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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신학자, 성서주석가로 활발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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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67

[교부들의 가르침]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신학자, 성서주석가로 활발한 활동

 

 

가계

 

교회사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집안만큼 뛰어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조부모가 고백자(증거자)인데다, 할아버지는 순교자였다. 할머니 마크리나 1세는 오리게네스의 학생이자 네오체사레아의 주교인 그 유명한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아버지는 폰투스 출신으로 네오체사레아에서 수사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막내아들 베드로가 태어난 뒤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어머니 엠멜리아 역시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동생이 주교였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모두 아홉 남매가 있었는데, 누이 마크리나(329년 이전 탄생)와, 형 바실리우스(329/30년 탄생), 그리고 그레고리우스(335/40년경 탄생)가 셋째이며, 베드로(340/45년경 탄생)가 막내이다. 일찍 죽은 나우크라티우스 이외에 네 명의 누이를 두었으며, 아마도 모두 결혼한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마크리나는 동생들을 도와 말없이 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였고, 대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베드로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교의에 영향을 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그레고리우스의 가족은 네오체사레아 근처에 있는 안네시의 농장으로 집을 옮겨갔다. 장녀 마크리나는 그곳에 수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할머니 마크리나 1세, 엠멜리아, 마크리나 2세, 대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베드로가 성인으로 공경 받을 정도로,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생애

 

그레고리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자신에 관한 자료를 전혀 남기지 않았으며, 동시대인들과 동시대의 기록들도 그를 드문드문 언급할 뿐이다. 바실리우스는 아테네에서 돌아 온 뒤 잠시 갑파도키아의 체사레아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스승'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 바실리우스에게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 교회의 독서자였다가, 한때 그리스도교 금욕적 이상을 벗어나려 하기도 하였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두고 그를 나무라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금욕적 이상에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할 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으로 향했으며 수사학자가 되고자 하였다.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직업을 금지한 뒤에 더 큰 매력을 준 것 같다. 이 시기에 그레고리우스는 같은 신분계층의 여인인 테오세베이아를 만나 결혼한 것 같다.

 

그는 집안의 경건한 분위기에 얼마간 반항적이었다. 그 일화로 그는, 안네시에서 멀지 않은 이보라에 세바스테이아 출신인 40명의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운 묘 축성에 오라는 어머니의 초대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가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다. 가족과 참석자들은 이미 정원에 나와 성유물함을 위해 밤기도를 바치고 있었고, 웅장한 시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이웃집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런데 꿈에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그가 정원에 들어서려고 했을 때 한 무리의 군인이 문 앞에서 막고 서서 막대기로 그를 위협하였다. 온유한 노인이 나타나 그들에게, 젊은이의 우유부단함을 용서하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심하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이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 때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 호수에서 죽은 40명의 순교자들이었음을 깨달았다.

 

372년 카파도키아 지방이 둘로 갈라지자 바실리우스는 제1카파도키아에 주교좌를 늘려 형제와 친구들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때 바실리우스는 그레고리우스를 체사레아에서 안키라 쪽으로 국도에 자리한 니사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바실리우스의 진술에 따르면, 그레고리우스는 천재였지만 어린애 같고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어쨌든 그레고리우스는 주교 재임 동안 첫 7년은 직무를 수행하느라 꽤 어려움을 겪은 것 같다. 그 당시에 이미 '대(大)'라는 경칭이 붙은 바실리우스는 카파도카아 지방 수도인 체사레아에서 주교직을 맡은지 9년 만인 379년 새해에 죽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온실의 화초처럼 살았지만 그 뒤로는 소나무가 되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를 해결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더욱이 바실리우스의 작품들도 더 높은 철학적 단계로 끌어 올렸다.

 

 

그레고리우스와 마크리나

 

379년 가을, 40대에 들어선 그는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소집한 교회회의에 참석하러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마크리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그에게 마크리나에 관해 글을 쓰고 그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크리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372년부터 8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그녀를 방문하였다. 마크리나가 죽기 바로 전에 그는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영혼과 부활」을 출판하고 그 뒤 그녀의 생애를 집필하였다. 이 '생애'를 처음 영어로 번역한 학자는 이 소책자가 기원후 4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4세기에 씌었다면, 고전 세계문학에 속했을 것이라며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마크리나를 늘 생각하였다.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마크리나를 추억하는 짧은 글을 적어 보냈다. "우리에게 누이는 우리 삶의 스승이자 어머니를 뒤이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힘을 솟게 하는 성곽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무기였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같았습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19, 6).

 

 

신비신학

 

그의 신비신학에서는 필립 3,13에 따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뻗음'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그는 영혼의 영적 상승을 나타내는 이 개념을 노년의 작품인 "모세의 생애"에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하느님 자신은 참된 덕이시며, 이해할 수 없고 끝없는 분이시다. 인간은 이 참된 덕을 사랑하고 열망해야 하며, 하느님 자체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늘 이 목표에 전념해야 한다. 뱃사람이 가고자 하는 항구의 신호등에 뱃머리를 맞추듯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도 삶의 목표에 도움이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전한 삶에 관한 논고를 모세의 생애로 구체화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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