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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수도원 운동 동서방 교회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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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65

[교부들의 가르침]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수도원 운동' 동서방 교회에 전파

 

 

오늘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여행을 떠나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교부는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평생을 아리우스 이단과 싸우면서 온 몸으로 니케아 신경을 지켜낸 교부, 수도원 운동을 동서방교회에 전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295?~373) 성인이다. 5월 2일이 성인의 축일이다.

 

3세기에 이집트의 나일강 주변 사막에는 수많은 은수자들이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순교자들의 용맹스런 순교행위에 감동을 받은 아타나시우스는 청년 시절에 수도생활에 대한 깊은 열망을 가졌다. 수도자들의 친구요 후원자였던 그는 사막으로 가서 안토니우스(251?~356?) 성인을 직접 만났다. 또한 유배시기에는 이집트 수도자들과 함께 지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아타나시우스는 '은수자들의 아버지'이며 '수도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우스 성인에 대한 책을 썼다. 그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동서방 교회에 수도원 운동을 전파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작품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한 수도자들의 삶을 소개하면서, 신자들에게 완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작품을 "이야기를 통해 수도자의 규칙을 제시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375년에 안티오키아의 에바그리우스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알렸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었다.

 

동정(童貞)생활을 찬양한 아타나시우스는, 비록 수도자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집에서도 동정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정녀들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한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이며, 세상의 온갖 욕망을 끊고 침묵을 지키며 성서를 읽고 시편을 바치며, 노동을 통해 자신을 성화시켜 나가는 '천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했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부제였다. 그는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로서 알렉산더 주교와 함께 니케아 공의회(325)에 참석했다. 부제였기 때문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발언은 못했지만 뒤에서 니케아 신경을 작성하여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알렉산더 주교는 죽기 전에 후임 주교로 아타나시우스를 내정했다. 그러나 멜리치아누스파 열교(裂敎)가 주교좌를 차지하려고 하자,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서둘러서 아타나시우스를 주교로 서품했다(328).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반대자들은 아타나시우스를 비합법적인 주교라고 비난했다. 아리우스에게 호의적이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서품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아리우스를 교구에 다시 받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반대자들은 아타나시우스가 타락했고, 반역죄를 지었으며, 멜리치아누스파의 주교 아르세니우스를 살해했다고 고발했다. 또한 이집트에서 로마로 공급되는 밀을 아타나시우스가 중단시켰다고 고발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335년 11월 7일에 트리어로 추방했다(1차 유배).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차례나 유배를 당했으며, 주교직 46년 동안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70살 되던 해에 5번째 유배(365~366)를 당했다.

 

교회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온갖 시련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고 불굴의 투지와 믿음으로 니케아 신경을 지켜낸 아타나시우스는 동서방 교회로부터 명실공히 추앙받는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일컬어 "교회의 기둥", "참다운 하느님의 사람", "산 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청지기" 라고 찬사를 했다. 황제들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세상과 싸우는 아타나시우스"라는 별명을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강조하여 후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아리우스 논쟁으로 이집트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동로마 황제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니케아 신경을 반대하면서 아타나시우스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리우스는 희랍 철학의 논리와 유일신 사상에 집착하여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했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이 되었지만 결코 하느님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신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면 하느님 유일신 사상이 훼손된다고 판단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모두 부정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유일신 사상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우월성도 인정하므로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도 아니고, 완전한 신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에 불과하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신비를 파괴시킨다고 경고하면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육화와 신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말씀이 친히 사람이 되셨다"("말씀의 강생론" 54, 3). "그분의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이 사라졌으며… 그분의 부활로 인간은 불사불멸을 되찾게 되었다"("말씀의 강생론" 9 참조).

 

아타나시우스가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인간은 본성상 필멸(必滅)의 존재이나, 은총으로 불멸(不滅)의 존재가 되었다"("말씀의 강생론" 4 참조).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악에 빠졌다. "인류는 멸망하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이성적인 인간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하느님의 작품이 멸망해 가고 있다"("말씀의 강생론" 6).

 

끝으로 3세기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은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절 축일 날짜를 공지하는 부활절 서한을 보냈다. 이 같은 전통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도 부활절 서한을 보냈다. 그가 보낸 부활절 서한에서, 우리는 3세기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주간 6일 동안만 단식했으나 4세기 초에는 사순절 40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8일,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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