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가톨릭문화

sub_menu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39: 손미경 작가

112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1-06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39) 손미경 작가


"만드는 것까지만 제 몫이고, 나머진 보는 이들의 역할이죠"

 

 

 

- <씨튼상>, 씨튼 영성의 집 엘리사벳 씨튼 동산



- <강생>

 

 

처음 만져본 흙의 느낌으로 조각가의 길 나서

 

어릴 적부터 사생대회에 나가면 꼭 상을 타왔어요. 초등학생 때였는데요. 어느 사생대회에 나갔는데 제 그림이 신문에 조그맣게 실리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국군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와서 1년 정도 펜팔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린 것뿐인데 이런 반응들이 온다는 게 엄청 신기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렇게 예술가가 되는 게 꿈이 됐어요. 고민 없이 입시 미술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잘하기도 해서 대학 진학은 걱정을 안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시절 학교 축제를 위해 그린 그림을 보고 이화여대에서 자기네 학교로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 조각하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저는 입시 걱정은 없었으니 선배들 모델을 서 주며 맛있는 것 얻어먹는 게 낙이었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저에게 ‘흙 한번 만져보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디자인을 전공하려고 했고 지저분한 흙을 만지기는 싫었어요. 그러다가 ‘저 언니들은 뭐가 재밌어서 저렇게 열심히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점토를 만졌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두 번쯤 흙으로 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랬더니 집과 학교, 미술학원에서 난리가 났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였거든요. 조소를 전공하기로 정하고, 성신여대에 입학했어요. 그것도 수석으로요. 사실 4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고,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쭉 대학원까지 다녔어요. 저는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했어요. 학교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은 그 당시 추상 조각을 많이 했지만, 저는 사람의 신체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어요.

 

 

- <성모자상>(왼쪽, 의정부교구 호원동성당), <유진길 유대철 상>



- <숨-원형>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로

 

대희년이던 2000년에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장동호(프란치스코) 조각가가 함께하자고 졸랐어요. 그때 회원전을 준비하면서 구유 안의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제 작품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 주셨어요. 사실 저는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고 해서 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머리는 크고 손발은 작은 이상한 모습이었는데, 조금씩 손을 보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가 되었어요.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여수대 교수였어요. 남편을 따라 일본 쓰쿠바대에서 예술연구과 연구과정을 마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2001년 갑작스럽게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게 됐어요. 유아세례를 받은 가톨릭신자로 본당 전례부 활동 등을 하며 마음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고 예수님께서 늘 같이 계시며 저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까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저에게 남은 것은 조각밖에 없었어요. ‘이걸 하면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개인전을 열기 시작했어요.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시회를 열고요. 그런데, 이런 전시는 제 스펙을 쌓기 위한 것이었어요. 교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도 따고요. 그런데 제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교수 후보 1순위로 올랐는데도, 다른 내정된 사람에게 자리를 뺏기기도 하는 등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 양평 산수유말씀터 <십자고상>(왼쪽),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소재 <성모승천상>

 

 

많은 이 주님께 이끄는 작가 되고파

 

2005년, 가톨릭대 개교 15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혜화동 교정을 외부인에게 공개해 7박8일 동안 침묵피정을 열었어요. 당시 가톨릭대 교수였던 김남철(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이 추천을 해서 피정에 참여했어요. 지금은 주교님이 되신 구요비(욥) 신부님, 전원(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등을 알게 됐어요. 성경을 읽고 침묵 중에 기도하고 총고해도 하면서 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회였어요. 덤으로 좋은 신부님들과 가까이 알고 지내는 네트워크도 생겼고요.

 

피정을 마치면서 성경을 통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전시회를 준비해야 했어요. 성경을 다 읽고 나면 전시 준비가 늦을 것이 뻔해 보였지만,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다 읽고 나니 전시회가 열흘 정도 남았어요. 부랴부랴 흙을 어떻게 만졌는지도 모르게 작업을 해서 전시회를 마쳤어요. 그리고 교수가 되기보다는 성미술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본격적으로 성미술 작업을 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각상으로 만들었어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농담 식의 기도로 ‘예수님 얼굴을 좀 보여주세요’라고 했는데, 갑자기 피투성이 얼굴이 제 눈앞에 떠올랐어요. 이것을 표현한 예수님의 얼굴 각상은 지금 가톨릭대 신학대학에 있어요. 부제님들의 기도방에요. 이어서 서울대교구 방배동성당 성모자상, 강원도 홍천 프라도회 참제자마을에 성모상을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충남 논산 씨튼 영성의 집에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설립자 씨튼 수녀상을 봉헌했고요.

 

저는 성미술을 하면서 만드는 것까지만 제 몫이고 나머지는 보는 사람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성미술 작품이 작가만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은 아니어야 하고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다가가도록 돕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아버지의 정을 잘 모르고 자랐어요. 말년에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돌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스르륵 녹는 것을 느꼈어요. 훗날 아버지의 정을 되새기며 ‘돌아온 탕자’를 만들고 싶어요.

 

 

◆ 손미경(체칠리아) 작가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성신여대 미술대학 조소과 1992년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일본 쓰쿠바대학 예술연구과 연구과정을 졸업하고 2010년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신여대와 경원대, 동국대, 중앙대, 국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5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가톨릭미술가회 회원이며, 세실조형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4년 11월 3일, 정리 최용택 기자] 


0 11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