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콘스탄티누스 대전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62

[교부들의 가르침] 콘스탄티누스 대전환

 

 

콘스탄티누스 대전환이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교회의 전반적인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이다. 그것은 최대 규모의 세계사적인 사건으로서, 로마 국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생애

 

콘스탄티누스는 285년경 지금의 세르비아의 니쉬에서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와 성녀 헬레나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에 있는 황제의 대궐에서 보냈다. 당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이 워낙 광대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통치를 네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자신의 퇴위식(305년 5월 1일) 자리에서 후임자로 콘스탄티누스의 기대와는 달리, 교회를 몹시 박해한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正帝)로 승격시켰고, 콘스탄티누스를 제2정제로, 그리고 갈레리우스의 측근 부하였던 막시미누스 다자와 세베루스를 부제(副帝)로 임명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를 떠나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그곳에서 부친의 사망 후 브리타니아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수년 동안 여러 음모을 물리치면서 정치적인 재치와 군사력으로 서방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드디어 312년에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게 되었다. 그 때 로마 근교 밀비오 다리에서 군사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과 마주쳤다. 이 때 그는 결전을 앞두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는데, 꿈속에서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고 "너는 이 표시로 승리하리라"(hoc signo vinceris)는 환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군인들의 방패에 십자표시를 그려 넣게 한 다음 전투를 하였다. 결국 그는 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누르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를 그리스도의 힘과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의 증거로 생각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치를 펴기로 결심하였고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귀의하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바로 옆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름다운 개선문이 있는데, 거기에 이 역사적인 사실이 부조되어 있다. 그는 다음해인 313년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금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밀라노 포고령과 교회발전

 

300년간의 박해를 받아오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포고령(布告令)에 의해 종교해방을 얻게 되었다. 이 포고령은 단순히 교회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인정받은 교회 그리고 후에 로마제국의 국교(392년)가 되면서 여러 방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박해받던 교회에서 종교의 해방을 얻었고 나아가 제국의 인정과 보호를 받는 교회로 변화된 이 시대는 대중의 대량 입교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수많은 교부들을 배출하였다. 교부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교부들이 대부분 이 시대에 속한다. 4~5세기에는 교부들의 황금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처음으로 전 로마 제국의 주교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모였고 콘스탄티누스의 사회로 니체아의 제1차 공의회(325)가 아리우스주의의 이단, 그리고 멜리티우스와 도나투스의 이교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최되었다.

 

신학자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서를 연구하고 다양한 신학사상을 개진하는 가운데, 특히 성삼론이나 그리스도론 같이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는 이단적인 사상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단들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학이 발전되었으며, 공의회들을 통해 정통교리가 확정, 공포되었다.

 

324년 리치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서방 제국의 유일한 최고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일치를 튼튼히 다지기 위해서 새 도시를 세워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본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힘을 쏟았다(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56).

 

한편 이 시대에는 교회에 부정적인 요소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황제가 베풀어준 보호와 특권과 혜택은 교회를 로마제국의 권력과 묶어 줌으로써 제국과 한통속이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누리게 된 영광과 특권을 메시아적 승리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하면, 교회가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귀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황제는 교회 내부의 일에 개입하는 폐단도 생겨났다. 그리고 대중의 입교로 인해 완화된 세례준비와 입교절차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여 교회의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의 심화를 위해 수도생활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수도자들은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막아주는 소금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시대의 순교영성을 대신하여 교회를 강화시키고 쇄신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사실 당시의 유명한 교부들 중에는 성 바실리우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 수도자 출신 주교들이 많았다.

 

 

예로니무스와 루피누스

 

한편 서로마제국에 자리 잡고 있던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동로마제국에 위치해 있던 동방교회는 희랍어를 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 서방 교회 사이의 신학적 교류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서방교회의 라틴 저술가들은 동방교회의 많은 그리스 저술가들의 희랍어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예로니무스와 루피누스이다. 그들은 동방교회의 신학을 서방에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번역한 문헌들 중에는 후에 희랍어 원문이 상실되고 라틴어 번역만 남아있는 경우들이 많다. 귀중한 역사적 문헌들을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5월 11일, 장인산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1,39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