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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24-26: 다르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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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21 ㅣ No.810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4) 다르덴 형제 (상)


형제 감독의 눈에 비친 ‘삶의 부조리’

 

 

- 다르덴 형제.(출처 pro.arte.tv)

 

 

영화에서 ‘사회적 영성’ 생각하기

 

지난 글에서는 세 번에 걸쳐 타르코프스키의 글과 영화를 음미하며 그 안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에 대해 던져주는 메시지를 길어보려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찬사이든, 비판이든 다분히 추상적 의미로 ‘신비적’ ‘초월적’ ‘상징적’이라 평해지곤 하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그의 글과 말을 새기며 감상해 보면서, 그 안의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공동체의 복원을 갈망하는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또 영성적인 소명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유작인 영화 ‘희생’의 이야기 구조와 영상언어, 영화적 장면들에 대해 수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그 어떤 현학적이고 기발한 해석들도 이 영화를 시작하게 한 감독의 절박한 예언자적 비전을 보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 위대한 작품에 다가가는 길을 막는 것일 뿐입니다. 좀 긴 인용이지만, 타르코프스키가 「봉인된 시간」 마지막 장에서 그가 남은 생명의 마지막 힘을 기울여 이 영화를 완성해야 할 사명감에 대해 밝히는 대목은 이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기계문명의 발전과 그 밖의 물질문명의 발전에 얽매이고, 가칭 진보라는 인류 발전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소비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한, 고매한 정신적 책임감이 충만한 삶으로 회귀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후자의 선택에 인간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그 사회 속에서 그 사회와 함께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의식적으로 떠맡음으로써 우리들이 흔히 ‘희생’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가능한 것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의 희생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희생의 개념에 일관하자면, 이는 남을 위하여 혹은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에게서 최소한 경미한 정도로도 느끼지 않는 한, 그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날 희생이라는 생각이 전혀 애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아무도 남을 위하여 혹은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매정한 결과들은 결정적으로 남게 된다. 더욱더 뚜렷한 자기 중심주의를 대가로 개성을 상실하는 것하며, 이미 수많은 인간 상호 관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들의 이웃 민족들과의 공존 관계도 규정지어 주는 자기 중심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질적 발전 대신에 정신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다시 고상한 삶을 가능케 해 줄 마지막 남아 있는 가능성의 상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분도 출판사, 1991, 293-294쪽)

 

타르코프스키는 심오하고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통해 이러한 확고한 관점이 피상적인 설교나 주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드문 위대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예술은 어떤 경우에도 예술 지상주의가 아니라 동시대와 다가올 세대의 사람들의 공동운명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영화를 유미주의적 상징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자주 언급되는 ‘사회적 영성’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영성’을 위해 가장 깊은 성찰을 전해주는 우리 시대의 영화감독을 들자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를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 ‘로제타’의 한 장면.

 

 

관찰, 연민, 공감 그리고 희망의 시선

 

두 번에 걸쳐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으며 여러 번에 걸쳐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것 등의 정보만으로도 다르덴 형제가 현대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업적인 큰 성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지만, 현실에 가깝게 다가가며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사물과 사건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그들의 영화미학은 사실 이미 당대의 많은 젊은 영화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뤼티히 근처 공업지대에서 자라난 다르덴 형제는 젊은 시절부터 공동 작업을 시작하였고 지금까지도 영화감독, 제작, 각본을 둘이서 함께해오고 있습니다. 

 

영상 예술을 전공한 형 쟝-피에르 다르덴(Jean-Pierre Dardenne, 1951년 4월 21일생)과 철학을 전공한 뤽 다르덴(Luc Dardenne, 1954년)은 그들의 전공이 말해주듯 영상작업의 시작부터 사회철학적 관심사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제와 영상기법의 선택에 있어 사회적으로 주변부로 몰리는 이들의 삶을 직시하고 이를 강요하는 시대적 사회적 조건들을 세밀히 관찰하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내적, 정신적 고뇌와 자유의지의 영역을 피상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려 애썼습니다. 초기 비디오 작업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의 시기를 거쳐 새로운 방식의 극영화 작법을 통해 이러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모색하였고 마침내 1992년 ‘약속’이라는 작품을 통해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칸 영화제 대상을 받은 ‘로제타’를 통해 그들의 영상미학과 주제의식은 전 세계적 영화계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통보를 받고 사실상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젊은 여성 로제타가 맞이한 비참한 상황을 냉정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리면서도 값싼 동정이 아닌 진정한 연민과 공감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들의 경력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르덴 형제는 명성이나 인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들의 윤리적 물음과 정직한 삶의 관찰을 수행하는 매체로서 영화 작업을 지속합니다. 그 결실들이 ‘아들’(2002), ‘아이’(2005), ‘로라의 침묵’(2008) 등의 뛰어난 작품들입니다. 다르덴의 영화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벼랑끝으로 몰리는 인물들, 특히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회적 조건을 냉철하게 주시하고 있기에 많은 경우 사회적, 정치적 영화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은 사실 ‘로제타’나 ‘아들’과 같은 작품들에서 확연히 볼 수 있듯 종교적 질문을 함축하는 실존주의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화에 자주 쓰여지는 표현인 ‘책임의 리얼리즘’을 사회적 차원으로만 규정될 수 없되, 사회적 차원을 도외시하지 않는 ‘사회적 영성’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의 영화를 보다 깊이 있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편의 아름다운 최근작들인 ‘자전거 탄 소년’(2011)과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은 세상의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희망의 시선을 잃지 않게 하는 ‘사회적 영성’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탁월하게 제시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9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5) 다르덴 형제 (중)

 

소년, 희망의 페달을 밟다

 

 

- 영화 ‘자전거 탄 소년’ 한 장면.

 

 

사회적 영성 - 시대의 표징

 

세월호 참사,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 과잉진압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가톨릭 농민회 원로였던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 이번 달 초 구의역에서 있었던 19세 청년 지하철 스크린 도어 수리공의 죽음 등등….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아프게 했던 많은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분노하거나 아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했고, 또 그러다가는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이런 사건들을 되새겨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사실 우연이나 예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 얼마나 위험스럽고 뿌리 깊게 절망과 폭력과 양극화의 악순환이 자리 잡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과 무책임, 이웃과 약자에 대한 무관심, 기관과 책임자들의 무능함과 비겁함에서 온 인재들이자 사회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책임을 응시하고 느끼는 것은 이 시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아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그 이후 여러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대적 징표를 알아보고 응답하는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황이 시복미사에서 세월호 배지를 가슴에 달고, 희생자 가족들을 어루만져 주시자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들이 정치적 상징성을 지닐 수 있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분명하게,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라고 응답한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이미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첫 방문을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수용돼 있는 이탈리아 람페두사를 선택하였고,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더욱이 이러한 탈출 과정에서 조난당하고 수장된 수많은 이들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무관심의 세계화’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연대’ 속에서만이 이러한 비인간화의 질곡에서 인류가 회심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매일처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우리 사회 안의 여러 안타까운 일들을 목도하면서,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묻는 진실되며 쇄신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이제 ‘사회적 영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 됩니다. 이 표현이 단순히 신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아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다만 ‘사회적 영성’이 표어나 추상적 개념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상상력 안에서 구체화되고, 우리의 정서와 마음을 담는 살아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영성’에 대한 진실하면서도 섬세하고 사려 깊은 형상화를 필요로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구라는 영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성’을 살아있는 인물들을 통해 잘 구현해주고 있기에,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매우 시의성을 지닌 영성의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감상주의를 애써 피하면서도 진정한 연대감의 정서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사회적, 경제적 상황의 엄혹성을 가감 없이 그려내면서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어떠한 경우에도 유보될 수 없고 부정될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하는 희망과 믿음을 가르쳐줍니다.

 

 

‘자전거 탄 소년’이 보여주는 인생의 길

 

다르덴 형제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을 처음 보고 나서 그들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만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여주인공이 그 너그러움과 선의와 단호함과 현명함에 있어 너무 이상화된 유형이 아닌가 하고 묻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여러 번 볼 기회를 가지면서 다르덴 형제는 그저 비현실적 소망을 투사하는 한편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이 실지로 걸어가야 하며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각고의 노력으로 선택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선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독들의 마음은 간절하고 그들의 눈길은 정직하면서도 따뜻합니다.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고아원에 수용된 채 이미 어린 나이에 파괴적인 절망과 폭력성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소년 시릴과 일일 위탁모로서 봉사 차원에서 소년을 돌보다 아예 소년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결심하는 미용사 사만다의 일상과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감독은 매우 정확하고 미화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만다가 소년을, 적지 않은 희생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소년이 사만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 성장하는 가능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매우 실감 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물들의 선택과 관계는 여하한 경우에도 도식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만다가 이상적이고 경탄할 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다다를 수 없다는 의미의 이상형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역시 시도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구체적 모범이라는 의미에서의 이상형이라 할 것입니다. 선의를 지니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책임을 지닐 때, 우리 역시 어느 정도는 사만다와 같이 연민과 연대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우리는 영화를 보며 갖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천사’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영성’에는 환상 없이 사회적, 경제적 구조와 조건을 비판하고 통찰하는 용기도 필요로 하지만, 결국은 희망을 지니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한껏 연대와 연민의 손길을 내밀려고 하는 선의에서 꽃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에 소년은 자신의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보여진 선의에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고,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힘있게 자전거 페달을 딛고 가는 소년의 등 뒤로 감독은 위로와 용기를 담아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숭고한 멜로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2악장 ‘아다지오 운 포코 모소’를 거장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 연주와 지휘자 버나드 하이팅크 지휘의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흐르게 합니다. 이 음악은 동시에 현실의 어려움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눈길과 손길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천사’가 되라는, 우리를 향한 초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26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26) 다르덴 형제 (하)

 

양심의 작은 승리, 함께하는 내일을 열다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한 장면.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감독의 최근작 ‘내일을 위한 시간’(원제: Deux Jours, une Nuit)은 공황장애 및 우울증으로 보이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난 30대 중반의 조그만 공장 노동자, 주인공 산드라가 복직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남편과 함께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이틀간의 고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장 복직을 당연히 생각하고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산드라에게 동료 줄리엣이 전화로 심상치 않은 상황을 귀띔해줍니다. 회사가 산드라의 일자리를 없애는 대신 직원들에게 1000유로씩 특별수당을 주기로 약속했고 작업 조장이 주도해서 산드라의 동료들에게 이 제안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결과 이미 16명의 공장 노동자 중 14명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며, 이에 관한 투표가 곧바로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산드라에게 무엇인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산드라와 줄리엣은 함께 공장주를 찾아가고 그래서 그 투표를 주말이 지난 후에 하도록 허락받습니다. 이제 산드라에게는 다시금 동료를 설득하기 위한 ‘이틀의 날과 하루의 밤’이 주어지고, 영화의 원제목은 이를 의미합니다.

 

감독은 이러한 복직 투쟁에 임하는 여주인공이 원래부터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전사’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져 있는 연민이 필요한 이웃임을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배우 마리옹 코띠아르가 화장기 하나 없는 지쳐 보이는 얼굴로 나와 너무나 인상 깊게 소화해낸 산드라는 우울증에, 때로는 약물과용으로 인한 자살 유혹에까지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산드라는 그녀의 남편 마누의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주어진 주말의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그녀의 동료들을 설득하는 어려운 여정을 해냅니다. 끝까지 그녀와 함께하고, 포기하려는 그녀를 위로하고 독려하는 남편 마누는 어떤 면에서는 영화에서 감독이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에게 보내준 ‘천사’처럼 보입니다.

 

동료들을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공격적이고 적대적 반응을 보였던 직장 동료들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그녀에게 호의적이고 동정적이었던 동료들도, 자신들에게 그 1000유로라는 보너스가 얼마나 긴요한지를 호소하며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함께해주는 남편의 굳건하면서도 현명한 사랑과 ‘동지애’에 힘입어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편함과 민망함, 모멸감 등을 이겨내고 끈기있게 동료들과 대면하고 논쟁하며 그들이 1000유로에 연대성과 동료애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스스로 확인케 하는 계기를 줍니다.

 

이를 통해 감독은 이 영화가 현재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이유 있는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인이 일터에서 맺고 있는 연대성과 존중감, 동료애 등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는 힘 있는 이들의 민낯이 잘 드러납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이기적 선택을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힘이 들지만 다시금 스스로 연대와 상호존중의 길을 발견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투를 보여줍니다. 산드라가 만나는 동료들을 묘사하면서 다르덴 형제는 결코 환상을 가지고 미화하지 않고, 기꺼이 보고 싶은 동화를 그려내지 않습니다. 각 사람들은 각기 나름의 약점을 지닌, 비겁하기도 하고 비정하기도 하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도 약한 이들이라는 것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단순한 호의만으로는 양심과 도의와 연민을 지켜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동병상련과 연대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때때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이러한 자신의 이해와 생존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타인의 입장과 무엇보다도 자비와 정의의 원칙이 우선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개인들이 있다는 것을 힘있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심의 작은 승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애쓰고 설득하며 투쟁하는 산드라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적 식별 - 의지의 자유를 통한 연대성의 발견

 

산드라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고 벌어지는 투표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료들 중에서 몇몇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특별수당을 포기하고, 산드라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까스로 투표에서 산드라의 해고는 부결됩니다. 이익 대신 연대성을 선택한 개인들의 선의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산드라를 우리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 속으로 인도합니다. 공장 사장은 산드라가 다시 일하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다만 그녀의 복직을 허용하게 되었기에 불가피하게 비정규직 동료 한 명을 해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산드라는 이 짧은 결단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또한 억울하게 직장을 잃게 된 그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선택을 합니다. 복직을 거부하고 주차장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주면서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제 그녀의 투쟁은 다시 시작되겠고,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남편과 같은 이들이 더 많이 있기를, 그리고 그녀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에 영화가 끝날 때 마음은 먹먹하면서도 작은 희망을 감지합니다. 마지막에 산드라가 짧은 시간에 단호하게 내린 결정은 이틀 동안의 과정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정적 식별의 순간을 위한 준비를 이틀 동안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해가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억울함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어려운 처지 역시 이해하고 연민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보편적 연대성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를 통한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의지의 자유란 필연적으로 자기 인식과 자신의 바람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사회적 영성이란 각 개인이 이기적 욕심이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행위하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인식과 성찰을 통해 보다 더 자유롭게 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실로 선택한 연대성의 행위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적 이웃사랑의 계명을 가장 탁월하게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 탁월한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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