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19세기 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 양상과 의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8 ㅣ No.871

18~19세기 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 양상과 의미

 

 

국문 초록

 

개항 이전 조선왕조는 정기적으로 보내는 연행사절을 통해 서양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그 주된 통로가 북경의 천주당이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조선과 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18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18세기에 연행사절은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의 안내로 각종 서양 기물(器物)을 관람하고, 서학서(西學書)를 선사받는다. 이들 서학서 중에는 예수회 선교사가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한 천주교 교리서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18세기 연행사절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며, 서교(西敎, 천주교)를 개방적으로 접한 인물로는 이기지(李器之)와 이의봉(李義鳳)이 주목된다.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신분으로 연행한 이들은 둘 다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는 실학적 가풍에서 생장한 젊은 문사(文士)였다.

 

18세기에 연행사절을 통해 전래된 서학서는 조선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천주교 서적은 실세한 남인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들 천주교 서적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한글 번역본이 출현하면서 일반 양인층에게도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악(朴宗岳)이 정조에게 올린 편지를 기록한 《수기》(隨記)를 통해 그러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19세기에는 북경의 천주당 방문이 금지되게 된다. 이에 19세기의 연행록에는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 아라사관(俄羅斯館, 러시아관)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한 사실이 몇몇 연행록에 보인다. 아라사관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하면서 연행사가 주목한 것은 십자가의 형벌에 처해져 죽은 예수의 처참한 형상이었다. 1828년에 연행한 이재흡(李在洽)은 십자가의 예수상을 보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1. 머리말

 

명국(明國)이 존재하던 17세기 전반만 해도 조선왕조는 연행사절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곧바로 수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03년 연행사 이광정(李光庭) · 권희(權憘) 등이 북경에서 가져온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는 바로 전해인 1602년에 마테오 리치가 이지조(李之藻)와 함께 만든 것이다. 1630년 수로(水路)를 통해 연행한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은 등주(登州)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Tcuzzu Joao Rodrigues, 陸若漢)를 만나 서학서(西學書)와 천리경(千里鏡), 홍이포(紅夷砲) 등 각종 서기(西器)를 가지고 귀국한 바 있다. 아울러 1644년 북경의 문연각(文淵閣)에 머물던 소현세자가 남당에 있던 아담 샬(湯若望, Adam Schall von Bell)과 교류하고, 여러 서학서를 지니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처럼 활발했던 서양 문물 접촉은 17세기 중후반 이후 청국(淸國)이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한동안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명청 교체기에 두 번에 걸친 청군의 침략과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조선은 한동안 북벌책(北伐策) 같은 대청 강경론이 득세하였고, 청국 역시 명나라 부흥운동과 삼번(三藩)의 난 등으로 조선을 견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경직된 양국 관계는 18세기 접어들어 변화를 보인다. 청국은 국내의 각종 반란을 진압하고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면서 조선과의 화해를 도모하였으며, 조선 역시 효종대의 북벌론에서 벗어나 청국과 새로운 관계 수립에 나서게 된 것이다. 현전하는 연행록 중에서 천주당 관련 기록이 18세기 연행록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18세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19세기 들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이후 천주당은 금기시되었던 공간으로 보이며, 1801년 발생한 신유박해로 인해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공식적으로 금지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19세기 연행록에는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라사관(俄羅斯館, 러시아관)을 방문하여 서양 문물과 접촉하는 것이 일부 연행록에 산견될 따름이다.

 

북경의 천주당은 당시 조선이 서구 문명과 접촉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의 구실을 하였다. 천주당은 유럽의 선교사가 상주하면서 서구의 과학 및 종교를 전파하는 진원지였는데, 일부 연행록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2) 연행록에 있는 천주당 관련 기록은 매우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천주당 벽면에 그려진 천주상을 비롯한 서양화와 그곳에서 접한 각종 서양 기물들 - 혼천의 · 윤도(輪道, 나침반) · 망원경 · 풍금 · 만년필 · 비연(鼻烟) · 포도주 · 카스테라 - 에 관한 기록이 흔히 보이는 데 비해, 서양의 종교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는 연행사절이 천주당에서 서학(西學)과 접촉하면서도 서기(西器)와 달리 서교(西敎, 천주교)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3) 따라서 서학 일반이 아니라 서교에 초점을 맞추어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 기록과 그 의미를 살펴보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연행록이 아닌 여타 문헌의 기록을 통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에 서교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1784년 봄 북경의 북당에서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이 그해 가을 이벽(李蘗)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집전한 것은 조선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4)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에 있어서 연행이 매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의 수용과 관련하여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이 지니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행록의 기록 그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기록을 통해 조선 내부의 수용 과정을 상호 면밀히 관련지으면서 그 의미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18세기 후반 천주교가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수기》(隨記)란 제명(題名)의 이 필사본은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정조에게 보낸 서찰을 모아놓은 책인데, 여기에는 1791년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도를 색출하고, 그 경과를 보고한 서찰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18세기 후반 천주교가 상당히 성행했으며, 이에 대한 처리를 놓고 정조가 고심했던 당시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수기》에는 이 당시 충청도 일대에 전파된 다양한 천주교 서적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18세기 연행사를 통해 수입된 천주교 서적이 국내에 전파된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방증 사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함 점을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는 18~19세기에 연행사절이 천주당을 방문한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의 논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18세기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 양상을 살펴보고, 3장에서 《수기》를 통해 충청도 지역에 18세기 후반 천주교 서적의 유포 상황을 확인할 것이다. 4장에서는 북경의 천주당 방문이 금지된 19세기에 연행사절이 아라사관의 성당을 방문한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논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서학 일반이 아닌 서교(천주교)의 접촉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할 것이다.

 

 

2. 18세기 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 양상5)

 

지금까지 발견된 연행록은 대략 400여 종에 달하며, 이 중 18세기의 연행록은 100여 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6) 100여 종에 달하는 18세기 연행록 중 북경 천주당 방문 기사는 총 27종의 연행록에서 보인다. 4종의 연행록 중 하나가 넘는 비율로 관련 기사가 보이는바,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1760년(영조 36)에 연행한 이의봉(李義鳳)은 연행의 가장 큰 구경거리로 서양 풍악 · 망원경 · 천주당 그림 및 서양 지도 등을 꼽고 있다.7) 이는 18세기 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며, 이를 방문하는 것이 열풍처럼 불었던 정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18세기 연행록에 보이는 천주당 방문 기사를 표로 나타내 보이면 다음과 같다.8)

 

<표 1>을 통해 우리는 연행사가 방문한 천주당이 대부분 남당(南堂)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홍대용은 남당이 “궁실과 기용(器用)이 네 당 중에서 으뜸이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항상 내왕하는 곳이었다”9)라고 한 바 있는데, 이러한 지적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연행사가 즐겨 찾은 천주당은 동당(東堂)으로, 이는 남당과 함께 사신의 숙소였던 옥하관(玉河館)에 가까이 위치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서양 선교사는 18세기 전반의 경우 쾨글러(Ignatius Kogler, 戴進賢, 1680~1746), 수아레즈(Joseph Suarez, 蘇霖, 1656~1736), 프리델리(Xavier-Ehrenbert Fridelli, 費隱, 1673~1743) 등이 연행사와 접촉한 횟수가 많고, 18세기 후반에는 할레슈타인(A. Von Hallerstein, 劉松齡, 1703~1774)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연행사가 접촉한 선교사는 1790년에 서호수(徐浩修)가 만난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10)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이다. 예수회 선교사는 전반적으로 높은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으며, 현지의 습속에 적응하여 전교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서구의 과학 기술을 이용해 중국 사대부 지식인을 흡인했다. 이 과정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적극적으로 서구의 과학 지식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과정을 통해 천학(天學)의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1644년에서 1775년, 북경의 예수회가 해체되기까지 청나라 조정에서 천문 역산을 담당한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은 대부분 예수회 수도사가 역임했다. 전후로 이 직위를 담당한 예수회 선교사는 8인에 이르렀고, 이 중 쾨글러는 30년간 이 직위에 있었다.11) 신학뿐만 아니라 천문 역학을 비롯한 과학 기술에도 높은 소양을 지니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는 연행사에게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연행사들은 천주당에서 처음 대면한 서양 선교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도인(道人)이나 신선 같은 풍모를 지녔다고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의 높은 문화적 소양에서 우러나온 풍모에서 받은 느낌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의 대다수의 연행사는 연행록에서 천주상(天主像)을 본 소감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천주당 안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인 북벽(北壁)에 걸린 천주상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데서 문화적 충격을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천주상을 처음으로 접한 연행사는 대부분 그림임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핍진한 사실적인 화풍에 감탄하며, 그 감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홍대용의 경우를 예로 들면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는데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소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을 알았다. 안정(眼精)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畵格)이었다”12)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원근법과 명암(明暗)의 대비에 뛰어남이 서양 화풍의 장점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천주당 그림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행사가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다시 홍대용의 경우를 보면 “서쪽 벽에는 죽은 사람을 관 위에 얹어놓고 좌우에 사나이와 계집이 혹은 서고 혹은 엎드려 슬피 우는 모양을 그렸는데, 아니꼬워 차마 바로 보지 못하였다. 왕가에게 그 곡절을 물으니 왕가가 이르기를, ‘이것은 천주가 죽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밖에 괴상한 형상과 이상한 화격(畵格)이 무수하였지만 다 기록하지 못한다”13)고 하였다.

 

한편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절에게 천주당의 서양 선교사들은 많은 서학서를 선물로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표를 통해서 우리는 조영복(趙榮福, 1719년) · 이기지(李器之, 1720년) · 김순협(金淳協, 1729년) · 이의현(李宜顯)과 한덕후(韓德厚, 1732년) · 이의봉(李義鳳, 1761년) 등이 서학서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받은 서학서 중 그 서명이 명시된 것을 보면, 《칠극》(七克) · 《천주실의》(天主實義) · 《만물진원》(萬物眞元) · 《벽망》(闢妄) ·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 · 《주제군징》(主制群徵) · 《직방외기》(職方外記) · 《곤여도설》(坤輿圖說) 등이다. 이 중 지리서인 《직방외기》와 《곤여도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양 선교사가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한 서학서이다. 이들 서학서가 조선에 유입되어 천주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연행록을 남기지 않은 연행사절이 훨씬 많으며, 연행록을 남긴 경우에도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련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임을 고려하면,14) 연행사절을 통한 서학서의 유입은 훨씬 많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1761년에 이의봉이 할레슈타인으로부터 《직방외기》와 《곤여도설》을 받은 이후로는 서학서를 받은 사실이 연행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이유가 조선 내부의 사정인지 아니면 서양 선교사에 대한 청국의 태도 변화에 따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15) 이 시기에 이르러 서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연행록에 이를 기록하는 일을 기피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18세기 연행록 중에서 서양 선교사와 가장 적극적으로 접촉한 연행사로는 1720년에 연행한 이기지(李器之)와 1760년에 연행한 이의봉(李義鳳)을 들 수 있다. 이기지의 《일암연기》와 이의봉의 《북원록》에는 천주당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서양 선교사와 필담한 내용이 연행록 중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부친인 이이명과 이휘중의 자제군관 신분으로 연행에 참가하여 연행사절 중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 연행 당시의 연령 또한 31세와 28세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젊은 나이였다. 아울러 이기지는 노론, 이의봉은 소론에 속하여 당색의 차이는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생장한 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연행록에 보이는 서교에 대한 관점을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이기지는 숙종의 승하를 알리고 시호를 청함과 동시에 경종의 승계를 인준받기 위해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의 정사인 이이명(李?命)의 자제군관으로 연행한다. 이기지는 당시 북경에 있던 세 천주당 - 남당 · 동당 · 북당 - 을 모두 방문하였으며, 《일암연기》(一庵燕記)는 18세기 연행록 중 가장 풍부한 천주당 방문 기사를 담고 있다.16) 이기지는 외조부 김만중(金萬重)에서, 부친 이이명으로 이어지는 실학적 가풍에서 생장한 인물로 서학에 대한 왕성한 관심을 지닌 인물이었다.17)

 

이기지의 서학 접촉 양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거니와,18) 《일암연기》에는 서양 선교사가 조선으로 가는 육로와 해로를 묻는 대목이 4차례나 보이는데, 이 또한 여타 연행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주목된다. 특히 프리델리(Xavier-Ehrenbert Fridelli, 費隱)는 지도까지 꺼내 보이며 3차례나 묻고 있으며, 부베(Joachium Bouvet, 白晋)도 1차례 묻고 있다. 그리고 앙트르콜르(Francois-Xavier D’Entrecolles, 殷弘緖)는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려는 속내까지 대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서양 선교사의 적극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선교사를 대하는 이기지의 개방적 태도에 연유한 것이다. 이기지는 남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를 처음 만나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천지의 동쪽 끝에 살고 당신은 천지의 서쪽 끝에 사는데, 지금 이처럼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어찌 하늘이 베푼 인연이 아니겠습니까?”19)라고 하여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우리의 만남이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기이한 인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기지의 개방적 태도는 그가 성모상(聖母像)을 얻으려 하자, 함부로 다룰까 염려하여 주기를 꺼리는 선교사에 대해 “천주의 가르침이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진다면, 이는 또한 여러분들의 공이 될 것입니다. 천주의 상이 유포된다고 해서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20)라고 하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기지가 만난 여러 선교사 중 프리델리(費隱)와 부베(白晋)가 유독 조선으로 가는 노정에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이들이 강희 연간에 이루어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의 작성에 참여한 인물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21) 프리델리와 부베는 <황여전람도>의 작성을 위해 1709년 조선 북부 지역의 측회(測繪)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구체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조선에 대한 강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일암연기》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전반에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의봉의 《북원록》(北轅錄)은 부친 이휘중(李徽中)이 삼절겸연공사(三節兼年貢使)의 서장관으로 떠날 때 자제군관으로서 연행한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이의봉은 남당에 있는 할레슈타인과 필담을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양의 천문 역법에 대해 토론하고, 이때 그의 서기로 있던 서광계(徐光啓)의 후손 서승은(徐承恩) 또한 알게 되어 그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의봉은 1761년 1월 8일 동당을 처음 방문하여 서양인들이 천주를 독실하게 신봉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기사를 끝맺는다.

 

살펴보건대 천주(天主)란 곧 이른바 만물을 탄생시키는 주재(主宰)로서 마치 우리 유자들이 귀신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서양인들은 삼교(三?)를 숭상하지 않고 오직 천주만을 존숭하는데, 한 번 마시고 먹는 것을 모두 천주가 내려준 것으로 여기어 높이기를 제왕처럼 하고, 사랑하고 섬기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그들의 무리 중 애유략(艾儒略)의 말은 다음과 같다.

 

“조물주가 우리 인류를 세상에 살게 한 것은 마치 넓은 뜰 가운데에 이끌어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고 또 노래하고 춤추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 것과 같다. …대저 조물주의 신통한 능력은 한이 없기 때문에 오대륙 만국에 기이함이 다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생각을 돌려 그 연유를 생각해보아 근원을 돌이킨다면 길은 결코 멀지 않기에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진실로 이에 대해 깨달음이 있게 될 것이다. 함께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바는 이미 이 세상에 자리 잡고 살며 이 잔치를 즐기고 이 음악을 들으니,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을 다하여 끝까지 살펴보는 것이다. 말단에서 본원을 찾아 만물을 창조하신 주재자의 뜻을 생각하며 밝게 하늘을 섬기는 두려움으로 삼가 행한다면 이치에 어긋난 말을 끌어 모아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꾸짖음을 면하지 않겠는가…?”22)

 

위의 내용은 서양 선교사 알레니(艾儒略)가 저술한 《직방외기》(職方外記)의 자서(自序) 중 일부를 초록하여 제시한 것이다. 《직방외기》는 알레니가 1623년에 저술한 책으로 <오대주총도계도해>(五大州總圖界度解), 각 대륙별 총설과 국가별 문화사, <사해총설>(四海總說)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 인문지리서이다. 조선에는 일찍이 1630년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사행하였던 정두원(鄭斗源)이 로드리게스(陸若漢)로부터 얻어 이듬해에 귀국하면서 바친 서책 중에 들어 있어 일찍부터 알려진 서학서다.

 

《직방외기》의 주된 저술 의도는 천주의 뜻에 만들어진 우주에 대한 증명에 있으며, 이에 따라 천주의 뜻에 가깝게 다스려지는 유럽을 이상적으로 서술하고 이는 결국 이상화된 중국 중심 세계관의 해체를 동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이의봉이 인용한 알레니의 서문 또한 자신의 저술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천주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함을 설파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의봉은 이것이 무엇보다도 서양 선교사의 세계관 - 곧 천문과 지리를 대하는 관점 - 을 잘 드러내는 말로 여긴 듯하다. 이에 천주당을 처음 방문한 기사의 말미에서 천주만을 숭상하는 습속에 대해 언급하면서, 《직방외기》에 있는 알레니의 서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 선교사의 저서를 직접 인용해서 서양인의 습속을 소개하는 방식은 여타의 연행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북원록》만의 특징적인 서술 방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의봉의 서학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이었으며, 알레니의 서문을 초록하고 있는 데에서 그가 서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24)

 

한편 서교를 처음으로 접한 18세기 연행사절의 이에 대한 인식은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1720년 사행의 정사였던 이이명은 수아레즈(蘇霖)와 쾨글러(戴進賢)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교에 대해 상제(上帝)를 대하는 것이나 성(性)의 단초를 회복시키려고 힘쓰는 것은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예수의 탄생설은 석가모니의 탄생과 비슷하고 지옥설은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비슷한 것으로 판단했다.25) 이에 비해 1732년에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의 서학서를 선물로 받은 이의현(李宜顯)은 “서양의 도는 하늘을 섬기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유가의 도와 배치될 뿐 아니라 선교와 불교 또한 배척하며 스스로만 높다고 여긴다26)”라고 하여 서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에 연행한 이상봉은 “천주는 생각건대 이른바 조물주라는 것으로 우리 유교에서 귀신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서양인은 삼교(三敎, 유불도)를 숭상하지 않고 오직 천주만을 높이 받들어 물 한 모금 마시거나 숨 한번 쉬는 것도 모두 천주가 내려준 것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높이 받들어 모시기를 제왕처럼 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27)라고 하여 천주는 유교에서 제사하여 받드는 귀신과 같은 존재인데, 서양 사람들이 이를 제왕이나 부모처럼 받들며 의지한다고 하였다. 이상봉의 경우 서교에 대한 호오를 드러내지 않고 그 이치만을 기술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비해 1765년에 자제군관으로 연행했던 홍대용은 “그 학문의 대강은 하늘을 존숭하여 하늘 섬기기를 불도(佛道)의 부처 섬기듯이 하고, 사람을 권하여 조석으로 예배하고 착한 일을 힘써 복을 구하라고 하니, 대개 중국 성인의 도(道)와 다르고 이적(夷狄)의 교회(敎會)여서 족히 말할 것이 없다”28)라고 하여, 서교를 불교와 비슷한 이적의 교리로 이해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18세기 조선 사신들은 대략 천주를 유교의 상제(上帝)와 비슷한 존재로 이해하고, 천당 지옥의 설은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비슷한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면서도 서교에 대한 호오는 개인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수기》(隨記)를 통해 본 18세기 말엽 충청도 지역에 유포된 천주교 서적

 

《수기》(隨記, K3-625)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1책으로 총 105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표지에 ‘辛亥, 壬子, 甲寅, 乙卯’라 적고, 제명을 ‘隨記’라고 하였을 뿐, 저자에 대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장서각 목록에 저자가 박종악(朴宗岳, 1735~1795)으로 되어 있는바, 저자의 생몰 연대를 고려하면 수록된 편지는 1791년부터 1795년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종악의 편지글을 모은 《수기》가 주목되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가 다름 아닌 국왕 정조이기 때문이다. 《수기》를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한 장유승은 정조 어찰이 확인된 것만 약 1,200편에 달하는 데 비해, 신료 측에서 정조에게 보낸 편지가 한 편도 발견되지 않은 점에서 《수기》의 가치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이른바 정조의 어찰 정치의 실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1791년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 내포(內浦)의 천주교도 이존창(李存昌)의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을 정조에게 상세히 보고한 내용이 특히 주목할 만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소개하였다.29)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의 설립에 중심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진 이존창의 신해박해 때의 행적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점을 살펴보기로 하고,30) 《수기》에 언급된 천주교 서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서적명은 연행사를 통해 전래되기 시작한 천주교 서적이 18세기 후반 조선에 전파된 상황을 보여주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존창의 신분에 대해 박종악은 “本以新昌成德山家私賤”이라 하여 본래는 신창현(新昌縣) 성덕산(成德山) 집안의 종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홍가(洪家) 형제(인용자 주 : 홍낙민[洪樂敏] · 홍낙교[洪樂敎]를 말함)와 함께 공부하며 과업(科業)를 익혔다”31)고 하여, 이존창이 천민이면서도 학식을 갖춘 인물임을 말하고 있다. 이존창은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가장 앞장선 인물로 그의 제자 10인이 모두 상민이라고 하였다.32)

 

이존창과 함께 충청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시킨 장본인으로 박종악은 홍낙민과 홍낙교를 지목하고, 그들의 거주지인 예산(禮山) 두촌면(豆村面) 호동리(狐洞里)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였다. 이들 형제는 천주교를 믿는 노복들은 대가 없이 속량시켜 주며, 이웃 중에 믿는 자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홍낙민 · 홍낙교 형제는 이기양(李基讓)을 통해 입교하고, 이존창은 권일신(權日身)에게 배웠다고 하였다.33) 1791년 11월 16일 권일신은 양반 출신 천주교의 괴수라고 지목되고 신문을 당한 뒤 당초 제주도로 유배보내기로 했다가 예산으로 이배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천주교도를 회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34) 그런데 박종악이 11월 20일 보낸 편지를 통해 당시 권일신을 내세워 이존창을 회유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5)

 

《수기》에는 덕산(德山) 별라산(別羅山)에 거주하는 홍지영(洪芝榮)의 이름도 보이는데, 그는 초기 천주교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강완숙(姜完淑)의 남편이다. 박종악은 홍지영 집안의 예를 들어 남녀노소, 존비귀천의 구분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천주교도의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저 이 사술(邪術)을 믿는 자들은 서로 교우[交中]라고 부르며, 주인과 노복 사이에도 존비(尊卑)의 구분이 없고, 멀고 가까운 사이에도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양반가 규수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고 상천(常賤)의 어리석은 여인네도 입으로 전수하며 암송합니다. 노소(老少)와 장유(長幼)를 막론하고 한번 이 사술에 빠지면 미혹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시험 삼아 양반가 규수의 경우를 말해보면 설사 길가는 나그네라 하더라도 만약 스스로 이 교를 믿는 자라고 하면 그 성명과 사는 곳을 묻지 않고, 양반인지 상놈인지도 따지지 않고 모두 내방에서 맞이함을 허락합니다. 그리고는 큰 손님을 공경하듯, 지극히 가까운 친척을 대하듯 합니다. 거처와 음식이 좋고 나쁨을 똑같이 하고, 그들이 떠나갈 때면 반드시 노자를 줍니다[원주 : 이는 곧 덕산 홍지영 집안의 일입니다].36)

 

여기서 예로 들은 양반가 규수는 박종악 자신의 주를 통해 홍지영의 부인인 강완숙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글에는 이른바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의 일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바, 반상과 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며 경제적인 생활까지 상조하는 공동체 생활 규범을 통해 이 지역에서 천주교는 민인(民人)에게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7)

 

위 인용문에서 양반가 규수들이 언문 천주교 서적을 읽는 것이 나오거니와, 《수기》에는 이 당시 천주교도로부터 압수하여 불태운 서적명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박종악은 1791년 12월 11일 정조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에서 각 읍현에서 색출하거나 본인이 자수하며 바친 천주교 서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18세기 말 충청도 지역에 유포된 천주교 서적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에 해당 대목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기로 하는데, 천주교 서적과 관련된 부분은 밑줄을 그어 표시하였다.

 

…日間連接忠州等三四邑所報 則爲邪敎者 實繁其徒 而或有自服者 或有不服者. …列錄于別紙 以備睿覽焉云云.

 

別紙 沔川姜柱三 · 黃惡只 · 朴日得開悟故捧?放送. 金必軍 · 金大允 · 金加床 方書冊二十一卷 官庭燒火云云. 依甘結 限一朔 保放曉諭云云. 申貴得 · 盧莫奉 · 金儀福 · 牟召史 · 金先乭 · 韓奉乭 · 金夫許應取服放送. 河貴福 · 姜世宗 · 劉於叱才 · 金萬益 · 李五直 · 金北失 · 金沓金 · 房白頓 · 朴山興 · 金癸龍 · 金宗宅 · 李快孫 · 金尙要 · 姜占福 · 姜行福取服放送. 以上自官摘發.

 

忠州[원주 : 參奉]洪章輔 · 洪桂榮 聖年廣益全篇之首冊一 問答冊一 七堯三之五冊一 石板眞本演解諺書冊一 日課諺書冊一 九恩祝文冊一 與彌撒規程諺書冊一 天主十誡諺書冊一 聖事問答冊一 二十五言冊一 點聖水經冊二 萬物眞原冊一 七克卷之二冊一 聖慕魁告經冊一 認眞主冊一持冊自首 合十六件 官庭燒火云云. 改過納招放送. 崔宗國 聖敎日課單冊一 天主十誡諺冊一 持冊自首 官庭燒火云云. 改過納招放送. 李箕延 二十五言冊一 盛世芻?冊一 持冊自首 官庭燒火云云. 改過納招放送.

 

保寧崔碧之 · 朴日先 · 車丁卜自現言內 曾有十戒冊子 上年納官燒火云云. 金龍卜 · 金振甲 各納諺書十戒冊一, 自現燒冊, 納招而去. 文莫才 · 林貴奉 · 趙時山自現納招而去.

 

淸州申休權 自官摘發 而冊子十二卷 棄置閔燾家云 故搜出於閔家 官庭燒火戒飭放送. 閔恁 · 閔燾 閔恁自官捉致 閔燾自京來現, 限一朔保放曉諭事發甘. 靑陽金光迪 · 李光祿自官捉來 諺冊各一 官庭燒火 取服放送. 孫巳得自官捉來取服放送. 吳好孫 · 鄭水乭 · 玄明哲納招放送.

 

洪州李太先 · 金奉安 · 金時乭 · 金福成 · 金福水 · 黃德奉 · 黃德金 方冊收聚付丙云云. 自官摘發 捧?放送. 姜致良 · 李晩得 · 李思春 · 申一寬 · 申順乭 · 申一奉 · 申命俊 · 申五長 · 申大貴 · 李判奉 · 金得江 · 姜夫言 · 白士男 · 金得奉 · 金順赤 · 金命卜 持諺文方冊自現 一倂燒火 納招放送. 洪州追後報狀內不知幾許名 自首現納方冊爲六十餘卷 故卽爲付丙云云. 洪芝榮38)等四漢 發甘捉囚 令本官毁?神堂. 金鎭國 · 姜哥 囚禁曉諭事發甘.

 

禮山金三得 出於李存昌口招 自服放送.

 

德山金星玉 諺文件記四 眞諺冊子各一 自官摘發 營庭燒火 自服放送. 印彦民自官摘發 自服放送.

 

天安韓奉伊 · 李介奉 · 黃有卜 · 崔寬卜 · 金明卜 · 柳卜哲 · 李就汗 · 崔斗古金 · 李卜乭 出於李存昌口招 自官捧?放送.

 

稷山 吳士瞻 · 鄭寬宗 · 鄭永福 自官捉來 納拷放送. 諺書十餘行片紙念珠一條?燒火.

 

여기에 보이는 100여 명의 인물이 모두 천주교도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이 천주교 책자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관아에서 문초를 받거나 스스로 자수한 인물이기에 당시 충청도 일대에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여러 사람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충주의 참봉으로 소개되는 홍장보(洪章輔)와 홍계영(洪桂榮)이니, 이들이 자수하여 관아에 바쳤다는 책은 구체적인 서명이 열거되어 있다. 이 중 《성년광익》(聖年廣益) · 《이십오언》(二十五言) · 《만물진원》(萬物眞原) · 《칠극》(七克) 등은 예수회 선교사가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천주교의 교리 문답서로 추정되는 《문답》(問答) · 《성사문답》(聖事問答) · 《인진주》(認眞主), 천주교 신자로서 행할 기도문을 모은 것으로 보이는 《일과》(日課), 미사 의식을 풀이한 것으로 보이는 《여미살규정언서》(與彌撒規程諺書), 십계명을 풀이한 《천주십계언서》(天主十誡諺書), 세례 의식과 관련된 책으로 추정되는 《점성수경》(點聖水經), 묵주 기도와 관련된 내용으로 보이는 《성모괴고경》(聖慕魁告經) 등의 서명이 확인된다.39) 한편 위의 기록에서 “영본관훼철신당”(令本官毁?神堂)이라 한 것은 홍주(洪州) 응정리(鷹井里)에 거주하는 원백돌(元白乭)이란 이가 자신의 집안에 천당을 설치한 것40)을 없앴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한 신당(神堂)은 아마도 ‘천주상을 봉안한 별당’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 편지에서 박종악은 언문책은 반드시 ‘언서’(諺書)라 기록하여 한문 서적과 구별했으며, 해당 서적의 책 수 또한 일일이 밝히고 있다. 참봉 신분인 홍장보와 홍계영이 지닌 15종의 서책 중에서 4종의 책 - 《석판진본연해언서》(石板眞本演解諺書) · 《일과언서》(日課諺書) · 《여미살규정언서》(與彌撒規程諺書) · 《천주십계언서》(天主十誡諺書) - 이 언문책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구체적인 서명을 알 수 있는 것은 충주 지역 최종국(崔宗國)이 지닌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천주십계언》(天主十誡諺), 이기연(李箕延)이 지닌 《이십오언》(二十五言)과 《성세추요》(盛世芻?)이다. 그리고 보령 지역의 최벽지(崔碧之) · 박일선(朴日先) · 차정복(車丁卜) 3인이 지니고 있다가 바쳤다는 《십계》(十戒), 김덕돌(金德乭)이 지닌 《언서성경일과》(諺書聖經日課), 김용복(金龍卜)과 김진갑(金振甲)이 각기 바쳤다는 《언서십계》(諺書十戒)가 있다. 여러 서적 중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천주십계》(天主十誡)인데, 최벽지(崔碧之) · 박일선(朴日先) · 차정복(車丁卜) 3인이 바쳤다는 《십계》 외에는 모두 언문책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밖에 ‘方書冊二十一卷’, ‘冊子十二卷’, ‘方冊六十餘卷’ 등의 기록을 통해 그 서명은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천주교 서적이 당시 널리 유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언문 서적으로 확인되는바, 18세기 말엽 충청도 일대에 일반 양인층에 천주교가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 천주교 서적은 대략 1787년경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천주교 신앙의 전파 방향이 민인(民人)들에게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로 파악되는데,41) 위의 기록은 이러한 추정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충청도 일대에 한글 천주교 서적의 유포를 주도한 핵심 인물로는 역시 이존창이 지목되고 있다. 박종악은 천주교도 색출 사건을 마무리하고 이듬해인 1792년 1월 3일 편지에 충청도 일대 천주교의 동향과 대처 방안을 제시한 장문의 글을 따로 작성하여 보고한다. 이 글에서 박종악은 서적을 등사하여 유포하는 방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핵심 인물로 이존창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42)

 

 

4. 19세기 연행사절의 아라사관(俄羅斯館) 천주당 방문 양상

 

18세기 연행사절들이 서양의 문물과 접촉하는 대표적인 통로가 북경의 천주당인 데 비해, 19세기 연행사절에게 천주당은 금지된 공간이었다. 이에 19세기 연행록에서는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러시아 공관인 아라사관(俄羅斯館)을 방문하여 서양 문물과 접촉하고 그곳의 천주당을 방문한 사실이 몇몇 기록에서 보이기에, 이를 중심으로 연행사의 서학 접촉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가 개항으로 나아가는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활발해지기에, 청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양 문물과 접촉했던 연행의 의미가 상당히 희석되게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19세기 전반의 연행록에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앞에서 《수기》를 통해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도를 체포하고 관련 서적을 불태우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1791년 이후로는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유화적인 정책도 이전에 비해 강경한 태도로 바뀌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세기의 벽두인 1801년 발생한 신유박해가 발생한다. 관련자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이승훈과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尹有一) 등이 북경의 천주당 선교사들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아울러 서양으로부터 전함과 군사를 원조받아 조선 정부에 천주교의 전파를 허용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계획했음이 밝혀진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북경의 천주당은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지목되면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이 공식적으로 금지된다.43) 천주교는 이제 불교와 같은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체제 전복적인 위험성을 갖추고 있는 불온한 사상이며 서양은 이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지목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839년(헌종 5)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또다시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게 된다.44)

 

한편 청국은 강희제(1661~1722) · 옹정제(1722~1735)를 이어 건륭제(1736~1795)가 치세하던 18세기의 전성기를 지나 각종 민란이 발생하며 쇠퇴기에 접어든다. 청국은 19세기 들어 서양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전파도 금지하였다.45) 아울러 아편 수입으로 인해 누적된 사회적 모순은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46)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연행사절이 북경에 체류해 있으면서 천주당을 비롯한 서양 문물에 대해 접촉하는 일은 기피되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천주교로 인해 대대적인 옥사가 벌어지고, 그 배후의 존재로 서양세력이 지목되는 상황에서는 서구 문물에 대한 접촉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에서도 조심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의 연행록에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관련 기록이 매우 드물게 보인다. 19세기의 연행록으로 현전하는 것은 대략 60여 종에 달하며, 이 중 1864년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연행한 기록은 약 40종에 이른다.47) 여기에서는 철종 연간까지 연행했던 사신들의 연행록을 대상으로 아라사관을 방문하여 서학과 접촉한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북경에 있는 아라사관의 설치 과정부터 알아보기로 한다.48)

 

17세기 초 이래 동방으로 진출한 러시아가 청국과 최초로 체결한 조약은 1689년의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이었는데 이에 의하여 청 · 러 양 국민의 교역의 자유가 규정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상대(商隊)가 북경에 들어와 교역을 하였지만 교역 자체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상인은 200명 규모로 3년에 한 번 육로로 북경을 방문하여 80여 일간 머물며 교역을 하였다. 이때 이들의 숙소가 회동관(會同館)이었는데, 이곳은 조선 사신 일행이 머물던 숙소와 같았다. 이들이 회동관에 체류하는 동안 병부(兵部)의 감시가 엄격하고, 청국과 러시아와의 교역을 둘러싼 대립이 끊이지 않아 결국 1727년(옹정 5)에 캬흐타(Kyakhta)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5조에 북경 회동관에는 이후 러시아인들만이 거주하게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북경에는 선교와 유학 명목으로 거주하는 러시아인이 생겼고, 이들은 회동관 남관에 거주하며 종교와 교육상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들어 회동관을 근거로 이후 러시아 공관으로 발전시켜 근대 중국과 러시아의 접촉 창구로 사용하였다.

 

사실 18세기까지만 해도 연행사절은 러시아인을 ‘코가 큰 오랑캐’[大鼻?子]라 부르며 야만시하였다.49) 러시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19세기 들어 천주당 방문이 금지되고 아라사관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차 바뀌게 된다.50) 여기에는 아라사관이 우리 사신의 숙소인 옥하관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1863년까지 연행한 이들이 남긴 연행록 중에서 아라사관을 방문한 기록이 보이는 것은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1822년 연행), 이재흡(李在洽)의 《부연일기》51)(赴燕日記, 1828년 4월 연행), 박사호(朴思浩)의 《심전고》(心田稿, 1828년 10월 연행), 강시영(姜時永)의 《유헌속록》(?軒續錄, 1829년 연행), 이항억(李恒億)의 《연행일기》(燕行日記, 1862년 연행) 등 총 5종으로 확인된다.52)

 

19세기 전반 연행 사절들에게 아라사관의 문물 중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십자가의 예수상을 비롯한 서양화와 자명종 · 풍금 · 면경(面鏡) · 사진기 등의 근대 기물이었다. 여기에서는 본고의 목적과 관련하여 아라사관 안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사관의 천주당 관련 기록은 《연행일기》를 제외한 《연원직지》 · 《심전고》 · 《부연일기》 · 《유헌속록》에 보인다. 다만 이 중 《유헌속록》에서 강시영은 이른바 신상(神像)을 모신 당이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서장관으로 연행에 참여한 그는 귀국해서 조정에 올린 <문견별단>(聞見別單)의 첫 조목에서 “황제는 문치를 숭상하고 이단을 심히 배척하여 천주교의 무리에 대해 매우 통분해하고 있습니다. 대개 계유(1813) 연간에 천리교(天理敎)의 난53)을 소탕한 이후로는 법으로 엄히 금지한다고 합니다”54)라고 청국의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용에서 짐작되듯이, 강시영은 천주교를 금지하는 방침에 따라 천주당을 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아라사관 안에는 넓은 뜰이 있고, 천주당은 이 뜰의 남쪽에 있었다. 천주당의 모습에 대해 김경선은 “뜰 남쪽에 대들보가 없는 높은 각(閣) 한 채가 있었다. 각의 제도는 이상하여서 정면으로 보거나 측면으로 보거나 사면이 모두 같았다. 아래는 널찍하고 위는 뾰족하게 솟았으며 벽돌을 쌓아 처마에 닿았다. 각 위에는 두어 장(丈)의 금표(金標)를 세워 두었는데, 공중에 높이 우뚝 솟아 있었다. …대개 그 나라는 서양과 가까워서 그 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서양의 제도를 모방하여 천주의 상을 봉안한다고 한다”55)고 말하고 있다.

 

아라사관의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절이 가장 충격적으로 접한 것은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상이다. 이재흡의 《부연일기》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두루 구경하고 한 곳에 이르자, 문이 굳게 잠겼기에 자물쇠를 열게 하여 들어갔다. 외간(外間)에 가로 막은 칸막이가 있는데 모두 특이한 나무에 조각을 하여 만들었고, 칸막이마다 모두 산발한 사람을 그렸다. 방 안은 우뚝 솟았으며 사방을 벽돌로 높이 쌓았고, 둥근 창문이 서로 비치는데 모두 유리를 사용하였다. 그 칸막이를 열고 안 칸으로 들어가니 주벽(主壁)에 죽은 사람 하나를 걸어 놓았다. 대개 벽 위에 십(十)자로 된 나무판자를 붙이고 사람의 머리 위와 사지(四肢)에 모두 쇠못을 박아 내걸어, 마치 거열(車裂)하는 형상과 같은데 완연히 고결한 풍채의 사람이었다. 피부와 살, 손톱과 머리카락이 꼭 살아있는 사람 같은데 온몸이 나체였으며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쇠못 자리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뚝뚝 떨어지는데, 그 얼굴을 보니 방금 죽어 식지도 않은 것 같아 현기증이 나도록 참혹하여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56)

 

십자가의 예수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난 뒤, 난생처음 이를 대하고 놀란 마음에 현기증이 나서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피 흘리고 있는 끔찍한 형상을 보고는, 연행사들은 도대체 이를 신상(神像)으로 모시고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이재흡의 마두가 그 연유를 묻자, 안내한 이는 예수가 형벌을 받아 죽은 모습이라고 답한다.57) 이 말을 듣고 나서 이재흡은 국내에서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엄금하여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는데도 천주교 신자들이 태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지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대부분의 사대부는 그 연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다만 천주교의 교리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나 추측할 뿐이었다.58) 그런데 십자가의 형벌에 처해 죽어가는 예수의 상을 보고, 이재흡은 나름대로 그 해답을 얻게 된 것이다.

 

1832년에 연행한 김경선은 아라사관을 방문하고 이를 별도의 기문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 중 천주당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뜰 남쪽 높은 각(閣) 아래에 이르렀다. 정사, 부사와 성신(聖申) 등 여러 사람이 서쪽 벽의 홍예문(虹霓門)을 따라 들어가서 조금 있다가 돌아왔다. 그들이 구경한 바를 말해 주기를,

“그 안에 들어가니 좌우에 각각 금 자물쇠로 굳게 봉해 둔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니, ‘삭망(朔望)에 천주에게 천재(薦齋)할 때에 입는 법복(法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보기를 간청하자 매우 난처한 기색을 지었는데,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비로소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관은 평상시에 쓰는 것과 같았으나 금빛이 더욱 휘황찬란하였으며, 옷 또한 금을 입혔는데 우(又) 자의 모양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두관천(頭貫穿)인 듯하였습니다. 각 안에는 문목(文木)으로 깎아 만든 문장(門障)을 비껴 놓아두었으며, 문 앞에는 유리로 된 큰 등 3개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 문안에 들어가 동쪽 벽 위를 보니, 서쪽을 향하여 천주상을 걸어두었습니다. 천주의 상은 모습이 매우 맑고 여위었으며 온몸이 알몸으로 단지 두어 자의 흰 비단 자락으로 볼기와 허벅지를 가렸을 뿐이었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제도가 우리나라의 패랭이[平?子]와 같았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등립(藤笠)인 듯하였습니다. 방금 형벌을 당하여 머리 부분이 반나마 숙여져 거의 땅에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또 쇠못으로 가목(架木) 위에다 두 손을 못질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비린내 나는 피가 진짜로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참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서학에서 말하는 예수[耶蘇]이다.59)

 

김경선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천주당을 보고 온 일행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술해 놓은 것이다. ‘삭망(朔望)에 천주에게 천재(薦齊)할 때 입는 법복(法服)’이란 미사복을 말하는 듯한데, 그 모양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리고 동쪽 벽에 걸린 천주상의 모습을 말하였는데, 머리에 쓴 면류관을 우리나라의 패랭이에 비유하고 있다. 일행의 이 같은 설명을 듣고 나서, 김경선은 이것이 예수상이라고 하고 있다. 이 밖에 박사호의 《심전고》에도 아라사관의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이 보이는데, 위의 두 기사에 비해 그 내용이 소략하고 별다른 특이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60)

 

 

5. 맺음말

 

개항 이전 조선왕조는 정기적으로 보내는 연행사를 통해 서양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그 주된 통로가 북경의 천주당이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조선과 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18세기에 본격화되었다. 18세기 전반에 연행사절은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의 안내로 각종 서양 기물(器物)을 관람하고, 서학서를 선사받는다. 18세기 전반에 연행사절을 통해 전래된 서학서는 조선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천주교 서적은 실세한 남인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천주교 서적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한글 번역본이 출현하면서 민인(民人)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이니, 《수기》를 통해 그러한 일면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말엽 진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의 처리 과정에서 정조는 천주교에 대한 이전의 유화적인 태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북경의 천주당 방문은 금지되었으며, 이에 19세기의 연행록에는 아라사관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학을 접촉하게 된다.

 

19세기 들어 천주교가 체제를 전복하는 불온한 사상으로 간주되고 서양은 이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지목되면서 연행록에는 천주당 관련 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전하는 연행록을 읽다 보면, 대부분 연행록의 저자들이 서기(서양의 과학 문물)가 아닌 서교(천주교)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느껴진다.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이 지니는 의의를, 특히 천주교의 수용과 관련해 깊이 있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서양 선교사가 남긴 관련 기록을 함께 고찰해야 그 의미가 온전히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과 학문의 벽을 뛰어넘는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바, 향후 이러한 연구가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1. 자료

姜世晃, 《豹菴燕京編》(민족문화추진회 편, 《한국문집총간》 속집 80, 《豹菴遺稿》).

姜浩溥, 《상봉녹》(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下, 2008).

金景善, 《燕轅直指》(《국역 연행록선집》, 민족문화추진회, 1976).

金舜協, 《燕行日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8,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金正中, 《燕行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75,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金昌業, 《老稼齋燕行日記》(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2 · 33, 동국대학교출판부, 2001).

南泰齊, 《椒蔗錄》(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朴思浩, 《心田稿》(《국역 연행록선집》, 민족문화추진회, 1976).

朴宗岳 저, 《隨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필사본(도서번호 : K3-625).

白景炫, 《燕行錄》(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中, 2008).

徐有聞, 《戊午燕行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62~64,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徐浩修, 《熱河紀遊》(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51,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嚴 璹, 《燕行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40,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兪拓基, 《知守齋燕行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8,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李健命, 《寒圃齋使行日記》(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上).

李繼祜, 《燕行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96 · 97,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李器之, 《一庵燕記》(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上, 2008).

李魯春, 《북연긔?》(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본).

李商鳳, 《北轅錄》(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上, 2008).

李 , 《燕行記事》(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53,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李宜顯, 《壬子燕行雜識》(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5,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李?命, 《燕行雜識》(민족문화추진회 편, 《한국문집총간》 172, 《疎齋集》).

李在洽, 《부연일기》(《국역 연행록선집》, 민족문화추진회, 1976).

李恒億, 《燕行日記》(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79~84,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鄭光忠, 《燕行日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61,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趙尙絅, 《燕?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7,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李德懋, 《入燕記》(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57,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朴趾源, 《熱河日記》(민족문화추진회 편, 《한국문집총간》 252, 《燕巖集》).

趙 ?, 《燕行日錄》(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 《연행록선집보유》 中, 2008).

趙榮福, 《燕行日錄》(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36,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韓德厚, 《燕行日記》(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50,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洪大容, 《을병연행록》(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49,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고전종합DB.

김경선 저, 신익철 역, 《국역 燕?日錄》, 의왕향토사료관, 2011.

신익철 편저, 《연행사와 북경 천주당》, 보고사, 2013.

임기중 · 부마진 편, 《연행록 일본소장편》,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1.

줄리오 알레니 지음, 천기철 옮김, 《직방외기》, 일조각, 2005.

홍대용 저, 김태준 · 박성순 역,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 을병연행록》, 돌베개, 2001.

 

2. 논저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서양과 조선 - 그 이문화 격투의 역사》, 학고재, 1998, 57~64쪽.

김동건, <이기지의 《일암연기》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 학위 논문, 2007.

- - -, <《일암연기》에 나타난 글쓰기 방식>, 《민족문화》 40, 한국고전번역원, 2012, 235~264쪽.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러시아 이해>, 《한국실학연구》 16, 한국실학학회, 2008, 349~378쪽.

노대환, <조선 후기의 서학유입과 서기수용론>, 《진단학보》 83, 1997, 121~154쪽.

신익철, <이기지의 《一菴燕記》와 西學 접촉 양상>, 《동방한문학》 29, 동방한문학회, 2005, 163~192쪽.

신익철, <연행사와 북경 천주당>, 《한국한문학연구》 31, 한국한문학회, 2013.

원재연, <17∼19세기 조선사행의 북경 천주당 방문과 서양인식>, 《서세동점과 조선왕조의 대응》, 한들출판사, 2003, 181~213쪽.

- - -, <17∼19세기 연행사의 북경 내 활동공간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6, 2009, 205~262쪽.

임종태, <극동과 극서의 조우 : 이기지의 《일암연기》에 나타난 조선 연행사의 천주당 방문과 예수회사의 만남>, 《한국과학사학회지》 31-2, 2009, 377~411쪽.

- - -, <서양의 물질문화와 조선의 衣冠 : 이기지의 《일암연기》에 묘사된 서양 선교사와의 문화적 교류>, 《한국실학연구》 24, 2012, 367~401쪽.

장유승, <朴宗岳이 正祖에게 보낸 편지>, 고전한국학연구회 31차 발표문, 2014. 1. 20.

정혜중, <19세기 조선 사행 김경선의 북경체험과 외국 정보 이해>, 《중국사연구》 37, 중국사학회, 2005, 141~170쪽.

조 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조창록, <학산 서호수와 《열하기유》 - 18세기 서학사의 수준과 지향>, 《동방학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 171~198쪽.

한영규, <19세기 한중 문인 교류의 새로운 양상 - 《부연일기》 · 《서행록》을 중심으로>, 《인문과학》 45,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125~150쪽.

 

費賴之 저, 馮承鈞 역, 《在華耶蘇會士列傳及書目》, 中華書局, 1986.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中華書局, 1988.

杜赫德(Jean-Baptiste Du Halde) 저, 鄭德弟 · 呂一民 · 沈堅 · 朱靜 · 耿昇 역, 《耶蘇會士中國書簡集》, 大象出版社, 2005.

 

------------------------------------------------

 

1)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서양과 조선 - 그 이문화 격투의 역사》, 학고재, 1998, 57~64쪽 참조.

 

2) 필자는 연행사절이 천주당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을 찾아내어 번역한 바 있다(《연행사와 북경 천주당》, 보고사, 2013). 이 중에는 18세기에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이 27종이고, 19세기에 아라사관을 방문한 기록이 5종이다. 이 외에 19세기의 연행록 중에는 천주당을 방문하지는 못하였으나, 멀리서 보이는 외관이나 전대의 관련 기록을 초록한 것이 일부 보인다.

 

3) 본고에서 서학은 서양의 종교와 과학 기술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며, 양자를 분리할 경우 종교는 서교(西敎)로, 과학 기술은 서기(西器)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노대환, <조선 후기의 서학유입과 서기수용론>(진단학회, 《진단학보》 83, 1997)에서 구분한 개념을 따른 것이다.

 

4) 이에 대해서는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회의 기원과 그 배경>,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참조.

 

5) 필자는 <18세기 연행사와 서양 선교사의 만남》(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51, 2013)을 통해 18세기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 양상을 살펴본 바 있다. 이 논문은 18세기 연행사의 서학 접촉 양상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것인데, 이 장에서는 이 논문을 참조하면서 서교와의 접촉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였음을 밝혀 둔다.

 

6) 이는 임기중이 편찬한 《연행록전집》(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연행록선집보유》(2008), 그리고 임기중 · 부마진이 편찬한 《연행록 일본소장편》(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1)을 대상으로 추산한 것이다. 이 중 국문본과 한문본이 함께 전하는 것은 姜浩溥의 《桑蓬錄》과 《상봉록》, 李義鳳의 《北轅錄》과 《셔원녹》, 洪大容의 《燕記》와 《을병연행록》, 朴趾源의 《熱河日記》와 《열하일기》의 4종이다.

 

7) 《北轅錄》, <往來總錄> 권1, “第一奇觀, ?門烟樹, 西洋風樂及遠鏡天主堂畵 圓明園宮室. 其次, 西洋方輿圖 太液池, 五龍亭, 雍和宮轉臺, 正陽門外市肆, 寧遠衛祖氏牌樓, 宋家庄敵樓, 弘仁寺萬佛”(《연행록선집보유》 상, 731쪽).

 

8) 이 표는 원재연이 <17~19세기 조선사행의 북경 천주당 방문과 서양인식>에서 도표로 제시한 <1649~1876년 연행록에 나타난 천주당 관련기록>(《교화와 역사》 277~27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 여기에서는 《서세동점과 조선왕조의 대응》, 한들출판사, 2003에 재수록된 글을 참고하였다)과 <17~19세기 연행사의 북경 내 활동공간 연구>에서 제시한 <17~19세기 연행사 북경 내 유관 일람표>(《동북아역사논총》 26, 2009)에서 제시한 것 중 천주당 관련 기록이 있는 것을 참고하고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18세기 연행록 중 천주당 방문 기록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번에 새로 제시한 자료는 총 16종으로 * 표시한 연행록이며, 진한 글자는 천주상을 관람하거나 서학서를 접한 것을 표시한 것이다.

 

9) <劉鮑問答>, 《국역 담헌연기》, 민족문화추진회, 1976.

10) 구베아 주교는 1782년 북경 교구장에 임명되어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여 초창기 천주교회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1) 이상 예수회의 중국 전교에 관한 소개는 杜赫德(Jean-Baptiste Du Halde) 저, 《耶蘇會士中國書簡集》(鄭德弟 · 呂一民 · 沈堅 · 朱靜 · 耿昇 역, 大象出版社, 2005)의 첫머리에 실린 鄭德弟의 서문을 참고하였다.

 

12) 《湛軒燕記》, 1766년 1월 9일 기사.

13) 《을병연행록》, 1766년 1월 24일 기사.

 

14) 이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실례를 1790년에 연행한 서호수(徐浩修)의 경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호수의 연행록은 《연행기》(燕行記)와 《열하기유》(熱河紀遊) 두 종류가 전해지는데, 두 책을 비교해보면 《연행기》에는 서호수의 서문과 서학과 관련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 《연행기》에는 누락된 《열하기유》의 서학 관련 기사는 <1790년 7월 26일 기사>, <1790년 8월 19일 기사>, <1790년 8월 22일 기사> 등 총 3건이다. 이 중 1790년 7월 26일 기사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의 묘지를 방문하고, 자신의 감회를 적은 것이다. 연행록에서 서양 선교사의 묘지를 방문한 기록은 《열하기유》가 유일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는 마테오 리치를 애도하는 고문(告文)까지 수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조창록은 <학산 서호수와 《열하기유》 - 18세기 서학사의 수준과 지향>(《동방학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에서 신유사옥(1801) 이후 후손들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산삭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15) 이와 관련해 《을병연행록》에는 홍대용과 함께 천주당을 방문한 이덕성이 천주당을 떠나오면서 “몇 년 전에는 천주당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가장 반겨하며 대접하는 음식이 풍비하고 혹 서양국 소산으로 답례하는 선물이 적지 아니하더니, 근래는 우리나라 사람의 보챔을 괴롭게 여겨 대접이 이리 낙락(落落)하니 통분합니다”(1766년 1월 19일 기사)라고 한 것이 보인다.

 

16) 이기지의 《일암연기》에는 8차에 거친 천주당 방문과 11차에 걸친 서양 선교사와의 서신 교환, 그리고 4차에 걸친 서양 선교사의 관소 방문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는 18세기 연행록 중 가장 풍부한 천주당 관련 기록이다.

 

17) 신익철, <이기지의 《一菴燕記》와 西學 접촉 양상>, 《동방한문학》 29, 동방한문학회, 2005 참조.

 

18) 신익철의 위의 논문을 비롯하여 김동건, <이기지의 《일암연기》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2007)에서 전반적으로 다룬 바 있고, 임종태, <극동과 극서의 조우 : 이기지의 《일암연기》에 나타난 조선 연행사의 천주당 방문과 예수회사의 만남>(《한국과학사학회지》 31-2, 한국과학사학회, 2009) ; <서양의 물질문화와 조선의 衣冠 : 이기지의 《일암연기》에 묘사된 서양 선교사와의 문화적 교류>(《한국실학연구》 24, 한국실학학회, 2012)에서 서양 선교사와의 교류 양상과 그 의미를 다각도로 고찰하였다. 한편 김동건, <《일암연기》에 나타난 글쓰기 방식>(《민족문화》 40, 한국고전번역원, 2012)에서는 《일암연기》의 문답체 및 고증적 글쓰기 방식이 지닌 의미를 해명하였다.

 

19) 余書問曰 : 吾居天地之極東, 君居天地之極西, 今此會面, 豈非天緣?(《연행록선집보유》 上, 304쪽).

 

20) 蘇 · 戴二人, 各出他小畵二三丈贈之. 其中小錦片塗墨, 而空人形, 若陰刻印本者然. 畵作女人抱子狀, 欲與而還置, 甚有吝惜意. 余問其故, 答此是天母之像, 若慢屑待之, 與受皆不好云. 余曰 : “天主之敎, 若行於東國, 是亦諸公之功, 天主之像, 流布何害?” 三人皆以爲君言極是, 遂與之(《연행록선집보유》 上, 315쪽).

 

21) 이에 대해서는 임종태 또한 앞의 논문 <서양의 물질문화와 조선의 衣冠 : 이기지의 《일암연기》에 묘사된 서양 선교사와의 문화적 교류>에서도 그 의미를 살펴본 바 있다(385~387쪽). 方豪는 《中國天主敎史人物傳》(中華書局, 1988)에서 명청 대 중국 천주교 역사에서 과학 방면에 있어 선교사들의 집단 작업의 대표적인 것으로 명말에 이루어진 숭정역서(崇禎曆書)의 편찬과 청초에 중국 전역의 실측에 기반한 <황여전람도>의 작성을 들고 있다. 중국 전역을 실제로 측량하고 이에 기반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이 작업은 1718년까지 10여 년간 서양 전교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완성된 지도에는 만주, 조선, 서장(西藏)을 비롯해 중국 전역의 총도(總圖)가 포함되었는데, 조선 지도는 조선에서 입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22) 《북원록》, 1761년 1월 8일 기사. “按天主, ?所謂造物主宰, 如吾儒所謂鬼神也. 西人不?三?, 唯尊天主, 一?一喙, 皆以爲天主之賜, 以尊奉之若帝王, 愛戴之如父母. 其徒艾儒略之言曰 : ‘造物主生我人類於世也. 如進之大庭中, 令饗豊?, 又娛歌舞之樂也. …夫唯造物主之神化無量, 是故五方萬國之奇詭不窮. ?一轉念思厥所由, 返本還原, 徑固不遠, 區區之愚, 良有見于此爾. 所願共戴天覆地者, 旣幸宅是庭, 饗是?, 觀是樂, 回而遡流窮源. 循末求本, 言念創設萬有一大主宰, 而?然昭事之是?, 則?言?粹庶其不貽說鈴之?乎…?’”(《연행록선집보유》 상, 836~837쪽)

 

23) 이는 천기철이 《직방외기》를 번역하고 이 책의 성격과 조선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을 고찰한 논문 <《직방외기》의 저술 의도와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줄리오 알레니 지음, 천기철 옮김, 《직방외기》, 일조각, 2005)의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24) 이의봉은 《직방외기》와 함께 《곤여도설》(坤輿圖說)의 내용 또한 소개하고 있는데, 그 분량이 무려 원문으로 49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다.

 

25) 蓋其對越上帝, 勉復性初, 似與吾儒法門, 無甚異同, 不可與黃老之淸?, 瞿曇之寂滅, 同日而論. 又未嘗絶倫背理, 以塞忠孝之塗, 海內之誦羲文周孔之言者, 孰不樂聞? 然天主之降, 彷彿牟尼之生, 地獄之說, 反取報應之論, 何也? 思以此易天下則難矣(《疎齋集》 권10, <與西洋人蘇霖戴進賢>).

 

26) 西洋之道, 以事天爲主, 不但與儒道背異, 亦斥仙佛二道, 自以爲高(《陶谷集》 권30, <壬子燕行雜識>).

 

27) 按天主, 卽所謂造物主宰, 如吾儒所謂鬼神也. 西人不尙三敎, 唯尊天主, 一飮一喙, 皆以爲天主之賜, 以尊奉之若帝王, 愛戴之如父母(《北轅錄》 권4, 1761년 1월 8일 기사).

 

28) 《을병연행록》, 1766년 1월 7일 기사.

29) 장유승, <朴宗岳이 正祖에게 보낸 편지>, 고전한국학연구회 31차 발표문, 2014. 1. 25.

 

30) 《수기》는 18세기 후반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사를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전문적 식견을 갖춘 분의 별도의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31) 已自幼時, 與洪也兄弟, 同爲工夫, 頗習科業(《수기》, <壬子正月初三日>).

 

32) 其(필자 주 : 이존창을 말함)弟子, 天安崔斗古金 · 韓奉伊 · 崔完卜 · 李介奉 · 黃有卜 · 金明卜 · 柳卜哲 · 李卜乭 · 李就汗 · 禮山金三得等十人段, 皆是常漢(《수기》, <辛亥十一月二十日>).

 

33) 自六七年以來, 樂敎樂民兄弟, 崇惑邪敎, 倡爲窩主, [원주 : 洪則受敎於前文義縣令李基讓, 李則受學於楊根權日身, 家人謂南敎] 奴屬之效則者, 燒其籍而無價放良, 隣人之從學者, 恤其窮而周給衣糧(《수기》, <壬子正月初三日>). 여기에서 밑줄 친 어구 중 ‘南敎’란 말은 의미가 분명치 않은데, 혹 ‘남인의 교’란 뜻이 아닌가 추측된다.

 

34) 권일신(權日新)을 호서(湖西)로 이배(移配)하여 사학(邪學)을 하는 자들을 회개시켜 깨우치도록 했다. 일신이 옥중에서 회개하는 글을 짓자 형조가 이를 아뢰니, 상이 그가 진실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사학을 하는 지방으로 이배하여 실제로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16일).

 

35) 權日身永絶邪學, 快向正道, 故下送湖西地方, 使之竭心曉諭渠之徒黨, 以爲立跡效力之方. 然則權是巨魁, 巨魁如,此 則枝葉無慮. 爲公私萬幸, 不可盡建. 而權之自明書, 依聖敎, 出示存昌, 則厥漢尤有所覺悟云(《수기》, <辛亥十一月二十日>).

 

36) 《수기》, <壬子正月初三日>. “大抵爲此術者, 相呼曰交中, 奴主無尊卑之分, 遠近無親疎之別. 不惟男人爲然, 班家之閨婦, 諺譯而讀之, 常賤之愚婦, 口授而誦之. 無老少, 無長幼, 而一入此術, 莫不惑焉. 試以班家閨婦言之, 假使行路之人, 若有自言其爲敎者, 則不問其姓名居住, 不論其兩班常漢, ?許接見於內房, 敬之如大賓, 愛之如至親. 居處飮食, 同其甘苦, 其行也必有?[원주 : 卽德山洪芝榮家事].”

 

37) 박종악은 1792년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도 색출을 끝내고 올린 편지에서 “內浦所謂江門里牛坪里, 卽德山沔川牙山接界之浦口也. 洪州新堂新平里奄島, 又是接隣之大村也. 所居民人, 幾皆爲邪學, 其中雖或有自首而燒冊 納拷而放還者, 盖其全村幾皆濡染, 其能一新覺悟, 實亂時月期必. 今方秘諱, 未及摘發, 而向後動靜, 徐當探察”(《수기》, <壬子正月初三日>)이라 하여 내포를 중심으로 천주교가 성행했음을 말하고, 향후에도 이 지역을 주시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38) 홍지영(洪芝榮)은 원본에는 홍지영(洪芝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박종악은 나중에 보낸 편지에서 ‘英’자가 오기임을 밝히고 있다. 德山洪芝榮事, 敬依向日下敎, 捉來査問, 則渠供中以爲 渠母及渠妻 果從事西洋敎諺冊 而渠則不識文字之故 初不留意云云. …此人卽領敦寧臣洪樂性五寸庶侄. 而其名字之英字, 非英字也, 乃榮字也(《수기》, <辛亥十二月二十日>).

 

39) 이 밖에 《칠요》(七堯), 《석판진본연해언서》(石板眞本演解諺書), 《구은축문》(九恩祝文) 등의 서명이 보인다. 《칠요》는 《칠극》(七克)의 오기가 아닌가 하고, 《구은축문》은 성모가 내려주는 7가지 은혜와 관련된 내용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석판진본연해언서》는 어떤 내용의 책인지 쉽사리 짐작되지 않는다.

 

40) 元白乭, 則渠家中別設天堂, 最爲蠱惑, 此輩若不痛加懲治, 所謂天堂, 不爲毁撤, 則顧其勢未由去邪歸正, 而蚩蚩之氓, 轉爲?惑, 誠非細憂(《수기》, <辛亥十二月初二日>).

 

41) 조광, 앞의 책, 263쪽.

 

42) 首先染入於邪術, 專心學習, 極力狂惑, 所親之人, 則誘以妖誕之說, 而勸其從敎. 從學之類, 則取其易曉之篇, 而謄傳眞諺, 漸益播聞, 從者日至. 盖存昌卽洪家弟子中識文字而精通者, 湖西邪學之得方書而廣布者也(《수기》, <壬子正月初三日>).

 

43) 이재흡(李在洽)의 《부연일기》(赴燕日記, 1828년 6월 25일 기사)에서 “선무문(宣武門) 안 내성(內城) 동쪽 성 밑 길가에 서양관이 있는데 거기에 천주당이 있다. 밖에서 보니 집 제도가 아주 기묘하고 옥하관(玉河館)보다 배나 크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유사옥(辛酉邪獄) 뒤부터는 우리나라 사람은 이 관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한다”고 한데서 이 같은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

 

44)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기해박해 때 죄인의 공초(供招)에서 북경의 천주당이 조선 지역에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경비를 지원하고, 신부를 파견하는 등 천주교 전파에 매우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이 금지되었지만,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천주당과 연락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45) 《조선왕조실록》 헌종 6년(1840) 3월 25일 기사에서 북경에 사행갔던 서장관 이정리(李正履)의 귀국 보고에서 “기이하고 간사하고 공교하고 사치한 물건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재물을 손실하게 하는 것은 다 서양 배에서 오므로, 서양에 흘러들어 가는 은화(銀貨)가 해마다 1백만 냥에 밑돌지 않는데,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저 나라에서는 사교(邪敎)가 민간에 물들어 걱정이 점점 커지므로, 근년 이래로 엄중히 금지하여 천주당(天主堂)을 모두 헐어 없애고 서양 사람도 쫓아 보냈다 하니, 이때부터 사교의 근거를 엄중히 끊는 것을 기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데서 이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46) 1822년에 연행한 김경선은 그의 연행록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당보(塘報)를 인용해 중국 군사들 중에도 아편을 피우는 자가 많아 이를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는 청국의 사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47) 이는 임기중 편, 《연행록전집》(동국대출판부, 2001)에 수록된 연행록을 대상으로 조사한 수치이다.

 

48) 이하 북경에 아라사관이 설치 운영되기까지의 과정은 정혜중, <19세기 조선 사행 김경선의 북경체험과 외국 정보 이해>(《중국사연구》 37, 중국사학회, 2005)의 논문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49) 이기지, 《일암연기》, 1720년 11월 4일 기사에서 “통관들이 말하기를, ‘大鼻?子의 땅은 여인이 극히 드물어서 남자 열 명이 여자 하나와 간통을 하여 순서에 따라 밤을 같이 지내는데 법률이 무척 엄하다. 혹시 순서를 뛰어넘어 간통을 한 자가 있으면 아홉 사람이 함께 그를 죽인다. 여자가 낳은 자식은 아버지를 구별할 수가 없으니 열 사람이 순서에 따라 자식으로 삼는다’고 한다. 대개 짐승과 별 차이가 없고, 서양 사람들도 그들을 짐승으로 대하니, 대개 중국의 북쪽 오랑캐인 것이다”(通官輩言 : “大鼻?子地, 女人極稀, 十男共?一女, 輪番更宿, 法律甚嚴. 或有越次交奸者, 九人共殺之. 生子則不能辨其父, 十人以次第爲其子”云. 盖與禽獸無異, 西洋人亦以禽獸待之, 盖如中國之北狄矣)라고 하여 러시아를 지극히 야만스러운 풍속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50) 이에 대해서는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러시아 이해>, 《한국실학연구》 16, 한국실학학회, 2008 참조.

 

51) 이 연행록의 저자에 대해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으며, 간혹 정사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반당(伴?)으로 수행한 김노상(金老商)을 저자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한영규, <19세기 한중 문인 교류의 새로운 양상 - 《부연일기》 · 《서행록》을 중심으로>(《인문과학》 45,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에 의해 《부연일기》의 작자가 이재흡(李在洽)이라는 사실이 해명되었다.

 

52) 임기중이 편찬한 《연행록전집》에 수록된 연행록을 대상으로 살핀 것이다. 이 외에 여타 연행록이 발굴됨에 따라 아라사관을 방문한 기록이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5종의 연행록 중에서 4종이 모두 1820년대에 연행한 기록이라는 점이 흥미롭게 여겨진다.

 

53) 백련교의 한 분파인 천리교도가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1813년에 이문성(李文成)과 임청(林淸)을 우두머리로 하여 봉기하였는데, 3개월 후에 평정되었다.

 

54) 皇帝敦尙文治, 深排異端, 如天主敎之類, 尤爲痛懲. 盖自癸酉年間, 掃蕩天理敎匪之後, 設法嚴禁(《유헌속록》, <문견별단>).

55) 《연원직지》, 1832년 12월 26일 기사.

 

56) 歷覽至一所, 扁鎖謹嚴, 使之啓?而入, 外間有隔障, 皆以異木雕刻而成, 片片皆?人散髮. 室中穹崇, 四築以?, 圓窓交映, 皆用琉璃. 開其障, 入于內間, 主壁掛一死人. 蓋壁上付十字木板, 人之頭上及四肢, 竝下釘揭之, 若車裂之狀, 宛然是玉骨人. 皮肉爪髮, 十分如生, 通身赤裸, 眞假未分. 而自頭至足釘處, ?血紅鮮淋?, 而看其面目, 若方未冷矣, 眼猜神慘, 殆難正視…(《부연일기》, 1828년 6월 25일 기사).

 

57) 한편 이재흡보다 6개월 뒤에 연행한 박사호(朴思浩)도 십자가의 예수상의 연유에 대해 묻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전혀 달라 러시아 태자가 중국에서 피살될 때의 모습이거나 이마두가 피살된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박사호는 이러한 설명을 듣고는,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심전고》, 1829년 1월 3일 기사).

 

58) 예를 들어 강재응(姜在應)은 1839년에 증조부 강호부(姜浩溥)의 《상봉록》(桑蓬錄, 1727년 연행)을 한글본을 바탕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때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해였다. 이에 강재응은 《상봉록》 중 천주당 방문 기사를 번역하고 덧붙인 추기(追記)에서 순조 연간 이후로 천주교가 유행하여 사대부로부터 민간의 어리석은 남녀까지 서교를 믿었다고 하면서, “저 이른바 천주교(天主敎)라는 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무엇을 베풀기에 사람들이 그 교리를 위해 죽으면서 후회가 없도록 만드는 것인가? 이는 참으로 그 이유를 궁구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彼所謂天主敎者, 果奚施而能令人殉其術而不悔乃爾也? 此眞可謂究說不得者也)(《燕行錄選集補遺》 상, 606쪽)라고 하고 있다.

 

59) 遂至庭南高閣下, 正副使與聖申諸人, 從西壁虹門入, 移時而還來, 述其所見. 入其中, 左右各有小房, 以金鎖堅封, 問其中所有, 則乃朔望薦齋於天主時所着法服云. 懇其一見, 則甚有難色, 屢懇然後始出而示之. 冠則如常時所着, 而金色尤?煌, 衣亦塗金, 而如又字形, 似是頭貫穿也. 閣中橫設門障, 以文木雕成, 門前懸三座琉璃大燈. 入其門, 見東壁上西向掛天主像, 風骨甚淸瘦, 渾身赤裸, 只以數尺素帛掩臀腿, 所着之服制, 如我國平?子, 似是中國所謂藤笠也. 方被刑誅, 頭部半倒, 幾乎落地, 又以鐵釘, 釘住兩手於架上, 使不得動身, 腥血被面, 淋淋若眞, 宛轉慘毒, 令人不忍正視云. 似是西術所謂耶蘇也(《연원직지》, <鄂羅斯館記>).

 

60) 아라사관의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 외에 한필교(韓弼敎)의 《수사록》(隨?錄, 1831년 연행)과 김직연(金直淵)의 《연사일록》(燕?日錄, 1859년 연행)에는 천주당 남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렇지만 김직연의 기록은 북경에 관한 지리서인 《신원지략》(宸垣識略)의 내용을 초록한 것임이 확인된다. 한필교의 관련 기사는 실제로 방문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또한 전대의 연행록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교회사 연구 제44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익철(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파일첨부

3,07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