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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국교회의 과제: 사회교리를 넓고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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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1 ㅣ No.1235

[증언, 한국교회의 과제] 사회교리를 넓고 깊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 100주년에 「백주년」(Centesimus Annus)을 반포하였고, 온 교회에 사회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것을 권고하였다. 이 권고에 따라 각 교구는 사회교리학교를 개설하고 사회교리를 가르쳤지만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거부당하는 사회교리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일부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사회참여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사회교리는 인간 삶의 장인 사회에서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가르침이며,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회교리를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 사회교리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사회교리에 따른 사회 참여 활동에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 사회 참여를 가르치는 사회교리에 거부감마저 지니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을 극복하고 사회교리를 생활화할 수는 없을까?


배척받는 사회교리

위로받고 싶은 신앙인

신자들은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참례하며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받고자 한다. 또한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각박하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상처받고 지친 마음에 위로받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제가 미사 때 시국이나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강론을 하면 불편하게 여긴다. 주일만이라도 골치 아픈 세상 일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첨예한 의견 대립이 있는 시국 문제의 경우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마저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지닌 이들은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가 사회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치활동이라며 거부한다.

모든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여 교리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신앙생활에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신앙생활은 개인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면 그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신앙생활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모든 사회활동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는 물건을 사고팔 때, 임금을 결정할 때, 투표를 할 때, 여가를 즐길 때, 주식투자를 할 때 등 모든 사회활동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회교리는 신앙생활의 사회적 차원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회교리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생활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위로받는 신앙에서 세상을 위로하는 신앙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개인적 차원과 위로받는 신앙에 빠져들면 신앙인의 사회적 책무 수행을 강조하는 사회교리는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사회교리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의 모든 사회활동 분야에 복음정신이 스며들게 하여, 인간사회가 하느님의 뜻에 더욱 합당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의 사회교리는 인간사회의 모든 활동 분야를 복음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사회 복음화 활동을 통해 교회는 인간의 발전을 도모하고 각종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인간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사회교리는 현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복음적 시각에서 직시하고 분석하며 그 해결점을 모색한다.

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적 해결점을 모색하는 사회교리는 그 특성상 사회가 지닌 불합리한 면과 불의를 드러나게 한다. 이러한 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죄를 지은 원조들이 하느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창세 3,8 참조), 인간은 자신들의 불의와 죄악을 숨기기를 원하지만 이런 것이 드러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심지어 이를 밝히는 사람을 미워하여 죽이기도 한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 임금의 죄악을 밝힌 엘리야를 아합 임금이 불편하게 여겼으며(1열왕 21장 참조), 수많은 예언자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죄악을 밝혀내어 인간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이 경종은 사람들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고통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회개를 선택하지만, 드러난 불의와 죄악을 숨기려는 자들은 사회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사회교리는 시위와 투쟁의 원천

사회교리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모든 면이 복음화되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교리는 어떤 정치적 이념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어떤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사회교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세상을 목적으로 하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온전히 구현되는 세상, 생명의 문화가 꽃피는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이룩하려고 신앙인들의 사회참여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왜냐하면 사회교리는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교리,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교리를 넘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교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선포되어야 하기에,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장소가 사회교리의 선포장이며, 사회문제를 복음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곳이 사회교리 실천의 장이다.

그러기에 사회교리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사회적 부조리와 불의가 발생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사회 부조리와 불의의 시정은 한마디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정의를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투신이 필요하다.

특히 인권이 유린되고, 노동자의 권리와 생계권이 침해되며, 환경이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에서 부조리와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를 부르짖는 모습은 투사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언론들은 큰 화젯거리로만 만들어, 불의와 부조리를 보도하기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위현장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도한다.

세상의 질서와는 상관없이 신앙인들이 고고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들의 행위를 불편하게 여기고 사회교리를 하나의 이념으로 폄하하며 분열과 투쟁을 불러오는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교회의 모습

교회는 거룩한 교회인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자신이 고백하고 선포하는 신앙을 완벽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을 선포하고자 본당과 다양한 활동을 하는 교회기관에서 사회정의를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기관 역시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구성원 간의 알력과 투쟁이 존재하고 임금, 노동권, 인권 등 다양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교회에서 사회교리를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모습을 사람들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교회를 향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하고 외친다.

무관심을 일깨워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회교리가 잘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관심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으면 곧잘 이웃과 하느님을 잊고 사는 무관심 속에 빠져든다고 지적했다.

사회교리가 우리 사회에 잘 확산되지 않고,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관심 때문이다. 사회교리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엄하며 연대성을 지니고 있기에, 내 이웃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불의와 부조리를 제거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회교리가 우리 사회에 선포되고 실천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의 무관심을 일깨워야 한다. 사람들이 이웃과 세상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려면 연대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인류는 한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회교리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교회와 교회기관에서 사회교리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자신이 실천하는 것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더 잘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는 먼저 사회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불의와 부조리를 제거하는 회개와 쇄신을 실천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삶과 말씀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강조하고 불의와 맞서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사회교리와 사회참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주교회의와 주교들이 먼저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할 것이다.

사회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교리를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아울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교회 안에서만 가르치고 행동하던 폐쇄성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지역발전을 위하여 협력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사회문제가 발생한 곳에서 정의를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교리의 생활화를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연대하여 지역 발전을 위한 사회참여를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환경파괴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자들이 지역민과 함께 환경보호를 위해 쓰레기 줄이기 운동을 통해 사회교리를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방법이 사회교리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많은 이들을 건전한 사회참여로 이끄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명현 티모테오 - 대구대교구 신부.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비산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김명현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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