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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에우세비우스: 역사신학의 새 시대 연 호교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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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63

[교부들의 가르침] 에우세비우스


역사신학의 새 시대 연 호교론자

 

 

체사레아(성서: 가이사리아)는 아우구스투스 체사르의 이름을 따서 이와 같이 불리며, 예루살렘이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명예 총대주교좌로 승격될 때까지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도이자 수석주교좌였다. 3~4세기에 체사레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 하르낙이 중세와 그 이후 도서관의 모태로 여긴 이 도서관의 토대는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오고, 계속 책을 모아들이면서 마련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팜필루스가 뒤를 이어 에우세비우스와 함께 그때까지 나온 그리스도교 서적도 수집하였다. 두 사람은 도서관에 소장된 삼 만여 두루마리의 목록을 작성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오리게네스 작품을 출판하였다. 이 도서관은 필경사 학교로도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육중역판 구약성서)를 필사한 성서 50권을 체사레아에 주문하였으며, 히에로니무스는 당시의 많은 공동체가 팜필루스와 에우세비우스가 발행한 구약성서 비판본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그 밖의 도서관의 운명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도서관은 아랍인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 같다.

 

에우세비우스는 260~264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스승 팜필루스를 주인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을 보건데 그가 노예였는지, 아니면 팜필루스와의 사제관계를 이런 개념으로 표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그는 팜필루스 장로의 협력자로서 오리게네스가 체사레아에 세운 도서관의 발전과 성서 연구에 헌신하였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난 뒤 에우세비우스는 잠시 티루스와 이집트에 가 있었다. 그가 박해 때 배교하였다는 후대에 제기된 비난은, 그가 박해가 끝난 뒤 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된 것을 보면 믿을 만한 내용이 못된다.

 

에우세비우스는 그리스도교가 격변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살았다. 그가 살던 시기에 교회는 두 가지 위기, 곧 301~313년의 박해와 아리우스 논쟁에 휩싸였다. 이 두 사건이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에우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를 한때 지지하여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에서 파문되지만 최초의 전세계 공의회인 니체아 교회회의(325)에서 자신의 정통신앙을 변론하여 복권되었다. 그 뒤 그는 더 이상 아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에우세비우스는 성서와 신앙전승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본 독창적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마지막 호교가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더욱이 역사신학에서 새로운 시대를 전개한 개척자였다.

 

에우세비우스의 명성은 무엇보다 '교회사의 아버지'라는 경칭을 부여하게 한 역사서에서 비롯한다. 그는 자기 스승 팜필루스에게 문헌학적?역사적 연구 방법을 물려받았다. 그가 쓴 "교회사"는 오늘날까지 초대 교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루가가 사도들의 행적을 기술하지 않았다면 원시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거의 알 수 없듯이, "교회사"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첫 3세기의 역사를 거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신학적 동기를 바탕으로 서술되었다. 그는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데, 역사의 진행과정을 구원사적 틀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에서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이교가 붕괴되고 그리스도교가 신앙을 바탕으로 로마제국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러한 발전은 지금 거의 완성되어가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기대를 이제 제국의 역사적 실재에 구체적으로 투영할 수 있었으며, 로마제국,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황제를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정치신학은 "콘스탄티누스 찬가"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그의 정치신학은 로고스와 황제, 하늘의 제국과 지상의 제국을 동일시하는 표상으로 전개된다. 통치권이 하느님에서 그리스도를 거쳐 황제에게 위임된다면, 그리스도가 황제 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그리스도와 황제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하거나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아들들을 하느님-아버지와 그분 본질의 빛, 로고스, 왕과 비교했다면, 이는 황제를 하느님의 측근으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에우세비우스의 이러한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황제 이념을 고대의 이교적 신-황제 이념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로써 황제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점차적인 일치로 콘스탄티누스를 교회의 수석대사제로 이해한 것은 에우세비우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교회의 수장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고 논쟁을 조정하고 주교를 임명하고 추방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이자 더 나아가 의무였다.

 

에우세비우스가 체사레아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한 것도 지켜보고, 그 뒤 그리스도교가 인정받는 것도 목격한 과도기에 산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의 정치신학은 현존하는 상황을 합법화하고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감추었다. 따라서 로마제국과 하느님 나라를 거의 동일시하는 위험에 빠지게 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의 황제권을 신학적 논증으로 정당화하였다.

 

또한 에우세비우스는 고대의 그리스-로마 역사가들과 전혀 달리,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황제를 종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모세 또는 아론으로 묘사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부정적인 면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에우세비우스의 생각은 후대의 일부 신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세상을 향한 교회 본디의 의미를 변질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에우세비우스를 '황제의 가발을 다듬는 황실신학의 이발사', 황제가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교회의 외적 자유을 위해 교회의 내적 자주성을 잃게 한 토대를 놓은 장본인이라고 혹평한다. 1054년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첫 사건이나 그 연도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4세기 2, 30년대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멀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황제와 제국에 관한 여러 해석이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을 것이고, 콘스탄티노플 건설로 제국의 구심점이 동방으로 이동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5월 25일,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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