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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11월 24일 (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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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 성사, 약함을 강함으로, 소외를 우리로 변화시키는 사랑

31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2-09-05

[알아볼까요] 성사, 약함을 강함으로, 소외를 우리로 변화시키는 사랑

 

 

모든 성사 거행이 다함없는 하느님 사랑을 건네는 자리이지만 그중에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입문성사를 완성시키며 우리의 모든 성사 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성찬례를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자 정점이라 가르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베네딕토 16세 교황,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4항)이기에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의 조건에 동참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생명 전체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벽한 사랑의 친교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와 견진은 성찬례 안에서 완성되고 다른 모든 성사는 이 성찬례를 지향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친교가, 우리와 우리 사이의 사랑의 친교가 성찬례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는 마치 같은 밥상을 나누는 이들을 한 가족이라 부르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우리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이룹니다. ‘주님 밥상’에서 이루어지는 성찬례는 오늘만이 아닌 영원한 천상 잔치를 의미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루는 주님 밥상에서의 나눔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 사랑 안에서의 영원한 잔칫상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성찬례의 이러한 특징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해줍니다. “구원을 위한 당신 수난 전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 하신 명령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당신을 기원으로 하는 종말론적 모임의 표지이며 도구가 되어야 할 임무를 당신이 세우신 공동체 전체에 넘겨주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 백성의 종말론적 모임을 성사적으로 실현합니다. 우리에게 성찬 잔치는 예언자들이 이야기하고(이사 25, 6-9 참조) 신약에서 “어린양의 혼인날”(묵시 19, 7-9)이라고 묘사한,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의 기쁨 안에 거행될 마지막 잔치를 실제로 선취하는 것입니다.”(‘사랑의 성사’, 31항)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

 

이처럼 성찬례 거행은 사랑의 관계 맺음, 곧 주님의 몸을 나누는 우리가 이미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며, 한 성령 안에서 같은 몸을 나누는 우리 서로도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불어 성찬례 거행은 파스카 사건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기억하며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과 신앙의 표지를 간직하고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곁으로 떠나간 이들과의 사랑의 친교도 이룹니다. 성찬례는 이처럼 우리가 따로가 아닌 서로 함께임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감사기도 제2양식에서 보호자 성령을 청하며 올리는 기도문에 잘 나타납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성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와 이교 제사의 차이를 설명하며 ‘주님 밥상’ 안에서 우리 서로가 하나의 사랑의 관계를 이룬다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 16-17)

 

그렇다면 이러한 성찬례에 초대받고 참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들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이들이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마태 4,24 참조), “의인이 아니라 죄인”(마태 9,13)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사 61,1-2; 루카 4,18)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칠삭둥이”(1코린 15,8)라 여긴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2코린 12,5)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라고 선포합니다. 바오로의 이 고백은 십자가의 약함이 사랑의 충만임을 그의 삶과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성찬례가 드러내는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의 충만을 열망하며 그리스도의 제단 앞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이들, 그 사랑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맡기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겐 한없이 작아지는 이들,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자매요 형제로 품어 안아주는 이들, 그리스도의 벗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고 나약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이 사랑의 성찬례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하나가 되는 희망으로 그렇게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생기 있는 모든 삶의 원천은 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

 

레지오 마리애 단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첫영성체를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첫영성체를 하신 분도 있겠지만, 순박한 철부지 어린이로서 처음으로 성체를 받아 영하던 그때의 마음과 느낌을 떠올려본다면 성사 참여가 주는 감사와 감동을 다시금 새롭게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백의 작고 가냘픈 모습으로 성체와 처음 하나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을 맛봅니다.

 

형제님들 중에는 입대 후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성찬례에 참여한 기억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족과 친지와 떨어진 낯설고 외로운 군대에서 미사에 처음으로 참여하며 이유도 없이 가슴 뭉클해지면서 울었던 기억을 갖고 계실 겁니다.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낯선 타지에서 홀로 떨어졌다 느끼고 있는 순간에 하느님 사랑이 함께함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 저자의 마음과 같습니다.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시편 138,3)

 

생의 마지막 성체, 곧 노자성체를 영하며 하느님 사랑과의 온전한 하나 됨의 희망을 드러내는 분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희망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요한 10,15) 분임을 믿기에 생기는 희망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으로 생기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삶의 원천은 바로 성사에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남으로써 약하고 소외된 내가 아닌 충만하며 생명력 넘치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찬례의 영성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겸손한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허기지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찬례 안에서 우리의 밥상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그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생기를 얻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성찬에 초대받은 복된” 자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당신 손으로 빚으신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영원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9월호, 기정만 에제키엘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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