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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공소를 가다5: 대전교구 당진본당 당진포공소

125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1-05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를 가다] (5) 대전교구 당진본당 당진포공소


배관겸 복자의 땅, 순교의 뿌리 위에 세워진 당진포공소

 

 

- 대전교구 당진본당 당진포공소는 간척지 위에 지어졌다. 당진포공소 전경.

 

 

“천주교 신자는 나 혼자뿐! 우리 공소는 당진본당에 속해 있는 제일 조그만 공소이다. 9가구밖에 없는 고산공소다. 우리 반에서 천주교 신자는 나 혼자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한테 우리 교회가 좋다고 말을 못 한다. 반 아이들이 툭하면 자기 교회 자랑을 한다. 나는 이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 교회를 자랑할 때는 끼어들지 않는다. 우리 선생님도 감리교회 선생님이시다. 사회 시간에 ‘그리스도교’라는 단어를 배우게 됐다. 이때는 선생님도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신다. 그래서 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천주교회’라는 말이 여러 아이의 입에서 나오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8년 2월 14일 자 가톨릭신문 제1592호 8면 ‘우리들의 꿈동산 주일학교 마당’에 실린 대전교구 당진본당 고산공소 최미현 어린이 글이다. 38년이 지난 지금 이 어린이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으로서는 당찬 포부다.

 

최미현 어린이가 고3이 됐을 1994년 12월 1일 고산공소는 ‘당진포공소’라 이름을 바꾸고 새 공소 건물을 봉헌했다. 아이가 성장하듯 당진본당에서 제일 작은 공소가 번듯한 건물을 지어 봉헌할 만큼 교세가 성장한 것이다.

 

- 당진포공소 내부. 소박하면서도 깔끔하고 기품이 있다.



- 제대 옆 작은 탁자에 마련돼 있는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그리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모습이 그려진 장식 접시.

 

 

고산공소에서 이름 바꾸고 새 공소 봉헌

 

당진포공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황토마을로 198-54, 지번으로는 고대면 당진포리 32-170에 자리하고 있다. 고대면(高大面)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 상대면과 하대면·고산면이 병합하면서 고산면의 ‘고(高)’자와 상·하대면의 ‘대(大)’자를 한 자씩 따서 오늘에 이른다. 당진포리(唐津浦里)는 백제와 당나라가 교역하던 나루터 당진포(唐津浦)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진포는 무역 나루일 뿐 아니라 병선과 수군이 주둔하던 군사 시설이었고, 조선 시대 세곡미를 보관하던 해창이 있던 꽤 번화한 어촌이었다. 그러다 1983년 대호만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급속히 쇠락했다. 당진포리 주민들은 소금기에 절어있는 농토에서 생전 처음 해보는 농사를 지으면서 처절하리만큼 치열한 삶을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위안이 된 것은 오직 ‘신앙’뿐이라 할 만큼 당진포공소 신자들에게 있어 ‘믿음’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증거가 38년 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친구들의 입에서 “천주교회”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겠다는 최미현 어린이의 당찬 결심이다.

 

당진포공소 설립 연도는 정확하지 않다. 대전교구가 공소 활성화를 위해 1983년 2월 제1차 공소 지도자 연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고산공소 고광세(토마스)씨가 참가한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이즈음 곧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전 고대면에는 일제 강점기에 ‘항곡공소’가 설립됐다. 이 역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서울에서 송 주사라는 부자 교우가 항곡리로 이사와 자기 집에서 신자들을 모아 공소 예절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항곡공소는 당진본당 제4대 주임으로 6·25전쟁 당시 1950년 9월 23~26일 사이 대전 교도소에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 잠시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항곡공소는 폐쇄된 후 현재 당진본당 18구역 ‘고대1 화곡반’에 속해 있다.

 

- 공소 마당에 설치돼 있는 성모상.

 

 

초기 조선 천주교회 순교자들의 땅

 

당진포공소의 역사는 짧아도 고대면의 가톨릭 신앙 역사는 조선 교회 창설 시기로 거슬러 간다. 복자 배관겸(프란치스코, 1740~1800)과 그의 동생 배 마티아 순교자, 그리고 배관겸의 아들 배청모(아우구스티노) 순교자가 당진포리와 바로 접한 고대면 장항리 진목 출신이다. 「천주교 당진본당사 70주년 기념집」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당진 최초의 교우는 배관겸이다. 진목(고대면 장항리) 출신의 그는 1784년 조선에 천주교회가 창설되자마자 입교하였다. 진목이 위치한 고대면은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로 건너다니는 당진포 나루가 있던 곳이다. 당진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당진 복음화의 시초는 그 이름이 생겨난 바닷가에서 시작된 셈이다. 18세기 중엽 저술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진목은 당진현 고산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민호 66호에 남자 162명·여자 192명이 사는 바닷가 마을로 고산면에서 가장 큰 동네였다.”(13쪽)

 

복자 배관겸은 1784년 조선 교회 창설 직후 이벽(요한 세례자)에 의해 입교했다. 고향 진목으로 내려온 그는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며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목수였다. 학문에 뜻이 깊던 배관겸은 배를 다루는 일에도 능숙해 진목에서 뱃길을 이용해 한양을 왕래하며 양인들과 접하고 천주교 신앙도 받아들였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자 바로 배교했다. 풀려난 그는 곧바로 회개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산 두름바위를 거쳐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그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교우촌을 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1798년 신부를 모실 수 있길 희망하며 양제에 경당을 지어놓을 만큼 열심이었다.

 

 

- 입구 성수대와 기도문. 세월의 흔적을 가늠해주는 아름다운 성물이다.

 

 

바다 메워 육지로 변한 농토 한가운데 자리

 

배관겸은 1798년 10월 3일 배교자 조화진이 이끌고 온 홍주 포졸들에게 면천 양제 집에서 체포됐다. 그는 홍주로 압송된 후 청주 병영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포졸들을 배관겸이 혹독한 매질에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부는 한밤에 찬물을 부어 얼려 죽었다. 그의 나이 60이었다.

 

배관겸의 아들 배청모는 1829년 6월 29일 해미에서 순교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체포돼 청주 진영에서 부친이 순교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고, 시신을 손수 매장했다. 그는 아버지를 묻은 후 도망쳐 1년간 뱃사공 노릇을 했고, 이후 공주 땅에 은신해 교회 서적을 필사해 팔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1825년 다시 체포된 그는 고문을 받고 긴 옥살이를 하다 해미에서 옥사했다. 이렇게 고대면은 초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땅이었다.

 

당진포공소는 바다에서 육지로 변한 농토 한가운데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로 흰색 페인트로 마감돼 있다. 건물 양측으로 창이 5개씩 나 있을 정도이고 회중석도 최대 100여 명 정도 앉을 만큼 제법 규모가 있다. 내부 바닥은 나무 무늬 장판으로 마감돼 있고, 벽면은 흰색과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다. 제단은 2단 기단으로 설치돼 회중석과 구분해 놓았다.

 

제단 십자가를 중심으로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성화가 장식돼 있다. 나무 제대도 소박한 공소에 어울리게 특별한 장식이 없다. 제대 옆 작은 탁자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그리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모습이 그려진 도자기 장식 접시가 놓여있는 게 이색적이다. 성당 마당은 제법 넓다. 마당 한 켠에 성모상이 설치돼 있어. 이곳이 가톨릭 경당임을 알려 준다.

 

제단의 성화, 공소 입구에 설치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수대, 밝고 깔끔한 실내 공간 모두가 이곳 당진포공소 신자들의 신앙의 기품을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는 세네카의 말처럼 당진포공소 신자들은 신앙 선조 복자 배관겸 이래로 삶을 위해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1월 4일, 리길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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