183번(番)은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이 있던 외국인 거류지 80번(番)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섯째로는 조선 선교의 거점을 중국 만주의 차구(岔溝)에서 요코하마로의 이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일본과 조선은 이미 1875년에 이미 조약을 체결하고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상선과 상인들이 조선에 드나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쪽을 통해서 조선에 잠입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중국 만주의 차구(岔溝)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과 일본은 이미 근대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의 조선 입국이 만주에서의 조선 입국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요코하마를 택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51)

 

이러한 제반 여건을 고려한 코스트 신부는 1878년 4월 25일 리델 주교 지시에 따라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에 거처를 확보한 후 즉시 《한불자전》 간행에 착수하게 된다.52) 프와넬 신부가 기록한 코스트 신부의 약전에 의하면, 요코하마에는 “그가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있었다.”53)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한불자전》 간행에 어려움이 없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의 간행 과정은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다. 《한불자전》은 그전까지의 필사본이나 목판인쇄본이 아니라 신식 서양식 활판 인쇄기술로 간행되었다는 것이다. 리델 주교로부터 중국에서 《한불자전》의 원고를 가져온 코스트 신부는 예수성심당 지하 1층에서 수정작업을 진행하였다. 예수성심당에 교회부설 인쇄소가 설치된 것은 1871년부터였다. 이때는 나가사키 오우라[大浦] 천주당에 석판인쇄소(石版印刷所)를 설립한 드 로 신부가 요코하마로 이전 · 부임하였고, 이때 예수성심당에도 석판인쇄소가 설치되었던 것이다.54) 당시 성심당의 주임 사제는 펠릭스 미동(MEP. Felix Midon, ミドン, 1875~1885년 재임) 신부였다.55)

 

요코하마에 도착한 코스트 신부는 도쿄[東京] 간다[神田]에 위치하고 있던 히라노활판제작소[平野活版製作所]56)에서 최지혁의 한글 원도로 1878년 5월 11일 본문용 한글 5호 활자(3.68mm) 제작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에 인쇄용 한글 활자를 완성시켰다.57) 그리고 프랑스 활자와 영어 활자는 《레코 뒤 쟈퐁》(L’Echo du Japon, 일본의 소리, 1875~1882) 프랑스 신문사58)에서 구입하였다.59) 1879년 12월 5일 요코하마의 《레코 뒤 쟈퐁》 프랑스 신문사에서 《한불자전》의 식자, 문선, 인쇄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1879년 4월부터 《한불자전》의 인쇄 작업을 시작하여 1879년 5월 160페이지, 1880년 3월 12일60)에 480페이지 인쇄를 완료61)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한어문전》 인쇄 작업도 병행하기 시작하였다.62)

 

1880년 12월 11일 《한불자전》 500권이 간행되었다.63) 이 《한불자전》은 한국 최초의 다국어 사전이며, 한자를 병기한 다국어 혼식 가로조판64)으로 프랑스 신문사 《레코 뒤 자퐁》의 시 레비(C. Levy)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한불자전》이 간행된 1880년 12월 11일은 한국 근대 활판 인쇄와 출판이 시작된 기념비적인 날이다.65)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 출판의 근대적 시발점 역시 이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판의 언어적 규정은 “서적이나 회화 따위를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 활판 인쇄 출판의 기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66)

 

《한불자전》의 발행자인 시 레비(C. Lévy)의 정식 이름은 서프 레비(Cerf Lévy)로 그는 요코하마에서 1870년 최초의 프랑스 신문사를 설립하게 되었다.67) 《레코 뒤 쟈퐁》 신문사는 신문 발행 이외에도 명함, 안내장, 계약 서류 등의 인쇄, 서적 출판과 신간 서적 판매, 만년필, 펜, 잉크, 봉투 등의 문구류, 각종 종이류 등을 판매하였다. 《레코 뒤 쟈퐁》이 폐간될 때까지 17년간 단 한 번도 신문의 지면 구성에 변화가 없었고, 직원들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15명의 조판공, 5명의 기자, 1명의 통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영은 어려웠던 것으로 추측된다.68)

 

이 《레코 뒤 쟈퐁》 신문사는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사 사장인 레비와 아르망(アルマン)이라는 편집장 사이에 업무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아르망은 신문사를 퇴사하게 되었고, 퇴사한 후 동료인 앙트와네트(アントアヌ)와 함께 Le Courrier du Japon이라는 이름69)으로 프랑스 신문사를 창간하였다.70) 이러한 문제로 결국 서프 레비는 그의 고향인 프랑스 알자스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레옹 레비(Leon Lévy)71)에게 위임 대행권을 넘겨준다고 신문에 게재하였다.72)

 

코스트 신부는 1881년 5월 21일 요코하마에 활판소를 설립한 후에는 다시 최지혁체를 이용한 한글의 새로운 활자체를 사용73)하여 《한어문전》74) 500부, 《텬쥬셩교공과》(3판) 등을 출간하였다. 이렇게 출간을 이어가던 중 1881년 6월 중순에 코스트 신부는 리델 주교의 지시로 나가사키에 조선대목구 대표부와 인쇄소 장소를 물색하였다.75) 리델 주교가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로 인쇄소 이전 장소를 물색하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몇 가지가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로는 몇 년 전부터 개설된 나가사키에서 부산을 잇는 정기 운항 항로이다. 이 항로를 통해 나가사키와 부산 간 물품과 서신, 인적교류가 안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둘째로는 인쇄소의 확장 문제이다. 제대로 된 인쇄소를 갖춘다는 것은 조선대목구의 문서선교라는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오우라[大浦] 천주당은 이미 드 로 신부가 인쇄소를 운영하였던 곳이었고, 요코하마와 마찬가지로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인쇄에 대한 제반 여건이 다른 곳보다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셋째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대표부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문서선교와 조선신학생의 양성이었는데, 오우라 천주당에는 라전(羅典; 라틴)신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교회에서는 이곳 신학교를 이용하여 조선 신학생을 양성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로는 요코하마는 영국과 미국 세력이 점점 프랑스 세력을 압도하는 상황76)으로 이어졌고, 이어서 개신교 목사들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다. 다섯째로는 당시 나가사키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격으로 프티장 주교가 거주하였기 때문에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설치하는 데도 적격인 지역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스트 신부는 1881년 11월 6일부터 단계적으로 인쇄소를 나가사키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요코하마 프랑스 거류지에 있던 《레코 뒤 자퐁》(L’Echo du Japon, 일본의 소리, 1875~1882) 프랑스 신문의 책임자인 스테판 살라벨르(Stephane Pierre Salabelle, 1860~1902)는 1881년 11월 19일 이 신문사의 인쇄 설비와 한글 세트를 코스트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살라벨르는 《한불자전》, 《한어문전》 간행77) 때부터 인쇄 등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던 코스트 신부에게 신문사 인쇄설비와 한글 활자 세트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1881년 11월 19일부터 코스트 신부는 이 새로운 인쇄기계와 한글 5호 활자로 새롭게 한글 2호 활자와 한글 4호 활자의 개발을 준비하였다.78) 이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Le Courrier du Japon이 재정상의 이유로 1882년 1월 25일에 폐간되었다는 것에 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 쿠리에 뒤 쟈퐁》 신문사가 폐간하게 되면서 인쇄에 관련된 여러 기기 등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레코 뒤 쟈퐁》(L‘Echo du Japon)은 1885년에 《레코 뒤 상하이》(L’Echo du Shanghai)라는 이름으로 신문을 속간하였으나, 2년 후인 1886년 10월 20일을 기해 폐간하게 되었다.79) 다른 문헌에서는 레옹 레비는 1885년 2월 프랑스로 돌아가고, 살라벨르는 이듬해인 1886년 12월 18일 상해에서 《레코 뒤 상하이》(L’Echo du Shanghai, 상하이의 소리)라는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지만 단기간에 폐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볼 때, 1881년 가을 코스트 신부가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로의 이전을 전해 듣고 자기 회사의 인쇄기를 위임했다고 하는 부분은 살라벨르의 인쇄기도 이전했을 수도 있지만, 쿠리에 신문사의 인쇄기 역시 코스트 신부에게 이전시킨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제시해 본다. 왜냐하면 레비 인쇄소는 신문사가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였기 때문에 인쇄기를 처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코스트 신부가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6년 1월 18일, 서울)의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중략, 미동(Midong) 신부가 전하기를, 《일본의 소리》(Echo du Japon)80)의 편집주간 살라벨르(Salabelle)81) 씨가 사무실을 상해로 옮길 것 같다고 하였고, 여기에 그에게 보내는 서한을 동봉한다. 그의 주소를 모르니 마르티네 신부가 전해주길 바란다. 나는 서한에서 그에게 우리 회계를 이전에는 그가 미동 신부와 같이 했듯이 이제는 르모니에 신부와 해결하라고 일렀다. 르모니에 신부는 그가 판매금으로 건네는 금액을 받고, 관련 서류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만 하면 된다.”82)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살라벨르와 코스트 신부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특히 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1888년 3월 18일 자 서한에서, “요코하마에 우리[조선포교지]가 갖고 있는 재산을 써야 할 것 같다.”83)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쇄소는 철수하였으나 조선포교지의 재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시기에 앞서 1884년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에 나자렛 인쇄소를 설립84)하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문서선교에 대하여 우리나라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4. 나가사키에서 코스트 신부의 활동85)

 

코스트 신부가 나가사키에 정착하여 조선대목구 경리부를 설치하고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만들었던 오우라[大浦] 천주당은 이미 리델 주교가 선정을 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86) 1881년 말 리델 주교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나가사키의 프티장 주교와 상의한 후, 나가사키에 조선대목구 대표부 설치에 합의를 보았다.87) 1881년 10월 5일 리델 주교는 나가사키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홍콩, 상해, 싱가포르88)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가기 이전에 이미 이곳을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오우라 천주당89)에는 오우라 천주당과 라틴신학교[羅典神學校], 그리고 주교관을 갖추고 있었다. 드 로 신부는 1873년 2월에 기리시당이 해금(解禁)되자,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의 본당 신부와 인쇄사업에 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오우라 천주당 우측의 목재 양옥은 1875년 드 로 신부의 설계로 완성된 라틴신학교이다. 이 라틴신학교는 일본인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신학교로 붉은 벽돌과 목재 골조를 사용해 지상 3층[1층은 병원, 생리, 위생, 과학 교실, 2층은 교실 및 교사 신부님 집무실, 3층 숙소]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하 1층[주교관 및 신부숙소 건물에서 보면 지하 1층이 아닌 같은 지상 1층의 형태로 되어 있다. 즉 이 건물은 비탈진 곳에 세워진 건물로서 위쪽에서 보면 지하이고, 주교관에서 보면 1층의 형태를 띠고 있다.]90)에서는 인쇄를 담당하였다. 오우라 천주당의 인쇄시설은 프티장 신부와 함께 1866년 4월 19일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출발한 드 로 신부가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오우라 천주당에 석판인쇄소(石版印刷所)가 설립되게 되었다.91) 특히 조선대목구 대표부가 이곳 지하 1층으로 이전해 온 후로는 조선대목구 대표부 사무실과 인쇄소로 사용되었고,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1881년 가을 나가사키의 코스트 신부는 조선 신학생 4명을 오우라 천주교 성당 안에 설립된 라틴신학교[羅典神學校]에 넣어서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인 초대 주임사제 베르나르 프티장(Bernard Thadée Petitjean, 1829~1884)에게 라틴어를 배우도록 했다.92) 이곳에서 1년간 라틴어 학습을 받은 신학생들은 1882년에 페낭 신학교로 보내지게 되었다.93)

 

코스트 신부는 1881년 11월 19일부터 새로운 인쇄기계와 한글 5호 활자, 새롭게 개발한 한글 2호 활자, 한글 4호 활자를 준비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에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설립하여 회계 및 인쇄감독을 겸임하게 되었다.94) 1881년 11월 21일에 나가사키 조선대목구 최초의 인쇄소 시설 설치와 인쇄소(1881. 11~1885. 11)에 일명 ‘성서활판소’가 가동되었다.95)

 

1884년 6월 제7대 조선대목구장 자리에 오른 블랑 주교는 나가사키 조선대목구 인쇄소96)에 조선인쇄 기술자 3명(이승호, 문 필립보97), ‘조선의 청년’)과 목활자(대자 1,461개, 소자 1,201개)를 보냈다. 이렇게 조선대목구에서는 출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98) 그러나 제본은 도쿄에서 하고 있었다. 한글 자모를 추가로 만들어 《셩찰긔략》, 《회죄직지》를 출간하였다.

 

나가사키의 활판소를 조선 내로 옮기는 것에 대해 블랑 주교는 리델 주교에게 의견을 묻는 한편, 경비 면에서 이제는 조선에서의 인쇄소 설립이 필요한 때란 것을 언급하고 있다.99) 나가사키의 인쇄소는 1882년 11월 6일 이미 가동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0) 나가사키에서 인쇄된 서적의 간행 목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대략 12권이 인쇄101)되었는데 1886년에 인쇄된 《성상경》은 시기별로 보면 정동으로 이전한 때로 볼 수 있으나, 1885년 11월에 인쇄소의 일부가 정동으로 이전되었으나 《성상경》은 나가사키에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102) 이로써 코스트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1881년부터 1885년까지 4년간 소임을 다 하였던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5. 코스트 신부의 정동 및 종현에서의 활동103)

 

코스트 신부는 1885년 10월경 블랑 주교로부터 나사사키 조선대목구 경리부 폐쇄와 인쇄소의 조선 이전 명령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별일 없다면 3주 후에 출발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104) 코스트 신부의 조선입국 및 입국 초기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85년 말에 평신도 차림으로 일본 증기선105)에 올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낮 동안에는 돌아다닐 수 없었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당시 조선대목구장이던] 블랑 주교의 거처에 잠입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성무활동은 밤에 행해졌고, 혹 낮 동안 임종대세를 주어야 하는 경우에는 상복 차림으로 다녔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신부들의 상황은 조금 나아져 수단을 입고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조선 교회의 ‘부활’이었다.”106) 1885년 11월 1일 주교의 지시에 따라 활자와 인쇄시설을 조선으로 이전하게 되었다.107) 나가사키의 조선대목구 대표부 폐쇄와 인쇄소 이전 명령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조선이 대외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제약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좋아졌으므로, 굳이 일본에서 인쇄를 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둘째로는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나가사키에서 출판한 서적은 당연히 가격이 상당히 비싸므로 신자들이 구매해 보기란 쉽지 않았다. 활판 인쇄를 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수의 사람이 혜택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조선 내에서 출판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나가사키의 조선 대표부와 인쇄소의 폐쇄를 명령한 것이다. 인쇄 기자재의 이동은 나가사키에서 제물포항으로 들여오는 것이었는데, 인쇄 기자재 등 상자 50개와 신자 1명이 제물포항에서 억류되는 사건이 발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를 통해 당시 외무협판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G. Mölendorff, 1847~1901)의 도움으로 1885년 11월 15일에 물품이 통관되고, 억류된 사람도 풀려나게 되었다. 11월 8일에 코스트 신부는 이미 서울에 도착하여 현재의 이화여고 맞은편에 있던 프와넬 신부의 거처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자리를 잡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도움으로 코스트 신부와 프와넬(V.L. Poisnel, 朴道行) 신부가 2년간 거주하게 되었다.

 

코스트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3세였다. 지방으로 사목방문을 하러 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의 건강으로는 조선인들의 일상인 궁핍한 생활을 오래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서울에서 대단히 유용하고도 필요하게 쓰일 학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선종한 리델 주교의 뒤를 이은 블랑 주교는 코스트 신부를 그의 곁에 두었고, 1886년에 그를 보좌주교(provicaire, 계승권이 없는 주교)로 임명하였다.

 

한불조약 체결 결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서울과 개항 항구에서 체류하고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권리, 국내 어디든지 자유롭게 여행할 권리 등이 주어졌다. 조선 천주교회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동안 숨어 지냈던 교회는 이제 교회 활동에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교회, 경당, 주교관, 사제관, 신학교, 경리부, 고아원, 학교 등 … 코스트 신부의 인쇄에 관한 열정은 건축에서도 볼 수 있다. 코스트 신부는 10년 동안 교회의 주요 건물 건축의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인쇄소 건물을 건축하였다. 그는 조선으로 입국한 이후 30여 종의 조선어 교리서를 출간했으며, 그중 몇몇 책은 쇄를 거듭하며 수천 권을 찍어냈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블랑 주교는 1886년 연말보고서에서 “코스트 신부는 나가사키에 설치한 활판 인쇄시설[요코하마의 레비 인쇄소에서 옮겨 와 설치한 활판 인쇄기]들을 조선 정동(지금의 이화여고 앞)으로 옮겨 와 성서활판소를 차리고 일본에서 시작했던 인쇄 일들을 조선에서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887년에는 목판본 《셩모셩월》, 《셩요셉셩월》, 《쥬교요지》, 《텬쥬셩교예규》 등을 활판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108)

 

인쇄소는 당시 당가(경리) 책임을 맡으면서 정동(貞洞)에 살던 프와넬 신부의 집 다른 채에 두게 되었다. 그때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대, 중, 소의 세 가지 한글 활자는 일찍이 순교한 최지혁(최선일, 요한)의 글씨를 본떠 만든 것으로서, 이후 여러 출판소에서 쓰게 된 최초의 근대식 한글 활자이다.

 

코스트 신부와 프와넬 신부의 거처 자리에 대한 언급은 주로 많은 문서에서 정동 이화학교 맞은편에 있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사(修女會社)에서의 언급이다.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주교 성성식 때에 그곳에 있던 “성 바오로 수녀원”을 참관한 적이 있던 것을 계기로, 블랑 주교는 이 수녀회의 본부인 샬트르(Chartres)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들에게 한국의 고아원과 양로원 운영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수녀회 수녀들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코스트 신부와 프와넬 신부가 정동으로 떠나면서 그곳에서 수녀들이 거주하였다109)고 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인쇄소 자리가 현재의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이 있는 자리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료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의 역사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프와넬 신부의 정동 거처인 정동 15-5번지, 구러시아 공사관 아래쪽 언더우드 집 맞은편으로 현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첫 집 자리 비석110) 부근이었다고 말한다. 이와는 다르게 정동 17번지라고도 주장하고 있다.111) 정동 17번지는 현재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있는 자리로 당시는 황제 소유의 국유지였으나, 파리 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와 프와넬 박 신부가 2년간 거주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인쇄소 시설(1887. 11에 종현으로 이주)이 갖추어져 있었다.112) 앞의 두 주장은 위치상 같은 지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수녀원 첫 집 비석 부근에서 더 프란치스코 회관 쪽으로 내려왔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김정신 교수의 논문에서는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약간은 공사관 쪽으로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양쪽에서 주장하는 장소는 거의 일치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전거를 근거로 들 수 있다. “수녀들의 첫 거주지는 조선대목구에서 주선해 놓은 서울 정동의 임시 거주처였다. 이 집은 7~80간(間)에 이르는 비교적 규모가 큰 민가를 개조한 것으로 수녀들이 오기 전에는 프와넬 신부가 거주하고 있었다.”113)고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볼 때, 프와넬 신부의 거처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의 두 장소를 아우를 수 있는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코스트 신부는 1887년 11월 종현[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 인쇄소 건물을 짓고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 거처가 인쇄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 인쇄된 서적으로는 1886년 6월 1일 한불조약의 체결로 인해 부분적인 포교의 자유를 얻은 후 조약문에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해에 《셩교요리문답》, 목판본 《셩샹경》이 출간되었다.

 

종현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은 인쇄소 건물이었다. 그러나 1888년 12월 15일에는 명동(옛 주교관 북쪽)의 2층 목조건물로 ‘성서활판소’를 이전했다.114) 이 건물이 세워지면서 정동에 있던 활판소가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이곳은 종현성당이 건립되기 전까지 임시 성당 겸 사제들의 숙소가 되었다. 주교관 건물과 종현성당의 건립에 앞서 가장 먼저 인쇄소 건물을 세운 의미는 리델 주교와 블랑 주교가 인쇄소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경 및 교리서의 인쇄가 조선 선교에 가장 중요한 일임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코스트 신부는 1889년에는 자신의 설계로 2층의 주교관 겸 경리부 건물(현 사도회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명동성당 정지작업 사진에서 주교관이 이미 건립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15) 이어 블랑 주교가 장티푸스로 인해 1890년 2월 21일 사망하게 되자, 새 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코스트 신부가 보좌주교 직분으로 대목구장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1889년 최초의 1호 활자를 사용한 《교화황륜음》을 시작으로 1890년 《성찰기략》(3판), 1891년에는 《권중회개》(2판), 《예수행적》(2판), 《상제진리》(2판), 《훈아진언》(2판)과 1892년에는 《성경도설》(2판), 《셩경직해》(2판)116)를 비롯하여 교리서, 신심서, 묵상서, 성인전, 전례서 등 신앙 자유기의 교회 서적들을 출간하였으며, 1895년에는 《치명일긔》, 1897년에는 《일과졀요》117)가 출간되었다. 이후 꾸준히 교회서적이 간행되었다.118)

 

1892년 당시 종현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프와넬 신부가 전하는 1892년의 상황을 보면, 성당이 완공되지 않아 신자들은 1888년에 건립된 인쇄소 건물119)을 임시 성당으로 삼아 미사를 봉헌했고,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 수에 비해 장소가 비좁아서 신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종현 인쇄소 건물은 어디에 있었는가? 인쇄소 건물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찾기란 그리 녹록치 않다. 1921년 《경향잡지》에 크렘프(H.J-M. Krempff, 慶元善, 1882~1946) 신부가 서울에 상경하여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설립의 필요성과 진행상황을 알리면서 기부금을 요청한다는 글을 기고하였고, 1922년 5월 중순 이를 통해 크렘프 신부가 모은 5,000여 원으로는 기숙사 건물을 신축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건축을 신축하는 대신 성당 내에 있던 활판소와 잡지사의 지붕을 헐고 그 위에 한 층을 증축하여 기숙사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활판소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1922년 11월 1일에 뮈텔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여, 성가기숙사라고 명명하였다.120) 그럼 성가기숙사 건물은 현재의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가? 현재로 보면 파밀리아 채플이 있는 자리이고,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공터였던 곳이었다.

 

 

6. 결론

 

한국 천주교 활판 인쇄와 인쇄 장소에 관한 연구 - 코스트 신부의 인쇄 ·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상으로 볼 때, 코스트 신부와 한국천주교 인쇄 출판의 역사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스트 신부는 요코하마에서 또 나가사키에서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동과 종현에서 훌륭하고 충실하게 인쇄 및 출판 업무를 수행해내었다. 이러한 코스트 신부의 활동을 토대로 다음의 내용을 도출할 수 있었다.

 

먼저 요코하마로의 인쇄 장소 이전은, 한마디로 코스트 신부가 원하던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그곳으로의 이전은 당연한 것이었다. 요코하마는 리델 주교의 명령에 의해 코스트 신부가 《한불자전》을 편찬할 곳을 수소문해 찾은 곳이며, 한국 최초의 활판 인쇄로 된 간행물이 발간된 장소는 요코하마 야마테[山手] 183번(番)에 위치한 《레코 뒤 쟈퐁》 신문사의 인쇄소라는 것이다. 아울러 《한불자전》은 ‘한글, 로마자, 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가로 혼식조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최초의 절충형 활자인 사각틀 활자의 분합 활자를 제작해서 상용했다.’121)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좌측부터 읽는 최초의 가로쓰기 인쇄인 《한불자전》이 출판된 1880년 12월 11일은 한국 활판 인쇄 역사의 기념비적인 날임에 틀림없다.122)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비록 프랑스 시 레비 인쇄소에서 인쇄되고 출간되었지만, 우리 스스로 그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빛은 퇴색될 것이다.123)

 

뿐만 아니라 역시 요코하마에서 활판으로 인쇄 출간된 《한어문전》과 《천주성교공과》의 재평가 부분이다. 《한어문전》은 외국어 어법 형태에 맞게 저술된 최초의 한국어 문법 서적으로 서양인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쇄 장소는 《한불자전》과는 다른 소유주인 레옹 레비 및 살라벨르 인쇄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주성교공과》에는 또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앞의 두 책은 외국인 소유의 인쇄소에서 인쇄가 되었지만, 이 책은 코스트 신부가 구입한 활판 인쇄기에 의해 예수성심당 지하에서 인쇄가 되었다는 것이다. 《레코 뒤 쟈퐁》 신문사에서의 인쇄기 구입 등이 이러한 것을 객관화시키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책은 선교사들이 한글을 학습하기 위한 서적이라고 한다면, 이 《천주성교공과》는 당시 조선시대의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기도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교회 안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도서로 활용되었으므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대로 된 교리서가 없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시행했던 나라에서 요코하마에서의 《천주성교공과》의 활판 인쇄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이러한 활판본 출간은 기존 목판 인쇄본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블랑 주교도 인정하고 있다. 제본 자체의 아름다움과 눈으로 보기 편한 편리함 등은 활판본 《천주성교공과》가 갖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이 되는 기도서로서 목판본에서 활판본으로의 출판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전통을 가진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나가사키로의 이전과 그곳에서의 인쇄 특징을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사키로의 이전은 인쇄소를 가동할 수 있다는 장점과 신학생을 교육할 신학교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으로의 입국에 나가사키가 요코하마보다는 더 편리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틴신학교 교육은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한불수교로 인해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게 됨으로써 인쇄소를 나가사키에 둘 의미가 없어지게 되어 정동으로 이전하게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넷째로는 정동 인쇄소의 위치와 인쇄소가 있었던 기간에 대한 고증이었다. 인쇄소의 위치는 정동 이화여중 맞은편에 있던 프와넬(Poisonel) 박 신부의 집 별채를 인쇄소로 활용하였다고 많은 곳에서 언급했으나, 그 위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인쇄소는 정동 구 러시아공사관 자리 공원에 세운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 첫 집 장소 기념 비석이 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더 이화여중 쪽(현재는 도로임)에서부터 현재의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이 있는 자리까지의 범위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이유는 프와넬 박 신부가 거처했던 집이 70~80간이나 되는 상당히 큰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쇄소로 활용했던 시기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이 프와넬 박 신부 집을 숙소로 사용하기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종현에 인쇄소 건물을 짓고 종현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다섯째로는 종현에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은 인쇄소 건물이었다는 것과 종현성당을 짓기 이전에도 이 인쇄소 건물에서 신부들이 거주하고, 미사도 집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에는 2층의 성가기숙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는 것과 주교관 건물이 완성된 후에는 주교관 건물 2층 북측 건물로 인쇄소가 이전하였다는 것, 그 후에는 사도회관 건물로 이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종현에 최초로 인쇄소가 있던 자리는 현재 파밀리아 채플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우리는 《한불자전》과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과 《천주성교공과》의 새로운 가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상해에 있던 상해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의 위치를 확인하였고, 그다음으로는 요코하마와 나가사키의 인쇄소 위치와 정동, 종현의 인쇄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불자전》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코스트 신부 개인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 있지 않으므로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124) 이러한 연구가 종합될 때, 코스트 신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코스트 신부는 종현성당 건축과 인쇄 업무에 매진하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896년 2월 28일 오후 5시 45분에 사망하였다.125) 코스트 신부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며 조선포교지의 큰 손실이라고 말한 드비즈(Emilius Devise, 成一論) 신부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대성당 건축은 누가 끝마치고 또 인쇄일은 누가 맡아야 합니까?”126)

 

 

참고 문헌

 

1. 1차 사료 및 사료성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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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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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항기 조선대목구 인쇄소 연구〉, 《신학과사상》 57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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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터넷 자료

 

http://archives.mepasie.org/fr/notices/notices-biographiques/coste-1[회원번호 987] COSTE, Eugène-Jean-Georges.

http://auction.artron.net/paimai-art0041400453

https://en.wikipedia.org/wiki/Pacific_Mail_Steamship_Company

http://jpnships.g.dgdg.jp/meiji01_kaigaikoro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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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archives.mepasie.org/fr/notices/notices-biographiques/coste-1[회원번호 987] COSTE, Eugène-Jean-Georges.

 

2) 1891년에 대지 매입, 1892년 9월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 성당인 현 중림동 성당을 설계, 완성시켰다.

 

3)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아 진행하다가 1896년 코스트 신부 선종 후에는 프와넬 신부가 본당을 맡아 보면서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1898년 5월 29일 축성식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봉헌되었다.

 

4) 준공된 지 62년 만인 2002년 3월에 구 문화관과 성물판매소가 있던 옆 건물을 고쳐 명동성당을 건축한 코스트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문화관 내에 코스트 홀을 건립하고, 건물 앞 벽면에 “꼬스트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자 주.

 

5) 약현성당 100주년사 편찬위원회, 《약현본당 백년사(1891~1991)》, 가톨릭출판사, 1992, 131쪽.

 

6) 파리 외방전교회([프]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영]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巴黎外邦傳敎會)는 1658년 7월 29일 창설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1년 9월 9일 자 소칙서로 조선을 대목구로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 1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8787~8788쪽 참조.

 

7)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홍시, 2015, 272쪽.

 

8) Grammaire Coréenne에 대해 한글 제목은 표지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하권), 234쪽 등에서 《한어문전》이라 표기한 것과 같이, 이곳에서도 《한어문전》으로 표기하겠다.

 

9) {ff.29~32(*F) : Lettre de Mgr Ridel à M. Dallet[리델 주교가 달레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5년 5월 12일, 차쿠 성모설지전)](원본)}.

 

10) 차구(岔溝)는 중국 요동(遼東)반도 남부의 장하(莊河)가에 있던 교우촌으로 만주교구 관할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사목했었는데, 흰 눈이 덮인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눈의 성모마을(Notre-Dame des Neiges, 일명 聖母雪地殿)로 불렸다. 의주(義州)에서 300여 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1866년 병인(丙寅)박해 이후 조선 전교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여, 조선에 잠입하려는 선교사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조선어와 조선 풍습을 익혔고, 최지혁(崔智爀) 등과 같은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자주 왕래했었던 곳이다. 이 차구(岔溝)는 중국어 발음을 따라 “차구” 또는 “챠쿠” 등으로 불렀는데, “岔溝”의 한국어 독음으로의 표기는 ‘차구’이고, 중국어 한어병음식의 표기로는 “chakou”로 표기하므로, 현재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표기법에 의하면 “차커우”라 표기하는 것이 옳은 표기법이다. 그러므로 이후 한글 표기에서는 한자독음인 “차구”(岔溝)나 중국어 표기법인 “차커우”(岔溝)로 통일한다. 필자 주 ; “만주의 차구(岔溝, 성모설지전)는 전체가 교우들인 작은 마을로 약 30호 정도가 살고, 수암(秀巖)군에 속해 있으며, 장하(莊河)의 작은 포구 서쪽 약 80리(중국단위로 1리가 500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뮈텔의 편지〉 서울 1930년 4월 16일 자, 김정환, 《뮈텔 일기 연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5, 213쪽.

 

11) 이러한 방면의 연구 성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샤를르 달레 저, 안응열, 최석우 등 역, 《한국천주교회사》 상 · 중 · 하, 분도출판사, 1979 ; 李炳泳, 〈木版本을 中心으로 한 天主聖敎功課小考〉,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1, 1979, 289~321쪽 ; 柳洪烈, 《한국천주교회사》 상 · 하, 가톨릭출판사, 2004 ; 장동하, 〈가톨릭출판사 설립 기원에 관한 연구〉, 《가톨릭출판문화의 어제와 오늘》, 가톨릭출판사, 2006 ; 장동하, 〈개항기 조선대목구 인쇄소 연구〉, 《신학과 사상》 57,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 이은령 외 저,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엮음, 《한불자전 연구》, 소명출판, 2013 ; 파리 외방전교회 등 저, 이은령 등 역, 《현대 한국어로 보는 한불자전》, 소명출판, 2014 ; 류현국, 《한글활자의 탄생》, 홍시, 2015 ; 류현국, 《한글 활자의 은하계(1945~2010)》, 윤디자인그룹, 2017 등.

 

12) A-MEP Vol.580(A) Corée 1875~1886, 580(B) 1875~1886, Corée, 581(A) 1887~1900, Corée, 581(B)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참조.

 

13) http://archives.mepasie.org/fr/notices/notices-biographiques/coste-1[회원번호 987] COSTE, Eugène-Jean-Georges.

 

14) ff. 1371~1406(*F) : Notice Nécrologique de M. Coste, A-MEP Vol.581(B)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315쪽 ;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85년사 편찬위원회 편, 《바오로 뜰안의 哀歡 85年》, 가톨릭출판사, 1973, 196쪽.

 

15)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사무소의 위치는 上海市 徐滙區 太原路 50號에 있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삼덕당(三德堂)이라고 불렸다. 1872년(동치 11년)에 이곳 상해로 와서 사무소를 설립하였다(최초에는 프랑스 조계의 외탄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上海市宗敎志》 巴黎外邦傳敎會辦事處 참조 ; 사진은 2014년 가을 北京泰和嘉成拍卖有限公司에서 북경에서 거행한 2014년 가을 예술품 경매에 경매품으로 나왔던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대표부인 삼덕당(三德堂)의 사진이다. 진귀한 자료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이 기회에 게재한다.

출처 : http://auction.artron.net/paimai-art0041400453 재인용한 것으로 위치는 외탄 프랑스 조계 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상해에 있던 초기 파리 외방전교회 사무실의 건물이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는 上海市 徐滙區 太原路 50號로 이전하였다.

 

16) 조선에서는 여권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그 문제로 지체될 일은 없다고 하면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성과 별도로 조선에서는 새로운 성을 쓰게 될 것이라고 하며 코스트 신부에게는 페레올 주교의 성을 따라 고(高)씨 성을, 드게트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을 따라 최씨의 성을 갖게 될 것이니 동봉하는 작은 쪽지를 살펴보라고 하고 있다. 아울러 코스트 신부에게 조선어에 대한 학습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코스트 신부에게 많은 저서를 보내긴 하나 초기 단계에서는 선생에게 배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한자를 배우고, 차구에서 기초를 가르칠 선생을 찾으면 차구로 오면 된다고 하고 있다. ff. 65~68(*F) : Lettre de Mgr Ridel à M.Coste[리델 주교가 코스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6년 4월 9일, 차쿠)](원본) A-MEP Vol 580(A)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집, 2011, 53쪽.

 

17) 장동하, 앞의 논문, 11쪽 ; 류현국, 앞의 책, 56쪽.

 

18) 1869년에 리델(Ridel, 李福明 ; 右捕盜廳謄錄 제27책, 796쪽에는 李復明이라고도 지칭하고 있음.) 주교는 최선일(崔善一, 智爀, 요한), 김여경(金汝經, 프란치스코), 권치문(權致文, 타대오) 3명 등과 함께 《한불자전》(韓佛字典)을 집필하고, 블랑 신부는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柳洪烈,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하, 2001, 233쪽.

 

19) ff.104~107(*F) : Lettre de Mgr Ridel à M. Coste[리델 주교가 코스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6년 5월 16일, 차쿠)] (원본) A-MEP Vol 580(A)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집, 2011, 81쪽.

 

20) ff.112~115(*F) : Lettre de Mgr Ridel à M. Coste[리델 주교가 코스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6년 6월 5일, 체푸)] (원본) A-MEP Vol 580(A)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집, 2011, 86쪽. 이곳에서 원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활판 인쇄를 언급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 코스트 신부가 차구 성모설지전까지 도착하는 여정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876년 9월 5일 상해를 떠나 8일 지푸(芝罘 ; 현재의 煙臺를 지칭함.)에 도착했고, 지푸에서 산동 포교지의 당가 신부의 미진한 환대를 받았다. 중략, 10월 12일 지푸를 떠나 13일 잉체(현재의 營口)에 도착하여 베롤 주교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10월 17일 다시 말을 타고 짐은 수레에 싣고서 (차구)의 성모설지전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양관에서 두 사람을 마중 나온 리샤르 신부와 이나르 신부(양관의 주임 신부)를 만났고, 리샤르 신부와 함께 19일 또다시 말을 타고 만주의 산들을 지나 마침내 성모설지전에 도착했다. 코스트 신부는 차구에서 지낸 지도 여드레가 지났고, 이제 이곳에서 머물며 지내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지만(조선포교지 소속 선교사들에게) 약속의 땅은 아니기에, 약속의 땅 조선에 언제쯤 들어갈 수 있을지 그날이 하루속히 앞당겨지기를 고대한다.” ff.167~170(*F):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6년 10월 28일, 차쿠)](원본), A-MEP Vol. 580(A)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집, 2011, 129쪽. 상해를 출발하여 약 42일 만에 차구 성모설지전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다.

 

22) http://archives.mepasie.org/fr/notices/notices-biographiques/coste-1[회원번호 987] COSTE, Eugène-Jean-Georges.

 

23) 조선 교우들이란 최선일(崔善一, 智爀, 요한), 김여경(金汝經, 프란치스코), 권치문(權致文, 타대오)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1871년 12월 2일자의 리델 주교의 서신에서는 최선일 요한의 글씨를 동봉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최선일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이 최선일은 《한불자전》의 한글 글자체인 한글 5도 활자체의 원도로 작용한 글씨를 쓴 인물로 인쇄 출판계에서는 최지혁체로 더 잘 알려진 최지혁과는 동일인물이다. 《右捕盜廳謄錄》 第二十七冊, 796쪽에서는 崔智爀으로, 1905년판 《치명일긔》 三百四十에서는 최 요안 션일 회쟝이라고 지칭하고 있고, 《병인치명사적》 24, 64쪽에서는 최 요안 션일 회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 후일 《한불자전》의 한글 활자체의 모형이 되는 최지혁의 글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편, 《기억 그리고 기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189쪽.

 

24) NOTICE NÉCROLOGIEQUE sur le PÈRE COSTE, Gustave FIRMIN et MONTANE 출판사, MONTPELLIER, 1896, p. 18.

 

25) 리델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대표부인 삼덕당(三德堂)에 있을 때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하고 있던 양경빈(洋涇浜) 천주당(예수회의 성 요셉 성당)과 서가회 천주당이 이웃해 있었으므로 자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봉교자술〉,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244쪽. 여기 내용에서 “차꾸 삼덕당(三德堂)”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문맥상 이곳에서 “차꾸”라는 말은 잘못 붙인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가 살펴본 〈奉敎自述〉 한문본(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에는 “過陽子江午後二時般忽抵岸淸國鐸德三位出待迎接各乘小車入三德堂”이라 하여 어느 곳에도 “챠꾸”라는 말이 나오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에 “챠꾸”를 덧붙인 것은 한글번역본의 오기이다. 또 삼덕당 성당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삼덕당은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의 다른 명칭일 뿐, 그곳에 성당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삼덕당 성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원본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므로 삼덕당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이렇듯이 〈봉교자술〉 한글본을 자료로 활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오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봉교자술〉,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244~245쪽의 부분만 보더라도 간단한 내용으로 김은률(金恩律)은 김은진(金恩津)의 오기이며, 강희원년(康熙元年)은 동치원년(同治元年)이며, 각주 43의 1662년은 1862년이 맞으므로 여기서 바로 잡는다.

 

26) 코스트 신부의 요코하마에서의 기간은 1878년 4월 25일부터 1881년 11월 20일까지였으며, 1881년 5월 21일에는 활판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27) 柳洪烈, 《한국천주교회사》 하, 234쪽.

 

28) 미화서관은 1844년 마카오에서 시작하여 1854년 영파(寧波)로 이전, 1860년 상해에 설립되었다. 중국의 근대 인쇄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최초로 활자 모형(母型)을 공급하고 인쇄소를 개설하여 많은 중국인 기술자를 양성하였으나, 1931년 12월 31일에 폐쇄되었다. 宮坂彌代生, 〈東洋におけるプロテスタント傳道と印刷-美華書館(アメリカ長老會印刷所)を中心に徐〉, 《中國》 28, 2007. 12, 179~191쪽 ; 납활자의 인쇄술은 아일랜드의 미국 개신교 선교사인 갬블(William Gamble, 姜別利, ? ~1886)에 의해서 나타났는데, 갬블은 상해 미국 북장로회 인쇄소인 상해미화서관(上海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Shanghai) 관장으로 취임하여 ‘전태모형 활자 제작법을 발명’하였는데, 그 방법은 아주 정교하게 목각에 양각으로 문자로 새긴 후 납을 부어 글자를 만들었다. 글자를 작게 만들 수 있었고, 자체가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미화체”(美華體)라고도 불렸다. G․麥金托什, 〈美國長老會書館(美華書館)記事〉, 《出版史料》, 1984. 4 ; “1879년 상해 미국 북장로회 인쇄소 상해미화서관(上海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Shanghai)에서 발행한 《중국보고서》 10, 77쪽.

 

29) 예수회 선교사들은 토산만에 인쇄기를 들여와 인쇄업을 시작하였는데, 토산만 인쇄서관은 일찍이 비싼 값으로 출판되었던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인 조톨리(Angelo Zottoli, 晁德莅) 신부의 거작 《중국문학과정》(中國文學課程, Cursus Litterature Sinicae)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였고, 또 다른 저작인 《라틴문법》(辣丁文規, Emmanuclis Alvarez Institution Grammatica) 역시 토산만 인서관에서 출판되어 수도원 수사들의 학습용으로 활용되었다.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下), 北京: 中華書局, 1988, 260~262쪽.

 

30) 코스트 신부와 오주프 주교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8년 동안 오주푸 주교의 지도 아래 홍콩대표부의 부대표(sous-procureur)를 맡았으므로 오주푸 주교와는 아주 잘 알고 있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ff.1371~1406(*F):Notice nécrologique de M.Coste[프와넬 신부가 작성한 코스트 신부의 부고(1896년)](원본, A-MEP Vol.581(B),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315쪽.

 

31) “일본의 오주프 주교로부터 요코하마에서 조선어 문법서(조선어-불어) 사전의 인쇄가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자, 차쿠에 있는 조선 포교지 소속 신부들이 코스트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코스트 신부는 지금 일본으로 가는 길에 상해에 도착하여 서한을 보내게 되었다. 어제(1878년 8월 3일) 상해에 도착하였고, 앞으로 홍콩으로 가서 일본행 배를 탈 계획이다.” ff.392~394(*F) :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8년 8월 4일, 상해)](원본, A-MEP Vol.(580A), 306쪽.

 

32) 1859년 9월 琉球에서 기회를 엿보던 지라르(GIRARD, 彌ラ徐ル) 신부는 프랑스 총영사 구스타프 베르구르(Gustave Duchesne DE Bellecourt)의 통역겸 사제로 에도(江戶)에 도착한 후 에도에서 가나가와(神奈川)현을 왕래하면서 교회를 건립할 곳을 물색하였으며, 거류지 80번(番)에 예수성심당을 건립하게 된다. 中島昭子, 《テストヴィド神父書簡集》, 東京: ドン·ボスコ社, 2017, 19~20쪽 ; 현재의 주소는 橫浜中區山下町80番이다. 《橫浜もののはじめ考》, 1988, 211쪽. 현재 주소지에는 요코하마 성심성당 건립 100주년인 1962년에 예수성심 동상이 건립되었다. 동상 아래에는 “橫浜天主堂跡”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천주당의 모습과 거류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볼 수 있고, 성당이 개축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カトリク山手敎會, 《聖心聖堂百二十年史》 橫浜: カトリク山手敎會, 1982, 사진ⅱ, ⅹⅸ, 6쪽 ; 橫浜天主堂獻堂 · 日本再宣敎150周年記念誌編纂委員會, 《橫浜天主堂獻堂 · 日本再宣敎150周年記念誌 交わりとしての敎會をめざして》, 橫浜: カトリク橫浜司敎區, 2013, 40쪽 참조 ; 거류지의 메인스트리트로 60番에서 80番 부근의 모습으로 왼쪽에는 바이블 하우스와 인쇄소인 치산 브라더스(致生인쇄소)의 간판이 보인다. 《橫浜もののはじめ考》, 1988, 226쪽.

 

33) Prudence Séraphin Barthélémy GIRARD, (彌ラ徐ル, 1821~1867).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1845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48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55년에 스페인의 나바레(Navarre)에 상륙하였으며, 1857년에는 일본 대목구의 선교지구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1859년에 에도[江戶]에 상륙한 후 교회건립 장소를 물색하다 1862년에 요코하마[橫浜] 천주당을 건설하였으며, 나가사키[長崎], 하코다테[函館] 등에 재 선교 초기의 활동을 지휘했다. 1862년 한때 프랑스로 돌아가기도 하였으나 다시 돌아와 1867년 요코하마에서 서거함. 中島昭子, 《テストヴィド神父書簡集》, 東京 : ドン·ボスコ社 , 2017, 주19) 재인용 207쪽.

 

34) 요코하마 예수성심당은 1861년 12월 말에 완공되었고, 1862년 1월 12일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中島昭子, 같은 책, 20쪽 ; 스케치한 당시의 그림을 통해 거류지 80번(番)에 창건된 성심당 전경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坂垣博三, 《橫浜聖心堂創建史》, 東京, エンデルレ, 1987, 36~37쪽 ; 鳥居民, 《橫浜山手》, 東京, 草思社, 2009, 87~88쪽 ; 그러나 리델 주교와 코스트 신부가 요코하마의 예수성심당을 방문했을 때는 1862년에 건립한 성당이 아니었다. 코스트 신부는 1872년 대화재로 인해 새롭게 다시 개축한 성당(1874~1906년) 지하실을 사용했을 것이다. ; 류현국은 《한글 활자의 탄생》 122쪽에서 리델은 중국에서 《한불자전》의 원고를 가져와 요코하마 야마테[山手] 가톨릭교회(Yamate Catholic Church)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당시의 이 성당은 EGLISE DU SACRE-COEUR[聖心聖堂]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성심성당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야마테[山手] 성당은 1906년 야마테[山手] 44번(番)으로 이전하였으나, 지진재해로 인해 현재의 성당은 1933년 11월 23일에 다시 새롭게 지어 헌당식을 하였다. 坂垣博三, 앞의 책, 135~137쪽 ; 記念像除幕式(寫眞37~39) 《日本カトリク再建百年祭》, 1962 참조.

 

35) 中島昭子, 같은 책, 20쪽.

 

36) Marc Marie de ROTZ(ド徐ロ, 1840~1914)는 1862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186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968년에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한때는 요코하마의 예수성심당으로 이동하였으나 이후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와, 나가사키의 소토메(外海)에서 선교활동과 교육 · 사회사업에 종사하였다. 요코하마 거주 시기(1873~75)에는 예수성심당에서 교리서를 인쇄하였다. 中島昭子, 앞의 책, 210쪽.

 

37) 中島昭子, 앞의 책, 17쪽.

 

38) 필자 주. 1635년부터 1854년까지를 일본에서는 잠복 기리시당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잠복 기리시당 시기 이후의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의 시작이라는 것을 의미함.

 

39) 中島昭子, 앞의 책, 242쪽.

 

40) 프티장(Bernard Thadee Petitjean, プティ彌ャン, 1829~1884)은 1853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59년 선교회에 입회하였으며, 1862년 요코하마에 상륙한 후 1863년에는 나가사키로 파견되어 오우라[大浦] 천주당을 건립하였다. 1865년에 잠복 기리시당(キリシタン)의 〈信徒發見〉을 하게 되었다. 1866년 일본대목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871년에 요코하마에서 착좌하였다. 1876년에는 南緯代牧區長으로 大阪에 착좌하였다. 1880년에는 나가사키로 돌아가 그곳에서 서거하였다. 中島昭子, 앞의 책, 207쪽.

 

41) 1865년 2월 19일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中島昭子, 앞의 책, 20쪽 ; 오우라[大浦] 천주당은 프티장 신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함께 부임한 휴레(Louis Theodore FURET, フュレ, 1816~1900)와 함께 하였다. 中島昭子, 앞의 책, 207쪽.

 

42) 일본은 다음과 같은 기간을 거치면서 개항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체결,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체결, 1858년 10월 9일 프일수호통상조약체결이 있었고, 1859년 7월 1일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등 6개 도시(카나가와[神奈川], 요코하마[橫浜], 니카다[新潟], 효고[(兵庫], 고베[神戶], 나가사키[長崎], 하코다테[函館])가 개항되어 외국인의 거주와 외국인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인정하였다. 프랑스와는 1858년 10월 9일 수호통상조약 제4조에 〈日本に在ゐフラス人自國の宗旨を勝手に信仰い廳し、その居留の場所に宮社を建てるも妨げなし〉 등이 게재되어 있다. 《幕末維新外交史集成》 4, 468쪽 ; 中島昭子, 앞의 책, 19쪽.

 

43) 필자 주.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 회사의 선박이 1868년에는 4월 11일에는 뉴욕, 파나마, 샌프란시스코, 요코하마를 운항하였으며, 1868년 7월 3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콩까지의 운항을 시작하였으며, 1874년 12월 18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콩을 거쳐 요코하마까지를 운항하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Pacific_Mail_Steamship_Company 코스트 신부는 Pacipic Mail Steamship Company의 선박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44) 코스트 신부가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1878년 4월이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요코하마 상해를 운항하던 배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1875년(明治 7年)에 기선(汽船) 13척을 미츠비시 상회(이름은 三菱汽船商會)에 위탁하여 Pacific Mail Steamship에 대항할 목적으로 1875년 1월 18일부터 상해항로의 개시를 명령하였다. 미츠비시 상회는 東京丸, 新潟丸, 金川丸, 高砂丸의 4척을 요코하마/상해 간에 투입하여, 주 1회로 해외정기항로를 개설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Pacific Mail社의 요코하마/상해 노선을 매수하였다. 홍콩선은 1879년 10월 4일에 개통이 되었다. 2http://jpnships.g.dgdg.jp/meiji01_kaigaikoro01.htm.

 

45) 〈橫浜活版社閉社, 業務を新會社へ引き繼ぐ〉 (5月 16日),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 第二集(6年, 1873년), 昭和 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56쪽.

 

46) 〈인쇄용기구 판매 상사의 광고〉(11월 4일)라는 내용을 보면, “一印刊機械 アルビヲン, コルンビャン 一印墨, 一漆ワルニシ, 一鐵印棒, 一ワク類, 一其他印刊用諸具 위의 품목을 함께 매매합니다. 橫浜百八十番(요코하마 180번) 堀割脇 刊印機械輸入人(간인기계수입인) フランクリン(프링클린―社中)이라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다.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二集(6年, 1873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156, 157쪽; 〈인쇄기판매의 광고〉(12월 15일),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二集(6年, 1873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169쪽; 요코하마 本町 3町目에서 인쇄와 제본을 해왔던 인쇄회사인 「景諦社」가 도쿄에 점포 설립하였다는 광고 기사(12월 26일)가 게재됨.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二集(6年, 1873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178쪽.

 

47) 〈영자신문사에서 식자공 모집의 広告〉(6월 10일)로 “일본인 중에서 영어의 활자를 심을 수 있는 식자공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요코하마 저팬 메일[彌ャツパン‧メ徐ル]신문국에서 고용합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동 신문국에 신청하기 바랍니다. 橫浜海岸通 三拾二番 新聞局白”,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三集(7年, 1874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63쪽; 〈영자신문사, 활판기계 경매의 広告〉(8월 11일),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三集(7年, 1874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90~91쪽.

 

48) “〈活版インク,活字など販賣の広告〉(12月 3日) 一活版インク 類種, 一活字 同, 一表紙同裏紙右本國ヨリ取寄候ニ付格別下直ニ賣捌申候間御望之方者御來駕可被下候. 二拾八番 ウエト徐ル商會, 《『橫浜每日新聞』が語る明治の橫浜》第三集(7年, 1874년), 昭和62年(1987년), 橫浜開港資料館, 126쪽.

 

49)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84~185쪽.

 

50) 장동하, 앞의 논문 23쪽을 보면, 요코하마의 일본인들이 프랑스어 모형(母型)조각을 매우 난감해하였다는 것을 볼 때, 《한불자전》의 간행을 위해서는 한글 활자도 중요하였지만, 그보다 더 프랑스어 활자체의 확보가 더 중요하였으므로 요코하마를 인쇄 출간장소로 정한 이유가 될 것이다.

 

51) http://archives.mepasie.org/fr/notices/notices-biographiques/coste-1[회원번호 987] COSTE, Eugène-Jean-Georges.

 

52) Le P. Coste au P. Armbruster, Hongkong, le 17 April 1878, A-MEP, Vol.H-12, Lettre du P. Coste(Procureur de la Mission de Coree au Japon(1878~1885), f.1; 장동하, 〈가톨릭출판사 설립 기원에 관한 연구〉, 《가톨릭출판문화의 어제와 오늘》, 2006, 22쪽 주)47 재인용 ;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6쪽.

 

53) NOTICE NÉCROLOGIEQUE sur le PÈRE COSTE, Gustave FIRMIN et MONTANE 출판사, MONTPELLIER, 1896, p. 19.

 

54) 森 禮子, 《神父 ド・ロの冒險》, 東京, 敎文館, 2000, 223쪽.

 

55) 坂垣博三, 앞의 책, 137쪽 ; 미동 신부는 이후 주교로 승품되었다. 이후 코스트 신부는 미동 신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연구를 해 봐야 정확한 것을 파악할 수 있으나 미동 신부가 요코하마의 《레코 뒤 쟈퐁》 인쇄소의 상해 이전에 따른 판매대금에 대한 정산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코하마에 조선대목구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 주. ; ff.1366~369(*F): Lettre de M. Coste à M.Martinet, A-MEP. 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510쪽 참조.

 

56) 구 막부시대에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통역사에게서 제철과 서양식 항해술을 배운 활자제조자 모토미 쇼조(木本昌造,1824~1875)와 그의 제자 히라노 도미지(平野富二, 1846~1892)는 자본금 8만원과 사장 이하 임원 15명, 주주 20명, 남녀 직공 115명, 주조기계 15대, 인쇄기계 26대로 나가사키 신주쿠슈쵸활판제조소(長崎新塾出張活版製造所, 1871~1938)를 창업한 후 나가사키 활판소는 도쿄 간다[新田]에 히라노활판제조소(平野活版所,1872), 교토 텐린도활판소(點林堂活版所, 1872), 오사카활판제조소[大阪活版製造所]의 세 곳에 출장소를 두고 경영하였다. 이후 히라노 활판소는 1881년 사구마쵸로 이전하여 1883년부터는 쓰키지활판제조소[築地活版製造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활판제조소는 근대일본의 활판 인쇄 발전에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92쪽.

 

57)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18쪽 ; 코스트 신부는 사전 인쇄 작업 중 조선어 활자 주조 작업차 일본에 와 있으며, 프랑스에서 유럽어 새 활자판을 보내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교토에서 조선어 주형틀과 조선어 활자 주조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 작업이 프랑스에서 유럽어 활자판이 도착하기 전에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16페이지 정도 첫 인쇄 작업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모았고, 교정쇄를 수정하고 있다. [코스트 신부가 홍콩대표부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78년 12월 18일, 요코하마)](원본). ff.531~533(*F) : Lettre de M. Coste à M.Lemonnier, A-MEP Vol.580(A),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437쪽.

 

58) 이 신문사의 위치는 요코하마 야마테[山手] 183번(番)이라고 되어 있다. 류현국, 《한글활자의 탄생》, 122쪽.

 

59)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6쪽.

 

60) ff.784~786b(*F) : Lettre de M. Coste à M.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0년 3월 12일, 요코하마)](원본), 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26쪽에서는 3월 12일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18쪽에서는 그 날짜를 3월 21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3월 12일이 더 신빙성이 있으므로 본문의 날짜를 3월 12일로 기록하였다.

 

61) 《한불자전》은 겉표지 2쪽, 속표지 1쪽, 저작권표시면 1쪽, 서문 8쪽, 본문 615쪽, 부록Ⅰ 60쪽(부록 서문 4쪽 포함), 부록Ⅱ 23쪽(부록 서문 2쪽 포함), 추보 1쪽, 정오표 1쪽으로 총 713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이연, 〈19세기 조선 파견 가톨릭 선교사의 한국어 연구 흐름 일편 – 최초의 한 · 불 이개어사전과 문법서를 중심으로〉, 《한불자전연구》, 2013, 소명출판, 23~24쪽. ; 이곳에서 우리는 1879년 4월에 《한불자전》 인쇄를 시작하여 5월에 160페이지를 인쇄하고, 1880년 3월에 480쪽을 인쇄하는 데까지 약 10개월이 걸렸고, 《한불자전》을 출간한 1880년 12월 11일까지는 또 9개월이 걸렸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9개월이라는 시간은 인쇄에 필요한 시간뿐만 아니라 부록과 추보 및 정오표 등을 만들었던 것을 볼 때, 인쇄 후 교정과 제본을 위한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62)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18쪽.

 

63) “《한불자전》의 인쇄 작업이 마침내 끝이 났다. 다음 우편을 통해 리델 주교가 가장 먼저 헌사하기를 바란 홍콩 대표부에 그 사본을 보내겠다. 상해 대표부와 그 인근으로 보낼 사본들은(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직접 보내겠다. 리델 주교는 화재 등의 사고로부터 《한불자전》을 보호하고자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하기를 바라고 있다. 50부는 조선 포교지에서, 나머지 50부는 홍콩과 상해 대표부에서 각각 절반씩 나눠 보관하기를 바란다. ff.897~900(*F):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0년 12월 11일, 요코하마)](원본), 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01쪽.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불자전》의 인쇄를 마친 날은 1880년 12월 11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18쪽에서 《한불자전》의 간행일을 1880년 12월 12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12월 11일이 올바른 표기라고 판단한다.

 

64) “참고로 ‘혼식’(混植)이란 한글과 로마자 또는 2개 이상의 서체가 혼합된 판을 짜서 조판한 것을 나타내는 인쇄출판계 용어이다. 또한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같이 종류가 다른 것을 섞어 사용하는 것을 ‘혼용’(混用)이라 하고, ‘혼합’(混合)은 성질이 다른 것이 서로 섞이거나 섞여 있는 것을 나타낸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은하계 1945~2010》, 64쪽. 1880년 한글 다언어 사전인 《한불자전》은 “한글, 로마자, 한자로 이뤄진 최초의 가로 혼식조판으로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절충형 활자인 사각틀 활자와 분합활자를 제작해서 사용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은하계 1945~2010》, 63쪽. 이후, 1883년에 국내 최초 관영인쇄국인 박문국 설립과 동시에 도쿄츠키지 활판제조소에서 제작된 한자 활자 4호와 각종 인쇄설비, 활판, 주조 기술자 등을 초청하여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1820~1945)》, 홍시, 2015, 334~337, 437쪽 참조.

 

65) 1880년 12월 18일 요코하마에서 프랑스 신문사 《레코 뒤 쟈퐁》지에 8회나 게재된 《한불자전》 광고는 다국적기업인 세창양행 광고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선다. 이는 근대 활자인쇄사나 디자인사에서 누락된 부분으로서 국외에서 게재된 최초의 광고는 《한불자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류현국, 《한글활자의 탄생》, 187쪽.

 

66) 우리나라의 활판 인쇄의 시작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1883년 8월 박문국(博文局)에 인쇄기가 설치된 후 10월에 발행된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최초로 보고 있다. 필자 주.

 

67) 蛯原八郞, 《日本歐字新聞雜誌社》, 東京: 1980年版, 87쪽;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22쪽.

 

68)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22~123쪽; 《레코 뒤 쟈퐁》에서 발행한 신문 제3286호. 1880년 12월 13일 자 신문.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23쪽.

 

69) 이 신문사의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일본의 우편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

 

70) 蛯原八郞, 《日本歐字新聞雜誌社》, 87~91쪽.

 

71) 이는 서프 레비의 남동생이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27쪽.

 

72)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24쪽.

 

73) “요코하마에서 개발된 최지혁체 한글 5호 활자와 천주교 조선대목구가 나가사키로 이전한 후에 개발된 한글 2호 활자, 3호 활자, 4호 활자 그리고 서울 이전 후에 개발된 한글 1호 활자 자형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총 다섯 종류의 활자가 개발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나가사키 조선대목구 인쇄소에서 사용된 한글 2호, 3호, 4호 활자의 원도는 코스트 신부 밑에서 심부름을 하던 조선인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고, 세 종류의 서체는 동일인 원도로 도쿄츠키지활판제조소에서 만들어졌다. 1880년대 천주교 선교사들 주도로 제작된 교리서 등의 간행에는 모두 한글 활자만 세로쓰기 조판방식으로 사용되었고, 이 전통은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류현국, 《한글활자의 탄생》, 176~177쪽.

 

74) Grammaire Coréenne는 조선인 신자인 김여경(金汝經, 프란치스코), 최지혁(崔智爀, 요한), 권치문(權致文, 타대오) 등의 협력을 받아 리델 주교에 의해 탈고된 것이었다. 서설과 품사론, 구문론,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편, 《기억 그리고 기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177쪽 ; 인쇄 작업을 마친 Grammaire Coréenne가 담긴 소포를 보내야 할 곳의 상세 내역(제본책은 르모니에 신부 1부, 파트리아 신부 1부, 싱가포르 대표부 1부, 가제본 책은 페롱 신부 1부, 페낭신학교 1부, 보관용 7부 등 총 12부)을 전한다. 《한불자전》을 보낼 때보다 양이 많지 않은데, 이는 르모니에 신부가 전에 설명하고 코스트 신부가 동의한 이유(홍콩 대표부의 보관 시 문제가 있음) 때문이다. 주요 묶음들은 상해(대표부)에서 보관될 것이다. 문법서의 판매가격은 가제본은 6$이나 선교사들에게는 4$로 해도 무방하다. 문법서의 위탁과 광고는 르모니에 신부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 참고로 요코하마에서는 일주일 동안 영자신문 두 곳에 광고를 냈고, 인쇄업자가 Echo du Japon의 주간이라 매일 무료로 광고했다. ff.961~963b(*F) :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7월 15일, 요코하마)](원본), 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47쪽.

 

75)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6쪽.

 

76) 蛯原八郞, 《日本歐字新聞雜誌社》, 91쪽.

 

77) 《한불자전》과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의 인쇄소의 소유주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불자전》은 YOKOHAMA C. LÉVY, IMPRIMEUR-LIBRAIRE 1880(요코하마 서프 레비 인쇄-서점 1880)으로 되어 있고, Grammaire Coréenne(《한어문전》)은 YOKOHAMA IMPRIMERIE DE L. LÉVY ET S. SALABELLE(요코하마 레옹 레비 및 스테판 살라벨르 인쇄소 1881)로 되어 있어, 서프 레비 인쇄소에서 레옹 레비 및 스테판 살라벨르 인쇄소로 명명하게 된 것은 그 소유주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8)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3쪽.

 

79) 蛯原八郞, 《日本歐字新聞雜誌社》, 91쪽.

 

80) 원래의 명칭은 《레코 뒤 쟈퐁》(L‘Echo du Japon)이다. 필자 주.

 

81) 재미있는 것은 요코하마 인쇄소의 이 살라벨르 씨의 형제가 우리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공사[플랑시]가 옛 왕궁터에 궁궐을 지어달라는 고종의 부탁을 받고 서울로 불러들인 사람이다. 앞으로 그는 프랑스 공사관을 짓고 대성당(명동성당) 건축을 위해 블랑 주교의 뜻에 따라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의향을 보였다.”ff.267~272(*F):Lettre de M. Wilhelm à M. Lemonnier[빌렘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9년 3월 7일, 서울)](원본), A-MEP Vol 581(A)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217쪽.

 

82) ff.1366~369(*F) : Lettre de M. Coste à M.Martinet, A-MEP. 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510쪽.

 

83) ff.108~110.(*F) :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8년 3월 18일, 서울)](원본), A-MEP Vol.581(A),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97쪽.

 

84)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에서는 1884년에 나자렛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이 인서관(印書館)의 건물은 비록 홍콩에 있었으나, 목적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국의 수요를 공급해주는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으며, 그 역할을 다하다가 1954년에 폐쇄되었다. 현재 홍콩천주교회의 출판사업은 진리학회(眞理學會)에서 담당하고 있다.

 

85) 나가사키에서의 기간은 1881년 11월 21일부터 1885년 11월까지로 볼 수 있다.

 

86) 부산-나가사키 연락망 구축 : 현재 모든 서신 연락은 부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 나가사키에 거점(Poste), 가령 신학교 같은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나가사키 거점을 코스트 신부에게 맡겼고, 당분간 만주(차쿠의) 성모설지전의 거점도 그대로 유지할 작정이다. ff.954~957♣[ff.964~967](*F):Lettre de Mgr Ridel aus Directeurs de Paris[리델 주교가 파리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1881년 8월 5일, 홍콩 베다니 요양소)](원본), A-MEP. Vol 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49쪽.♣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정리자의 착오인 듯 폴리오 번호가 ff.964~967이어야 하나 ff.954b~957로 표시되어 있다. 이후에도 계속 잘못 매겨진 상태로 정리되고 있어 불가피하게 폴리오 번호를 이중으로 표시하였다. 각주 재인용.

 

87) La lettre du P.Coste au P.Armbuster, Yokohama, le 14 Octobre 1881, A-MEP, Vol.H-12(Procureur de la Mission de Corée ai Japon 1878~1885), f.18.

 

88) 당시 나가사키에서 한국으로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프와넬(Poisnel, Victor Louis(1885~1925) 신부가 리델 주교를 간호하다가 병이 악화된 리델 주교를 본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해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싱가포르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젊은 신부를 만나 주교를 그에게 맡기고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곧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게 되었다. 첫 포교지는 황해도와 평안도였으나, 뮈텔(Mutel)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발령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대목구의 경리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 1991년판, 1228쪽.

 

89) 1865년에 프티장 신부에 의해 완성된 이 성당은 1597년에 나가사키에서 책형으로 순교한 26성인에게 봉헌된 곳으로 이곳의 정식명칭은 일본 26 순교자 성당이다.

 

90) 주교관 건물과 같은 높이에 위치하고 있으나, 라틴신학교는 경사진 면을 한쪽 벽면으로 사용하여 건축을 하였기에 북쪽에서 보면 지하로 보이는 것이다.

 

91) 森 禮子, 《神父 ド・ロの冒險》, 東京, 敎文館, 2000, 223~224쪽.

 

92)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32쪽.

 

93) 유홍렬, 앞의 책(하권), 272쪽 ; 이때 나가사키에서 페낭으로 출발한 학생들은 1882년 12월 20일에 페낭에 도착한 학생을 역으로 추산해 보면, 이들 신학생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의 명단은 황 베드로(19세), 구 요한(26세), 전 안드레아(22세), 박 방지거(16세), 강성삼(라우렌시오, 16세), 방 바오로(22세), 이내수(아오스딩, 20세)로 이들 중의 몇 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환, 앞의 책, 2015, 179쪽.

 

94)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3쪽

 

95) 조선대목구 인쇄소에 관해서는 코스트 신부의 편지(La Letter du P. Coste au P. Armbuster, Nagasaki la Novembre 1881-A-MEF), 블랑 주교 보고서(Mgr. Blanc au Card. Prefect de la Propagande(Envoi du CR pour 1884~1886),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본과 조선 전도(Procureur de la Mission de Corée au Japon 1878~1885) 문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91쪽 재인용.

 

96) 블랑 : 1882. 7. 26 부주교(coajutor), 1883. 7. 8 주교품, 1884. 6. 20 대목 착좌. 블랑 신부는 1876년 조선에 입국한 후 전라도와 서울에 인쇄소를 설립하고, 1879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인 최우정(바실리오)에게 인쇄 작업과 운영을 위탁하게 되었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후 목판본 《신명초행》, 《천주성교공과》 등이 인쇄되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265~267쪽 ; “나가사키가 앞으로 연락의 중심지[거점]가 될 것이다. 중략. 나가사키에서 인쇄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이미 계약도 체결하여 계약 상대자인 일본인이 조선어 활자를 주조하고 있다.” ff.977~978(*F) :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2월 13일, 나가사키)](원본), 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71쪽.

 

97) 문 필립보는 대자 1,461자, 소자 1,201개로 활자 40개 당 1냥 꼴이다. 그 활자를 만든 사람이 바로 본 서한과 함께 가는 문 필립보이니 활자가 부족하면 그를 시켜 보충하면 될 것이다. ff.979~988(*F) : Lettre de M. Blanc à Mgr. Ridel[블랑 부주교가 리델 주교에게 보낸 서한(1882년 2월 22일, 전주 배재)](원본)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75쪽.

 

98)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5~56쪽.

 

99) 모든 신학생들을 페낭으로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물적, 인적, 영성적인 면에서 일본보다는 페낭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쇄소[활판소] 문제도 생각했는데, 코스트 신부를 활판 설비와 함께 조선에 오게 한다면(서울이나 전라도에 인쇄소를 차리게 한다면)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모두 절약될 것이다.ff.994~1010b(*F): Lettre de M. Blanc à Mgr. Ridel[블랑 부주교가 리델 주교에게 보낸 서한(1882년 5월 24일/6월5, 13일, 서울)](복사본)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196쪽.

 

100) ff.1064~1066(*F) :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11월 6일, 나가사키)](원본), A-MEP Vol. 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272쪽.

 

101) 1882년에는 《회죄직지》(2판), 《성찰기략》(2판), 《신명초행》(3판, 상/하), 《영세대의》(2판)이 간행되었고, 1883년에는 《성교감략》, 1884년에는 《진교절요》, 《천당직로》(2판), 《주년첨례광익》(2판), 《성교백문답》, 《성교절요》(1884년 간행한 것은 목활자였다)이고, 1886년에는 《성상경》이 간행되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273쪽.

 

102)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273쪽.

 

103) 정동시기(1885. 11. 15.~1887. 11), 종현시기(1887. 11~1979. 8. 27.)를 거쳐, 1979년 8월 27일에는 현재의 중림동 성당 내의 가톨릭출판사 사옥으로 이전하게 된다. 필자 주.

 

104) ff.1350~1350c(*F):Lettre de M.Coste à M. Lemonnier[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5년 10월 12일, 나가사키)](원본),A-MEP Vol.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494쪽.

 

105) 코스트 신부가 이용한 증기선은 히고마루(Higo Maru, 肥後丸)호일 것이다. 1885년부터 기선(汽船)인 히고마루호 1척이 3주에 한 번씩 일본 고베[神戶]-시모노세키[下關]-나가사키[長崎]-고도[五島)-부산-인천 항로를 운항하였다.

 

106) ff.1374~1406(*F): Notice Nécrologique de M. Coste[프와넬 신부가 작성한 코스트 신부의 부고(1896년)](원본), A-MEP Vol.581(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315쪽.

 

107) 지금까지 나가사키에 대표부와 함께 인쇄소를 갖고 있었으나 연락 소통의 용이함 등을 고려해 더 이상 나가사키 대표부가 필요 없어졌고, 오히려 포교지의 짐이 되어 그곳에 있는 인력과 동산을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짐을 옮기던 중 세관에서 심각한 문제(옛 세관원장인 묄렌도르프 씨 앞으로 보낸 물건들이 세관에서 반가톨릭, 반프랑스 성향을 지닌 한 이탈리아인의 증오심으로 [발각되어] 문제가 퍼짐)가 발생하였다. ff.1351~1358(*F) : Lettre de Mgr Blanc au Cardinal Préfet de la Propagande[블랑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84~1885년 연말보고서(1885년 11월 1일, 서울)](복사본), A-MEP Vol 580(B), Corée 1875~1886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496쪽 ;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55쪽.

 

108) 류현국은 《한글 활자의 탄생》, 273쪽에서 1880년대 정동 인쇄소의 간행 내용을 1886년에는 《성교요리문답》, 1887년에는 《천주성교예규》(3판)와 《성요셉성월》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09) 1888. 7. 22. 블랑 주교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 4명이 프와넬과 코스트 신부의 정동 거처로 이주하여 거주 시작함. 프랑스인인 자카리아 수녀(1대 원장), 에스텔 수녀와 중국인인 프란치스카와 비르지니 수녀 거주. 자카리아 수녀는 6개월 후 장티푸스로 사망함.

 

110) 현재 구러시아 공사관에 조성된 공원에는 “한국 최초의 수도원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첫집 자리”라는 기념 비석이 세워져 있다.

 

111) 김정신, 〈구한말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에 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 19-6(통권 73호), 2010, 12, 63쪽.

 

112) 김정신, 같은 글, 63쪽.

 

113)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편,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100년사》, 분도인쇄소, 1991, 99쪽.

 

114) ff.242~245(*F): Lettre de Mgr Blanc à M. Martiner[블랑 주교가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8년 12월 15일, 서울)](원본), A-MEP Vol.581(A), Corée 1887~1900 필사문서판독자료편, 2011, 202쪽.

 

115) 가톨릭출판사, 《명동성당》, 68쪽의 사진자료.

 

116)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276쪽.

 

117) 《성교공과》의 내용 중에서 하루 일과에 필요한 기도문들이 발췌되어 편집된 것으로 내용으로는 성수를 찍을 때 하는 경(經), 성호경, 삼종경을 비롯하여, 조과(早課), 만과(晩課), 영광경, 성로신공(聖路神功), 연옥도문(煉獄禱文), 매괴경(玫瑰經), 찬미경 등이 수록되어 있고, 각 첨례날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때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설명한 ‘첨례 규식’과 성가회 경문(聖家會經文)도 수록되어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년판, 974쪽.

 

118) 조판의 특징이 있었던 것을 언급한다면, 1893년의 《중성지도》는 띄어쓰기 사용, 《의경문답》은 1884년의 츠키지활자를 사용한 것이며, 1894년의 《수세진전》(2판)은 표지 국한문을 사용한 것이며, 《훈아진언》(3판)은 최초 본문 5호, 2호를 사용한 서적이며, 1899년에는 《신명초행》, 1901년에는 《천주성교예규》(4판), 1902년에는 《천주성교십이단》, 1903년에는 《성경직해》(3판), 1905년에는 《기해일기》, 1907년에는 《천주성교공과》(4판)이 인쇄되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276~277쪽.

 

119) 1888년에 건립된 인쇄소 건물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 편, 《명동본당사》Ⅰ, 2007, 94쪽.

 

120) 천주교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 편, 같은 책, 153쪽.

 

121) 류현국, 《한글 활자의 은하계 1945~2010》, 63쪽.

 

122)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한 가로쓰기 · 가로짜기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모색은 ‘종성의 활자 운영 방법’에 관한 새로운 한글 디자인의 방법론을 낳았다. 다시 말하면 한글 활자 제작 방식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알기까지는 136년(오늘로 계산하면 138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면서 《한불자전》의 한글 보급에 대한 위대성을 언급하고 있다. 류현국, 《한글 활자의 은하계 1945~2010》, 65쪽.

 

123) 《한불자전》이 중요한 이유는 “언더우드(H.G. Underwood)의 《한영사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1890), 스코트(J. Scott)의 English-Corean Dictionary : Being a Vocabulary of Corean Colloquial Words in Common Use(1891), 게일의 《한영사전》(A Korean-English Dictionary)(1897·1911·1935)의 모델이 되었고, 그 내용이 발췌 수록되었다는 점입니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불자전》이 크게 각광을 받지 못했던 점은, “국어학자는 프랑스어 해독력이 떨어져서, 프랑스어학자는 한자나 19세기 한국어 해독력이 낮아서, 가톨릭교단의 연구자는 사전의 내용 자체보다는 사전외적 요소에 더 큰 의의를 두어 이 사전의 내용은 그리 잘 연구되지 못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은령 외, 《한불자전 연구》, 소명출판, 2013, 5쪽 ; 특히 게일은 《韓英字典》 초판에서 “이 사전에 가장 관심을 지닐 법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한불자전》이 따른 바의 알파벳 순서”를 따랐음을 명시했다. 이상현, 〈한국어사전의 ‘전범(典範)’과 ‘기념비(記念碑)’〉, 《한불자전연구》, 2013, 70~71쪽 ; 1886년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서간(1886. 1. 31)을 보면, [그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한국어학적 수준과 기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개신교보다 이른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문법과 사전을 보유했던 천주교는 “한국어에 능통한 선교사”, “한글 천주교 문학관련 소책자”, “성당건축의 기획”, “천주교 신학교와 학생”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만일 개신교가 그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이교도들 대신 천주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할 지경”에 이르리라고 우려할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만열,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Ⅰ,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5, 24~25쪽 ; 이상현, 〈한국어사전의 ‘전범(典範)’과 ‘기념비(記念碑)’〉, 《한불자전연구》, 2013, 65쪽 각주 25) 재인용.

 

124) 더 연구해야 할 내용이지만 천주교인인 송순용(宋淳容, 字는 德祚)이라는 자가 《한불자전》을 편집하는 데 참여했으며, 그는 프랑스 신부의 한글 선생을 하였다고 하나, 천주교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언더우드(H. G. Grant Underwood, 元漢慶)가 한국에 들어온 뒤로 그가 자신의 어학선생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송순용의 지도로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 나라 최고 스승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진전을 보일 정도”라고 하며, 송덕조를 “애초에 들은 소문대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언더우드는 송덕조의 도움으로 요코하마에서 1890년에 《한영자전》(韓英字典)을 출간하였다. 이만열,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Ⅰ,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5, 24~25쪽 ;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149쪽.

 

125) 《뮈텔 주교 일기》 Ⅱ (1896~1900), 52쪽.

 

126) 한국교회사연구소,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대전교구사 자료 제1집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324~325쪽.

 

[교회사 연구 제52집, 201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의식(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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