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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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 사제직 사임, 은수자 삶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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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68

[교부들의 가르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


사제직 사임, 은수자 삶 살아

 

 

오늘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러 터키의 카파도키아로 여행을 떠나자.

 

그레고리우스는 고대 저술가 가운데 유일하게 '신학자'라는 존칭을 받았던 교부이다. 326년경에 카파도키아 근처 나지안즈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는 여러 도시에서(카파도키아의 체사레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공부를 했다. 그는 유학시절에 만난 카파도키아의 대(大) 바실리우스와 평생 우정을 지켜나갔다. 공부를 마치고 나지안즈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의 영향을 받아 한 동안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했다(356?).

 

그레고리우스는 361년 성탄절에 아버지의 권유로 강제적으로 사제품을 받는다. 그의 아버지는 나지안즈의 주교였다. 서품식이 끝나자, 그레고리우스는 집을 뛰쳐나갔다가 다음해 부활절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은 아직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제직무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그의 고민을 들어보자.

 

"내 손을 깨끗이 씻는 거룩한 작업을 하기 전에… 내 눈이 오직 창조주 하느님만을 경배하는 데 익숙해지기 전에, 내 귀가 천상 학교에서 들려오는 지혜의 말씀들에 귀 기울이며 듣는 데 익숙해지기 전에, 내 입이 오직 하느님의 신비만을 선포하는 데에 익숙해지기 전에… 내 혀가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기 전에… 내가 감히 어떻게 그분께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으며, 사제라는 이름과 직분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도피의 변명서" = "연설" II, 95).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끝까지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연설" II, 98). 진정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선, 사제 자신이 먼저 거룩하고 합당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 아직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제직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영혼을 돌보는 '하느님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종'이다. 예술 중의 예술이요, 학문 중의 학문인 사제직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더 숭고하고, 육체를 치료해주는 의학보다도 더 월등하다. 따라서 "사제는 인간의 영혼들에 날개를 달아 주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만일 그들의 영혼 안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 있다면 그것을 보존해주고, 또 만일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지켜 주고, 또 흠집이 났다면 치료해 주는 운명의 소유자이다"("연설" II, 22).

 

이 같은 사제직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사제는 항상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남을 정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화시키십시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십시오. 빛을 밝히기 전에, 먼저 빛이 되십시오. 남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가까워지십시오. 남을 성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성화시키십시오"("연설" II, 71). 그가 말하는 완벽한 사제상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그레고리우스가 왜 사제품을 받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 주교가 그레고리우스를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했지만(372), 그는 끝내 주교직을 수락하지 않고 나즈안즈에서 아버지(주교)의 일을 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374), 이제 더 이상 그를 사제직에 붙잡아둘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사제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은수생활로 되돌아가면서 노래했다. "성령의 바람에 나의 양 날개를 펼치리. 그분이 원하는 곳이 그 어디든지, 그분이 원하는 모습이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그 누구도 다른 길로 가도록 나를 재촉할 수 없으리"("연설" 10,4~5).

 

사실 그는 거룩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은수생활에 대한 갈망과 사제가 되어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권유 사이에서 갈등했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일체의 육체적인 것들을 피하여 오직 영적인 것에만 마음을 쏟아 모든 흠과 결점을 정화시켜 하느님을 닮고 가장 순결한 영적인 빛을 비추고 싶어했다.

 

한편 발렌스 황제가 죽자,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소규모 니체아파 공동체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어달라고 청했다(379).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데모필루스 총대주교가 이끄는 아리우스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신자 집에 머물며 교회의 평화를 위해 약 3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데모필루스에게 콘스탄티노플를 떠나라고 명령하고(380),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인정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데모필루스를 지지하던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공의회에 늦게 도착하여, 그레고리우스가 사시마의 주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는 것은 위법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몇 주 후에 그레고리우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공의회 도중에 신자들과 공의회 교부들 앞에서 유명한 '고별사'("연설" 42)를 남기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사임했다(381). 요나가 풍랑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졌던 것처럼, 자신도 교회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리우스파를 거슬러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자신의 결백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했던 일에 대한 상급으로 자신을 다시 은수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달라고 신자들에게 간청했다. 이제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의 사목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영원히 자신의 신자로 남아 있을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의 유산을 지켜나가라고 당부했다. 그의 고별사를 듣고서, 어떤 신자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또 어떤 신자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한 마디로 은수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 찬 삶이었다. 사목자로서 살기보다는 수도자로서 살고 싶어했던 그는 사제직과 주교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은수자의 삶을 살았던 훌륭한 교부였다.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6일,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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