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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주님 가르침대로 살다 떠난 피아니스트 정송자 젬마 회장

186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05-22

[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주님 가르침대로 살다 떠난 피아니스트 정송자 젬마 회장

 

 

정송자 젬마의 묘비에는 “주님, 이웃, 음악, 자연에의 열정과 수고를 생각하며 주님 위로와 안식을 주소서”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의 삶이 이 낱말 넷에 그대로 담겨 있다.

 

 

주님을 향한 용기

 

어릴 때 집안에서 가장 먼저 신자가 된 젬마는 부모와 2남 5녀 형제자매들을 모두 신앙의 울타리로 불러들였다. 나아가 친지들과 사돈들도 세례를 받고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길잡이가 되었다. 반월시장을 오가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전교하는 일이 허다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려워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다가서는 용기가 두드러졌다.

 

정송자 젬마는 1986년 12월에 교구 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한 번 연임하며 1990년 2월까지 역임하였다.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기금마련을 위해 두루마리 화장지를 싸게 구입하여 팔고, 전기매트도 팔면서 각 가정에 배달했던 일도 있었다. 여성연합회 주머니를 채우고, 장애자와 재소자 돕기에도 솔선수범했다. 그는 임기 중 여성협의회전국총회를 유치하여 타 교구에서 온 손님을 맞아들여, 교구 활동보고와 정보교류를 하면서 성과를 이루는 역량을 보였다. 교구 여성들의 결속과 원활한 활동을 위해 어려운 여건을 뚫고, 진주지구 여성연합회를 결성했다.

 

특히 회장 재임 중 1989년 2월 21일 제3대 교구장 박정일 미카엘 주교 착좌식에는 여성연합회장으로 평협회장과 함께 공동 부위원장을 맡았다. 여성연합회 회원들이 여러 분야에 서 세밀하게 임무를 분담하여 치밀하게 봉사하였다.

 

그리고 여성연합회가 무료급식소와 여성쉼터 후원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딸 곽안나와 함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어 교구의 복지기관에 아낌없는 후원을 이어갔다. 또한 성소육성회 회장을 맡아 사제성소계발과 육성을 위해 애썼고, 사제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재정적 후원에도 힘썼다.

 

- 세례식 대모

 

 

이웃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여성연합회바자회에서 월남동성당은 김밥을 팔았다. 정송자 젬마는 30대에 시작한 김밥장사를 70대가 되도록 중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이어갔다. 놀랍게도 피아니스트인 정송자 젬마는 월남동성당 연령회가 1961년 창립할 때 총무로 활동을 시작해서 1964~1967년 회장을 맡았고, 그 후에도 연령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 이전에 ‘사람’에 더 몰두하는 철학을 가졌다. 최선을 다해 사람을 마주하고, 신분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대해주는 휴머니스트였다. 본당에서 연령회, 성소육성회, 가브리엘회 등 단체에서 회장을 맡아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꾸는 일에 앞장섰다.

 

젬마는 남성동성당 성가대에서 바리톤으로 노래하는 곽용호 라우렌시오를 만났다. 노래를 잘하고 모태신앙인 그와 인연이 되어 열 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남성동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렸다. 그 후 남편은 마산한의원을 운영하며 조용하게 젬마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1976년 정송자 젬마는 경남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해 12월에 월남동성당 성가대가 설립되자 초대 반주자로 봉사했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가대가 아니라도 평일미사에서라도 반주의 임무를 놓지 않았다. 언니의 암투병 7년을 지켜봤던 동생 정행순 실비아는 “앰뷸런스가 집 앞에 대기해 있는데 수녀님께 오늘 반주 못한다고 전화하는 언니”라며 정송자의 한 평생 한결같음을 말했다.

 

- 정송자 곽용호 부부

 

 

음악이라는 달란트를 널리 불려

 

마산 반월동 근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정송자는 유치원에 있는 피아노에 호기심을 가졌다. 유치원에서 오며가며 딩동~ 소리를 내보던 것이 훗날 피아노 연주자가 되게 만들었다.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학과와 유아교육학과 교수로 30여 년 재직하여 후학들을 배출했으며, 마산음악협회에서 회장을 맡아 회원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지역 예술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수많은 연주회를 통해 자신과 제자들, 동료들의 예술세계를 확대하는 기회를 드높였다. 이런 공로들에 힘입어 2006년에는 마산시문화상을 받았다. 지역의 음악 영역에 끼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2015년, 제자들이 대장암으로 6년이 넘도록 투병 중인 스승의 쾌유를 기원하는 ‘사랑음악회’를 열었다. 스승의 헌신과 노력에 보답하는 큰마음을 담아, 스승의 날을 앞두고 3.15아트센터에서 정송자 교수를 모시고 연주했다. 정 교수는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의 공연에 감사했고, 제자들뿐 아니라 그를 위해 모인 지인들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전했다. 제자들의 이러한 ‘애씀’ 덕분에 그는 공연장에서 많은 지인들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감동적으로 인사를 나눈 석 달 후, 8월 20일 72세 정송자 젬마는 그토록 사랑한 주님 곁으로 돌아갔다. 올해 10주기를 앞두고 있다. 그가 떠난 후 제자들을 비롯해 정송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사모’라는 이름으로 기일이 되면 함께 감천에 있는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 정송자 묘비 

 

 

자연 속에서 주님 피조물과 더불어

 

젬마는 주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웃을 아끼는 마음은 자연과도 이어졌다. 자연을 보호하고 사람도 좋게 사는 일에 골몰하며 감천에 있는 땅을 일구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가꾸고 나누자며 농사를 짓고 꽃을 키워 가져가게 했다. 자주 사람들을 농장에 초대하여 자연 속의 생활을 소개하고 즐기도록 음식을 대접했다.

 

마산교구에서 운영하는 지역자활센터 참여자들의 일거리가 되게 하려고, 자신의 땅을 빌려주며 농사를 짓게 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조그마한 가능성이 있으면 도전하는 용기에 다른 사람들이 쫓아가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피아니스트이지만 피아노만 만지지 않고 흙을 만졌다. 늘 소탈하고 이타적인 자세는 주님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데까지 한결같았다.

 

▶ 참고 <마산교구40년사> <마산교구여성협의회44년사> <월남동성당60년사> 등

 

[2025년 5월 18일(다해)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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