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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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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진단, 한국사회: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뿌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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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7 ㅣ No.1300

[경향 돋보기 - 진단, 한국사회]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뿌리는 그리스도인

 

 

스프링벅과 인간

 

아프리카에 스프링벅(지갑영양)이라는 양이 있습니다. 보통 작은 무리를 지어 살지만 개체 수를 보존하려고 큰 집단을 이루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식욕이 타고난 스프링벅의 거대한 무리가 먹이를 찾아 이동을 합니다. 앞선 스프링벅들이 풀을 다 먹으면 뒤의 무리는 먹을 것이 없기에, 더 빨리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앞의 무리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보다 빨리 앞으로 달려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목적을 상실한 채 광란의 질주가 시작되고, 해안가 절벽에 이를 때까지 계속 질주합니다.

 

앞선 스프링벅들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멈추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바로 앞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뒤의 무리가 밀기 때문입니다. 하나 둘 무수히 많은 스프링벅들이 떨어져 죽은 뒤에야 죽음의 질주는 멈춥니다.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 치 앞을 모르고 무작정 달리는 스프링벅과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앞날을 예견할 수 있음에도 ‘너’를 바라보기에는 ‘나’ 하나도 버겁기에, 치열한 경쟁과 서로에게 죽음의 질주를 강요하는 현재 인간의 모습, 누가 더 어리석은 것일까요?

 

 

무엇이 진실일까요 - 현수막 전쟁

 

요즘 거리에서 현수막 전쟁이 한창입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노동개혁’이 각계각층의 반발과 국회에서의 표류로 발목 잡히자 여당에서 ‘박근혜 정부가 일 좀 하게 해주세요.’라고 현수막을 내걸었더니, ‘노동개악’이라고 주장하는 야당에서 ‘박근혜 정부가 그 일하면 우리 쉽게 해고되는 거 맞지요?’라는 현수막을 내겁니다.

 

정부와 지자체 간의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누리과정 예산에 대해서 여당이 ‘교육감님, 정부에서 보내준 누리과정 예산 어디에 쓰셨나요?’라고 묻자, ‘대통령님이 약속하신 누리과정 예산 안 줬다 전해라~.’, ‘만 0~5세 보육, 국가 완전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 공약 제2호입니다.’라고 응수합니다.

 

법과 제도, 그리고 이의 실행을 둘러싼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입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법과 제도만 제대로 만들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아니면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할까요?

 

 

쓰러진 농민과 쓰러뜨리는 공권력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17만 원(80㎏ 기준) 수준이던 쌀값을 21만 원까지 회복시키겠다고 공약했지만, 지금 쌀값은 14만 원대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항의하려고 모였습니다. 쌀값 21만 원 공약을 지켜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초로의 농민이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채 계속 물대포를 맞았고, 쓰러진 농민을 구하려던 사람들마저 물대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관계당국은 불법 폭력 집회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고 합니다.

 

유엔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방한 결과 보고서에 밝힌 것처럼, 경찰의 물대포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함에도 이유 없이 발사되었다면 과도한 법 집행이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 묻고 싶습니다. ‘물대포로 쓰러뜨리기 전에, 농민들이 피눈물로 호소하기 전에, 법치국가에서 왜 사람을 살리는 법과 제도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나쁜 나라’ 아니면 ‘나쁜 사람이 힘 있는 나라’

 

요즘 한 편의 기록영화가 생기가 돌아야 할 양심을, 일상에 쫓겨 사막처럼 메마르게 했던 사람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나쁜 나라’, 생업을 포기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외치며 투쟁하고 있는 희생 학생 엄마와 아빠들의 피눈물 나는 지난 시간을 담은 기록입니다.

 

영상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진도 팽목항에서, 안산에서, 여의도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그리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유가족들이 돌아다닌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엄마와 아빠들의 애끊는 울부짖음과 처절한 몸짓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줍니다.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매정함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동시에 담아내면서 말입니다. “수장된 아이를 가슴에조차 묻을 수 없습니다.”라며 통곡하는 아빠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지는 못할망정 특별법 제정 서명을 호소하며 전국을 돌도록 내모는 이 나라는 정말 ‘나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정말 억울한 죽음을 방치하고 진실 규명을 외치는 이들을 짓누르며 알아서 해줄 것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압박하는 ‘나쁜 사람들이 힘쓰는 나라’입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과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 서명운동’

 

얼마 전 경제단체가 주관하는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대통령이 동참하여 길거리에서 서명하였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자구책으로 강구하는 입법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주관 단체들이 과연 사회적 약자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국민을 보듬어야 할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그들 입맛에 맞추려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하는 국민 500만 명이 피눈물로 호소하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도 이를 외면했던 대통령은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에 서명한  70만 명의 뜻을 존중하라고 연일 국회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마치 법만 제대로 만들어지면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단순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법과 제도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법과 제도를 집행하는 사람이 문제입니까?’

 

 

희망도 절망도 사람에게서 온다

 

어렵사리 누더기 같은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마저도 하위법인 정부 시행령에 걸려 무력하기 그지없습니다. 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누구든지 새 세상을 원합니다. 흔히 새 세상을 새로운 법과 새로운 체제, 새로운 사회구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생명 없는 법과 체제, 구조가 스스로 살맛을 돋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만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이 세상을 곱게 가꾸도록,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 가득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협력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탐욕과 이기심에 물든 죽음의 세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나눔과 섬김으로 함께 살고자 하는 ‘착한 사람’들이 선한 지향으로 사회 체제와 법을 만들고 꾸준히 개혁해 나간다면, 창조주의 위임을 받아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을 살리는 희망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독선과 아집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는 ‘나쁜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악용한다면, 이는 수많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에게 죽음의 올가미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심는 사람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옥죄는 세상입니다. 절망스럽습니다. 슬그머니 모든 것을 법과 체제와 구조에 떠넘기고 제 살길만을 찾는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무관심이 삶의 지혜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희망의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 그들이 우리의 현존과 우정과 형제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우리의 위선과 이기심을 감추려고 기꺼이 빠지는 무관심의 장벽을 모두 함께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자비의 얼굴」, 15항).

 

우리는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벗으로서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에 머물며 신앙을 사유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의와 해방을 삶으로 선포하신 예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 탓 없이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빼앗겨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귀한 생명을 찢기는 마음으로 내던지는 벗들의 피눈물을 씻어주었다고 말입니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무관심이 절망을 낳는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빛이 되어 희망을 밝혀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2천 년 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더욱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뽑으신 까닭은

귀한 보물 삼아 깊은 곳에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둠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어

기쁨과 희망 나누는 이 되라는 주님 뜻 새기십시오.

빛을 죽이려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 가운데 빛으로 사는 것,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빛이 아니라고, 빛이 될 자격이 없다며 쓰러지고 싶을 때

당신에게 불을 놓으신 분 생각하십시오.

한 줌 재가 되어 당신의 모든 것 사라질 때까지

빛으로 빛으로 당신을 모든 이에게 나누십시오.

당신의 사라짐으로 온 세상 환히 밝고

환한 온 세상 가득히 품에 안는 영광을 누리십시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당신은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8지구장 겸 교하본당 주임신부.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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