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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44-46: 로마 수위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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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1 ㅣ No.744

교회사 에세이 (44) 로마 수위권의 역사 (1)

 

 

우리는 지금 로마 교황의 수위권 아래, 한 형제로 모여 일치를 이루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디서든 같은 전례와 같은 신앙 고백의 보편성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유대 땅을 떠돌던 스승과 제자들의 무리, 그 중에서도 일부가 세상의 중심 로마까지도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우연하면서도 섭리적인 씨앗은 로마 교회를 낳았고, 그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아름답기만 한 전통이고 현실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사실 복잡하고 오랜 시간을 거친 투박한 결과물입니다. 그것은 신학적 성찰과 갈등, 정치적 대결과 화해 그리고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제도의 필요라는 여러 가지 현실이 어우러져 이뤄낸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층을 하나하나 들추어보면 실망스러울 수도, 아니면 반대로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로마 교회의 수위권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3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의 주교들은 서방교회(여기서는 보편 교회라고 칭하는 것이 적당한)에 대한 수위권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거치며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이루게 되는데 여기서 수위권이라 함은 서방(서로마)의 개념에 따르면 어떤 인도와 지도에 있어서 중심적 기능을 가짐을 의미했고,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로마의 첫 번째 주교, 베드로의 후계자로써 로마의 주교가 모든 교회를 유효하게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지난 호에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던 것처럼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총대주교좌만이 유일한 사도적 기원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통해 서방에서는 로마 중심적 교회가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동방 교회에서는 어느 지역도 어떤 한 주교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할 이유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로마 주교의 수위권에 대한 전통적 신학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직무를 통해서 어떤 결정적 조직이 요청되었고, 그것은 로마의 첫 번째 주교인 베드로로 거슬러 올라가 베드로가 사도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처럼, 로마는 보편 교회의 우두머리로써의 자격을 가졌으며, 마침내 그 로마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들의 끊어지지 않는 연결성을 통해 베드로 사도의 권력과 기능 물려받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직무를 통한 조직의 필요성입니다. 이 현실적 요구와 필요에 응답하는 로마 교회의 주장은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현실이 역사적 예수의 지체로서 전통적인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 근거요 보증은 바로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말씀과 요한 복음 21장 15-17절의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있는 ‘로마 교회의 수위권’이란 주제에 대한 이 두 성경의 말씀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주장에 대한 성경 주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에 대해 하신 역사적 말씀들이 아니라 신약 성경의 글들에서 보듯이,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도 베드로’란 인물에 대해 특별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5) 로마 수위권의 역사 (2)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로마 교회는 마태오 복음과 요한 복음서의 말씀을 로마 교회 수위권의 신학적 토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원으로부터 로마 교회가 수위권을 가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의 중요성은 베드로 사도가 모든 제자들과 사도들의 ‘원형’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 사도가 모든 제자들에게 선교사로서 설교의 교회적 직무를 대표하는 사도와 제자들의 ‘원형’이었다는 점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 ‘베드로’의 특별한 임무란(아직 초기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고 알지 못하던) 아직 건설되지 않은, 그리고 건설 중에 있는 모든 교회에 대한 지도자로서 이끄는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이 확인되었을 때 로마의 교황권과 베드로 사도와 관계된 위의 두 개의 성경 구절이 후차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고대 교회에서 이 두 개의 성경 구절은 교황권이 존재하지 않았을 초기에도 그 의미를 갖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주교였다는 주장은 그러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런 주장은 실제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시대의 신학으로 주장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 있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로마 공동체에서 가졌던 역할과 우두머리적인 그의 활동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곳의 주교였다는 사실도 예외적입니다. 왜냐하면 군주적 주교직의 역사에서 실제로 절대적 확신을 가질 만한 결과들이 있는데, 약 서기 140년 경 이전에 그런 군주적 주교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로마와 그 외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오히려 주교단만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방에서는 140년 이후 그런 주교직이 발견되지만, 동방에서는 더 훗날에야 그런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한 베드로에서부터 출발하여 로마 주교 계승자들의 목록이 전해오는데(이레네오의 이단을 거슬러, 3권 3,3) 그것은 2세기 말 경에 모아진 것으로서 역사적인 연구 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개념들에 기초했던 것입니다.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2세기 후반에 가면 서방 교회에서 베드로의 로마 출현에 관한 사도성이 생겨납니다. 그 점은 무엇을 말할까요? 바로 군주적 주교의 시대에 이미 베드로의 상징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앞선 베드로의 후계자 주교들의 이름을 열거함을 통해 신앙의 전통을 보증하기 위함이었으며, 유추해보면 교회적으로 동일한 조직이 시작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됩니다. 유념해야 할 점은 이런 로마의 사도성의 주장과 진술은 동방에서도 같은 의미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교회를 인도하는 기능을 갖는 중심적 임무라는 개념은 교회의 원천적인 구조와 일치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즉 모든 교회들과 친교와 통교를 이루고, 같은 등급의 사도들의 좌들로 특성 지어진 교회의 구조를 볼 때 일치하기 어려운 생각과 주장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필연적으로, 한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들 위에 우위권을 갖기 위해서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였고, 지금까지의 친교의 구조가 ‘자리바꿈’을 통해 몇몇은 중요하지 않은 교회들로 자리매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작에서 중앙집권적 조직을 위한 조건들을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로마 교회의 수위권의 주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역사적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2016년 3월 27일 예수 부활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회사 에세이 (46) 로마 수위권의 역사 (3)

 

 

로마 교회의 수위권에 대한 주장이 현실이 되는데는 ‘역사적 시간이 더 필요했다’고 지난 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역사적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수위권에 대한 첫 주장은 3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유사한 견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2세기말에 있었던 부활 축일의 날짜에 관한 논란에 있어서, 로마의 주교 비토레(Vittore I, 189-199)가 강한 어조로 모든 교회가 ‘로마 교회의 주장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주장의 이유와 형식적, 법적인 효력은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주장은 비판과 거절에 직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첫 번째 공식적인 주장은 로마의 주교 스테파노(Stefano I, 254-257)가 이단들의 세례에 대한 논쟁에 개입하면서, 베드로의 계승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모든 교회에 권위를 갖는 수위권을 담지한 주교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스테파노는 자기주장의 강력한 근거로 앞서 살펴보았던 마태오 복음 16,18-19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러 개별교회는 이런 주장과 개념에 반발하기도 합니다.

 

4세기가 되면 로마 수위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감지됩니다. 로마의 다마소 (Damaso I, 366-384) 주교는 로마 주교좌의 특권과 중요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이 목표를 황제를 통하여 이루려하고 괄목할 만한 성공을 얻어냅니다. 다마소 시대부터 로마 주교좌는 공경하올 사도좌로(Sedes Apostolica per eccellenza)로 불리게 됩니다. 로마 주교의 권력이 마침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예는 시노드에서 로마 주교가 동방의 총대주교들 위에 자신을 위치 지으면서 드러나는데, 동방의 주교들은 서방과의 다툼이 있을 적마다 되풀이 하던 주장처럼, 로마는 그들에게 다른 하나의 총대주교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수위권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동방에서 주교들과 총대주교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면 로마의 주교에게 호소하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로마 주교의 특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로마 주교의 중재자로서의 기능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다마소 교황은 자신을 ‘Papa’로 생각하며 자신의 주장을 새로운 형식과 틀에 담아 법적인 효력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제국 교령과 황제적 톤을 모방한 ‘교령과 칙령’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변화는 교황 시리치오(Siricio, 384-399) 재임 중에 활발해집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서방에서만 이런 주장들이 받아들여졌고, 오랜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로마 교회가 승리자가 됩니다.

 

이런 교황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변화가 이뤄지는데, 서로마 제국이 민족들의 대이동을 통해 점령되고, 작은 왕국들로 분열된 사건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파괴되었고, 서쪽 지역엔 황제가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로마 교회는 레오(Leone I 440-461)교황의 인도 아래 있었고, 그가 제국 황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황의 이런 새로운 정치적 임무는 교황권 자체에 대한 사상과 역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레오 교황은 역동적으로 신학적 측면에서 베드로의 수위권을 지지하였고, 모든 교회에 통치권을 가짐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모든 교회의 중요한 교의의 결정에 있어서 로마 주교의 신학적 비전을 관철시킴으로써, 사실상 로마 주교의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레오 교황의 생각은 제국 이데올로기적이었기에 교황을 권력의 담지자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교황은(Gregorio I, 590-604)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부르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봉사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개념을 연결 짓기도 하지만, 역사적 흐름은 교황이 제국의 문장을 사용하고, 왕실의 호칭과 장식들을 사용하는 중앙집권적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게 됩니다. [2016년 4월 3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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