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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갑질 민국, 갑질 사회: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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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1 ㅣ No.1238

[경향 돋보기 - 갑질 민국, 갑질 사회]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갑질’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80항).

‘갑질’은 사회생활에서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하찮은 가치로 전락했는지를 보여준다. ‘부조리한 지배 종속 관계’의 고착화는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의 실재’, ‘죄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완벽하고 거룩한 관계, 그리고 관계의 훼손

하느님께서는 손수 창조하신 세상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거듭 밝히신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는 그야말로 완벽한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심으로써 이 관계를 ‘거룩함’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이유와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과 맺은 관계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이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 맺기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소명임을, 곧 신앙의 길임을 보여준다(창세 1,26-27).

그러나 창조에 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창세 1-11장 참조)에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과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죄의 실재’를 잊지 않는다.

성경은 이 ‘죄의 실재’가 그 규모에서나, 성격에서도 점점 더 확장 악화됨을 고발한다. 뱀과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놓고 하느님과의 그 거룩한 관계를 훼손한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죽임으로써 ‘형제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사람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두고,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을 정도로 ‘죄의 실재’는 확장된다. 마침내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고 뜻을 모은다. 이를 두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실재’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셨다. 정의의 심판과 사랑의 돌봄이 바로 하느님의 응답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지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두렁이” 대신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 카인에게는 “짊어지기에 너무나 큰 형벌”을 내리셨지만,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위험에 놓인 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타락한 세상”,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시고 홍수로 벌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당신과 영원한 계약을 세우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셨다.

또 하느님께서는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신다.

‘죄의 실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탈출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야곱의 집안이 이집트에 들어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져서,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차”(탈출 1,7)게 된 배경에는 물론 야곱의 열두 아들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가 있다(창세 37장). 이집트 땅에서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24).

하느님께서는 불의를 바로 잡으시는 분이다. 탈출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생생한 필체로 소개한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7-10). 물론 이 파스카가 이스라엘에게는 해방이지만, 파라오와 이집트에게는 재앙이었다.


새롭고 영원한 관계

하느님께서는 이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새롭게 하시고 완성하신다. 철저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희생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 백성에게 참된 생명의 길, 참된 행복의 길,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며 모범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형제애로 격상시켰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 이웃은 더 이상 남이 아니라, 바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과 아우, 누이와 오빠, 외아드님의 벗이 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의 지체가 된다.

그럼에도 복음에서는 한 몸의 지체이고, 형제이며, 벗인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하느님의 통치와 사회생활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가르자면, 한편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수석사제와 대사제, 카야파와 헤로데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군중이 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양을 돌보지 않는 삯꾼과 ‘목자 없는 양’, ‘길 잃은 양’의 사이로 비유된다. 물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착한 목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한편에는 온갖 무거운 짐으로 신음하는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가 있다. 질병으로, 더러운 영으로,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내버려진 사람과 라자로가 등장한다.

다른 한편에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들, 가난한 과부를 등쳐 먹는 이들, 곳간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자기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려는 이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들,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도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리는 극소수의 ‘사회적 강자’가 있다. 그렇게 형제 관계 또는 벗의 관계 대신에, 힘이 센 소수와 무력한 다수 사이의 지배라는 왜곡된 관계가 있음을 복음은 보여준다.

이 왜곡된 관계는 하느님의 통치마저 부정한다. 안식일 법과 성전 규정을 내세워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마저 훼손시킨다. 성전마저도 강도의 소굴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다. 마침내 이 불의는 하느님 나라에 폭행을 가한다. 포도밭 주인의 상속재산을 빼앗으려 아들까지 죽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를 드러내신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실현하신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부활로써 하느님 통치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고백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복음”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비움과 버림’, ‘가난과 박해’의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선다(「교회헌장」, 8항 참조). 오늘까지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는 곳곳에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마태 28,19-20).


‘갑질’과 ‘죄의 구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공동체에 부여하신 이 인류 복음화 사명을 하느님 백성은 ‘경신’(신앙고백과 전례와 기도, 하느님 사랑)과 ‘인간 존엄함’의 수호와 사회의 ‘공동선’(이웃 사랑)의 실현으로 드러낸다(「교회헌장」, 「사목헌장」;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간추린 사회교리」 참조).

‘갑질’을 두고 사회교리는 ‘죄의 구조들’이라 한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이 죄의] 구조들은 오늘날 두 가지 범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혹자는 여기에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라는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죄의 구조는 “점점 커지고 확산되어 인간의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또 다른 죄의 원천”(「간추린 사회교리」, 119항)이 되며, “폐쇄된 지배 집단”(406항)을 형성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려 한다.

그 때문에 교회는 기득권을 가진 ‘갑’에게 ‘을’을 도와주어야 할 연대성의 의무, 불균형을 개선해야 할 정의의 의무, 갑의 발전이 을의 발전을 방해해서는 안 될 보편적 애덕의 의무를 요구한다(「민족들의 발전」, 4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갑의 을(사회적 약자) 배제’ 사회와 ‘무관심의 세계화’를 신랄하게 고발하며, 보편 형제애와 연대의 세계화를 호소한다. ‘갑질’은 탈인간화의 길(「복음의 기쁨」, 51항 참조)이기 때문이다. ‘갑질’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연대, 정의, 애덕’, 그리고 ‘형제애’의 삶이 시급하다.


한국교회의 교회다움에 도전하는 갑질

“어느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제도의 건전함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의견을 밝힐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는 오로지 사생활의 내적 지성소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프란치스코 교종의 ‘2015년 평화의 날 담화’에서 ‘갑질’에 맞설 실질적인 지침을 찾아보았다.

첫째, 인간의 존엄함과 사회의 공동선을 수호해야 할 정치 공동체의 올바른 역할이 절실하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입법 활동을 펼쳐야 한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권을 수호하며, 인권이 유린될 경우 이를 회복시키는 올바른 법들이 필요하다. 그런 법들에는 반드시 피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부패와 부정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 효과적인 사법 수단도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갑질’의 세계화 현실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수준의 정부 간 기구들 사이의 협력이 필요하다. ‘갑질’을 극복하려면 “보조성의 원리를 지키면서… 다양한 수준의 협력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국내외 기구와 국제기구, 시민 사회 단체와 재계가 포함된다.”

셋째,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도 필요하다. “갖가지 형태의 종속화가 분배 사슬 속에 비집고 들어오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시민 사회 단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임무, 노예 문화와 맞서 싸우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면 무엇이든 촉진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교회와 신앙인은 “악의 공범”이 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자유와 존엄을 빼앗긴 형제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몸을 어루만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진리를 증언하고, 불의를 고발하며, [공정, 통합, 참여, 지속 가능의] 참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교회가 정의를 증언한다면, 교회는… 다른 사람 눈에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행동 규범, 재산, 생활양식 등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1971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세계 정의」, 38항).

* 박동호 안드레아 - 서울대교구 신정동본당 주임신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박동호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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