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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이른바 갑질 공화국의 이카로스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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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1 ㅣ No.1236

[경향 돋보기 -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이른바 ‘갑질 공화국’의 ‘이카로스 역설’



한국인은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를 입증해 줄 수많은 통계가 있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만으로도 그 전쟁의 참혹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쟁터에선 오직 힘만이 정의다. 그런 힘의 관계를 가리키는 갑을(甲乙)관계와 그 관계에서 벌어지는 갑의 못된 횡포, 곧 ‘갑질’은 곳곳에 만연해 있다. 경향신문의 사설이 잘 지적했듯이, “지금 대한민국은 수많은 ‘을’의 눈물로 가득 찬 ‘갑질 민국’”, 곧 ‘갑질 공화국’이다.

2015년 1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60세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사흘간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5%의 응답자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갑질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데 매우 동의(44%)하거나 동의하는 편(51%)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갑질’이 “모든 계층에 만연해 있다.”는 응답은 77%로 “일부 계층에 해당된다(20%).”와 “몇몇 개인에 해당된다(3%).”를 크게 앞질렀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정작 흥미로운 건 자신이 갑인지 을인지 묻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을이다.”라고 답한 사람이 85%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항상 을이다.”는 17%, “대체로 을이다.”는 68%였다. 반면 “항상 갑이다.”라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과연 그럴까? 갑질은 결코 많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상대적이거니와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로 돼 있어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삶의 기본 양식이다. 이른바 ‘억압 이양의 원리’에 따라, 상층부 갑질의 억압적 성격은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낮은 쪽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전쟁 같은 삶’의 기원, 6·25 전쟁

‘갑질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삶’의 기원은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건 6·25전쟁 시절이었다. 이 전쟁이 한국인의 삶의 철학과 기본자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한국인은 아직도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잖은가.

6·25는 한국인에게 오직 재앙이요 저주이기만 했는가? 꼭 그렇진 않다는 데에 역사의 아이러니, 아니 잔인함이 숨어있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은 늘 참혹했지만, 동시에 늘 수혜자를 만들어내고는 했다. 세계의 강대국이나 선진국치고 전후 ‘전쟁의 축복’을 누리지 않은 나라가 없다. 무엇보다도 전쟁은 기득권 세력을 와해시켜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가능케 한다. 인간 세계의 근본 모순인 셈이다.

인명과 고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6·25는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6·25가 그 어떤 혜택을 가져왔다면? 박명림 교수(연세대학교)는 그런 곤혹스러움을 비켜가고자 ‘분단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분단의 역설 중 가장 크고 비밀스러운 역설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역설일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지옥’으로 묘사된 전쟁의 참상이 불러일으킨 그 어떤 정신적 자세, 곧 ‘6·25 심성’은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경쟁과 같은 가치들을 촉진했다. 물론 이 가치들은 자본주의 이념의 심층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발생한 평준화 의식과 상승이동의 기회 균등화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뜻이다.

하긴 혼란으로 하루아침에 지위와 신세가 뒤바뀔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나 내가 다를 게 무엇이냐? 너는 어쩌다 출세를 했을 뿐이니 나도 운만 따르면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사고방식이 뜨거운 교육열로 이어지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이다.


‘6·25 심성’의 일상화로 구현된 갑질

‘6·25 심성’의 일상화로 구현된 갑질 또한 마찬가지다. 갑질이 나쁘기만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기승을 부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갑질 역시 한국인의 전투력을 키워준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윤태성 교수(한국과학기술원)는 「한 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갑질을 당하면서 느낀 모욕감은 내가 성장하는 데 비료가 되었다. 나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갑질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언이 말해 주듯, 갑질을 당한 한국인 대부분은 자신이 당한 갑질을 성공을 위한 비료로 삼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국의 언론인 다니엘 튜더는 한국의 그런 두 얼굴을 다룬 책의 제목을 아예 「한국 : 있을 수 없는 나라」라고 붙였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런 양면성을 실감 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또한 답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마침내 우뚝 서게 한 그 경쟁의 힘이, 오늘날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6·25 심성’은 우리에게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한 동시에 ‘전쟁 같은 삶’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심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이 ‘갑질 공화국’이 된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서로 맞물려 있거니와 각기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단순하게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얽혀 있다. ① 압축성장의 부작용(황금만능주의 등). ② 효율을 기하려는 1극 중심주의가 낳은 서열주의. ③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중심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위계화. ④ 수출지향형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은 기업사회 구축. ⑤ 부정부패와 출세주의. ⑥ 법치의 실종. ⑦ 연고주의, 정실주의, 패거리주의. 그런데도 이 모든 요인을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감내케 한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6·25 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생들에 대한 ‘갑질 교육’을 인정하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는 갑질의 가해자일 수 없다.”는 예외 의식에 대한 성찰이다. 곧 갑질은 특정 권력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야 갑질을 일회용 분노로 소비하고 넘어가는, 그래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다. 먼저 우리는 학생들에게 사실상의 ‘갑질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학력과 학벌에 따른 임금 차이는 매우 높다. 살인적인 입시전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역대 정권들은 학력 · 학벌 간 임금 격차 해소라고 하는 답을 외면해 왔다. 더디 가도 좋으니 올바른 길로 나아갔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런 임금 격차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입시전쟁과 사교육 문제에 대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미련한 방법으로 대응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걸 온몸으로 겪고 봐왔을 학부모가 자식의 전투력 강화에 일로매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본디 전쟁의 공포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 인간이야, 잉여 인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와 같은 폭언은 전국 방방곡곡 각 가정의 일상에서 각종 변주를 거치며 수시로 만들어지는 말이다.

신경정신과 의사 이나미는 「한국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한에 울던 한국인, 이제 욕망 때문에 운다.”고 했다. 그는 그런 욕망에 짓눌려 ‘자녀를 범죄자로 만드는 부모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똑똑하고 경쟁적인 일부 부모들은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설령 네가 잘못해도 꼭 사과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남을 이겨라(커닝이나 폭력 정도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것만 챙겨라(약하고 아픈 사람 도와줄 필요 없다).’와 같은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보내 자녀들을 냉혹하고 지능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 학교, 사회는 삼위일체가 되어 대학 서열제와 더불어 직업 서열제를 가르친다. 2012년 노동부와 교과부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과 공동으로 고등학교 교과서 7개 과목 16종을 분석한 결과 직업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강화하는 등의 불합리한 기술이나 표현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를테면 “교사와 의사 등의 직업과 같이 ‘선생님’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직업 집단 사이에는…”, “명문대 법대를 수석 졸업한 김 변호사는 이제 한국의 최상위층이 되었다.”는 식이다.

교과서에 기술된 직업 빈도도 전문직에 치중되어 있고, 이들에 대해서는 긍정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반면 단순 노무직, 판매직, 기능직, 농·어업 종사자 등은 기술 빈도도 낮을뿐더러 부정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무거운 짐을 진 그림과 함께 “중학교밖에 못 나왔으니… 이런 일밖에 하지 못하네.”라고 기술한 부분까지 있었다. 이렇게 갑질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 한 단계 발전된 갑질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놀랄 일이 아니다.


‘대학서열 중독증’은 ‘능력주의’ 이념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 · 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오찬호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다만 재미를 위한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 투쟁이자 생존 투쟁이다. 대학서열은 수능점수나 학력평가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아예 노골적인 인간차별로 이어진다. 왜? 수능점수는 ‘진리의 빛’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열이 한두 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흥분한다. 오찬호는 이런 의식과 행태는 아파트 시세 하락을 염려해 주변에 복지시설이 들어오면 결사반대하고 범죄사건이 일어나도 쉬쉬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른바 ‘능력주의’ 이념이다. 능력주의의 구호는 “억울하면 출세하라.”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허구이거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따라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물론 모든 능력을 다 세습의 산물로 볼 수는 없으며, 그런 시각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정반대의 것, 곧 모든 능력을 세습되지 않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보고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격차를 정당화하는 견해, 곧 능력주의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의 차이가 점차 우연과 예상하지 못한 선택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런 우연을 필연인 것처럼 가장하는 게 시대의 유행이 되고 있다.


이카로스 역설에서 벗어나자

지금 우리는 이른바 ‘이카로스 역설(Icaros Paradox)’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상황에서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그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태양에 가까이 감으로써 목숨을 잃고 만다. 우리도 이카로스처럼 태양에 점점 더 근접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인이 빠져든 이카로스 역설은 이른바 ‘경로 의존’의 산물일 수도 있다. 경로의존은 한 번 경로가 결정되고 나면 그 관성과 경로의 기득권 영향력 때문에 길을 바꾸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한 번 길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길로만 다닌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건물이 세워진다. 그 뒤에 아무리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낸다 해도 이미 엄청난 ‘기득권’을 생산한 길을 포기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 좋은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길을 바꾸는 게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길을 따라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도래한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가혹한 투쟁은 ‘을’에게만 해당할 뿐,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청년유니온 초대위원장 김영경의 말처럼, “힘들어도 참으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중단하고, 사회적 약자들끼리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든든한 ‘빽’을 만들”어야 한다.

태양을 향해 계속 날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관성과 타성에 따라 계속 나아가고자 한다면, 곧 전쟁 같은 삶의 토대 위에서 번성한 ‘갑질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지금 이대로’를 고수한다는 건 이른바 ‘생각하지 않는 범죄’가 될 것이다.

* 강준만 - 미국 위스컨신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부터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이미지와의 전쟁 :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와 실천가들」, 「한국현대사산책」(전23권), 「한국근대사산책」(전10권), 「한국대중매체사」, 「세계문화의 겉과 속」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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