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10-12: 가성직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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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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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0) 가성직제도 I
‘사제 부재’ 초기 교회, 미사 · 성사 집전한 지도자들
- 이승훈과 권일신, 정약용, 이존창, 유항검 등 교회 지도자들은 미사와 성사를 통해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1786년 가을부터 가성직제도를 시행한다. 탁희성 작, ‘가성직제도’, 지본채색, 1988.1785년 3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있은 후 여러 양반 집안에서 가톨릭 신앙에 심취해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초기 조선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이벽(요한 세례자)과 이승훈(베드로, 당시 29세)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아버지 이부만에 의해 집에 감금된 이벽은 그해 7월께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이승훈도 사랑방으로 끌려가 아버지 이동욱에게 ‘벽이문’과 ‘벽이시’를 짓고 앞으로 영원히 이단을 물리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자신의 신앙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달레 신부는 이때 조선 교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작은 양 떼의 신앙은 잠시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아주 꺼지지는 않았었다. 천주교인 집단이 그 교우 중의 몇몇이 배교함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겨 있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대부분 신자가 흔히는 재판관과 형리들의 박해보다도 더 참아 받기 어려운 집안 박해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다. 입교자 수는 늘어갔다.”(「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1쪽)
피정 통해 하느님과 만난 권일신과 조동섬
한양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박해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경기도 여주 한감개에 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당시 43세)이 초기 조선 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인도로 40일간 광야에서 머무셨던 것처럼 먼저 얼마 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조동섬(유스티노, 당시 46세)과 함께 경기도 양평 용문산의 적막한 절에서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야 신부가 쓴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년광익」(聖年廣益)에 적힌 대로 8일간 영신수련 피정을 했다. “그는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성령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동섬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피정 동안에는 내내 서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우리 주님과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에만 전심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하였음이 확실하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2쪽)
이승훈에게 위임된 미사·성사 집전 권한
이승훈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히고 아버지의 단속도 점차 옅어지자 즉시 교회 품으로 돌아왔다. 권일신, 최창현(요한, 당시 26세), 홍낙민(루카,당시 34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당시 29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당시 26세), 정약전(당시 27세)·약용(요한 사도, 당시 23세) 형제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교회 지도자들인 이들은 1786년 봄 한양 회현방 난동(오늘날 회현동) 정약용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을 더욱 쉽게 선포하고 새 영세 교우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선 성사를 받아야 하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북당에서 미사와 성사를 신부가 주례하며 자신도 사제로부터 직접 성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승훈의 말을 들은 교회 지도자들은 가톨릭 교리서 내용을 살펴보고 우선 ‘고해성사’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 교우가 다른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으나 서로 맞고해를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1786년 가을에 다시 모였다.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을 주제로 논의했다. 아무리 교리서를 뒤져봐도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뜻을 같이해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위임했다.
자발적인 교회 설립, 불가피했던 가성직제도
이승훈은 경기도의 권일신, 충청도의 이존창, 전라도의 유항검, 한양에 사는 정약전과 홍낙민 등 10명을 신부로 뽑아 임명하고 미사와 성사 집전 권한을 부여했다. 또 최창현을 비롯한 남녀 10여 명을 ‘부제’ 격인 ‘회장’으로 임명하고 교회 일을 돕도록 했다. 보편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기 조선 교회의 ‘가(假)성직제도’가 이렇게 1786년 가을에 수립됐다.
가성직제도에 대해 차기진(루카,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박사는 이렇게 평한다. “지도층 신자들은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 어린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새로 진리를 찾아 교회로 들어오는 예비 신자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순수한 목적에서 성직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혹 이것이 잘못은 아닌가’하는 의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교회, 선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서적을 통해 진리를 찾은 신앙 선조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특징이자 한계성이었다.”(「고난의 밀사」 59쪽)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3월 8일, 리길재 전문기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1) 가성직제도 2
가성직 신부 활약 속 대두된 ‘성사 집행 권한’ 논란
-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 사제가 예비 교우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탁희성 화백 작.가성직 신부들의 활동과 한글 교회 서적 출판
이승훈에게 사제로 임명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창현(요한), 홍낙민(루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정약전·약용(요한 사도) 형제 등은 자신의 삶 터에서 미사를 주례하고, 세례와 견진·고해 성사를 집전했다.
이들은 중국 비단으로 조선 복식의 제의를 만들어 입었고, 성사 예식을 집전할 때는 관을 썼다. 이존창의 경우 미사 중에 성찬례용 금잔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성체를 축성해 교우들에게 영해 줬다. 고해성사 때는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아 서서 죄를 고하는 신자들의 고백을 들었다. 일반적으로 보속은 ‘희사’, 곧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과 봉사였다. 그리고 중죄를 지은 교우에겐 직접 회초리로 고해자의 종아리를 때렸다. 조선 예법에 따라 여교우들과 한 방에서 마주하며 고해성사를 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여교우들이 하도 간절히 청해 할 수 없이 성사를 주어야만 했다.
가성직 신부들은 헌신적으로 자기 직무를 수행했다. 교우들은 열성으로 미사에 참여했고, 온 정성으로 성사를 받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새 영세자들도 진심으로 하느님 은총을 체험했다. 이러한 성무 속에서도 모든 신부는 허영과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서로 격려했다.
회장으로 임명된 최창현(당시 27세)은 한양에 집 한 채를 세내어 전례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는 활동적이고 총명해 가성직 신부들을 맞아들이고 교우들이 성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는 귀찮음과 피곤함도 마다치 않고 밤낮으로 이 직분에 몰두했다.
역관 출신이었던 최창현은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무엇보다 힘을 쏟았다. 덕산 출신 김사집(프란치스코, 당시 42세), 한양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정인혁(타대오)도 한글로 된 교회 서적 출판에 앞장섰다. 한문을 모르는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한글 교회 서적이 그만큼 필요했다. 이들은 그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를 비롯해 성모송 등 주요 기도문을 나눠주고 소리 내 기도하게 했다.
가성직 신부들의 활동으로 1년여 만에 약 1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했다. 이들 가운데 눈여겨볼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와 윤지충(바오로)이다.
1786년 가을,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돼 사제 직무를 수행하던 한 인물이 이듬해 봄 자신들의 성직 신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교회 서적을 읽다가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교육을 받은 후 성품 성사와 그에 따른 인호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가성직제도 중단 촉구한 편지 한 통
이승훈에게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승훈에게 쓴 편지 원문은 없고 다만 북경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긴 내용만이 교황청 문서고에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번역문에는 작성자가 ‘Hiuenchen’(‘이웬쉔’ 또는 ‘현천’)으로 나오는데 이것 또한 한자를 중국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어서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고 최석우 몬시뇰은 교황청 복음화부 고문서고에서 발견한 프랑스어 번역문과 「사학징의」에 실린 ‘유관검 공초’를 대조해 유항검이 제기했다고 주장한다. 또 차기진 박사는 당시 신부로 활동했던 정약전이 그 주인공이라며 근거로 그의 관명이 ‘천전’이라고 제시한다. 또 다른 이들은 권일신, 이가환이 썼다고 한다.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편지 내용은 이렇다. “지난번 모임에서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제가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맡아보도록 결정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명령에 순순히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우리 성교회에 대한 책 여러 권을 아주 집중적으로 찬찬히 읽어 보고 저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품을 받으면 인호를 받게 되는데, 바로 이 인호가 없는 사람은 사제의 직무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그라몽 신부님한테서 이런 인호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저희를 사제품에 오르게 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무모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따라서 저는 당신과 또 다른 모든 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견해에 따르면, 모든 성사 집행을 완전히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당에 계신 우리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가 지은 죄들을 모두 그분들께 고백한 다음, 우리 죄에 대한 보속을 청하고,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의문점들을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1」 281~284쪽)
성사 집전 멈추게 한 이승훈
이승훈은 이 편지를 읽고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 자신이 임명한 가성직 신부들에게 즉각 성사 집전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 곧 가성직단은 북경에 사람을 보내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가장 올바른 답을 구해 오기로 했다. 이렇게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제도는 178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약 6개월간 운영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3월 15일, 리길재 전문기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2) 가성직제도 3
잘못된 성사 집전에 대한 통회, 북경 선교사의 용서
- 이승훈이 1789년 윤유일을 통해 북경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의 프랑스어 번역본. 한국교회사연구소「한국천주교회사」를 펴낸 샤를 달레 신부는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 신부들의 활동을 이렇게 평했다. “그 시대의 기록에는 이 성사들에 대해서만 말이 있다. 이 목자들이 준 세례는 확실히 유효하여 재생의 은총을 주었다. 그들이 준 다른 성사는 무효였음도 물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의 성직 수행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을 전파함에 새로운 충동을 주었음은 확실하다. 그때 천주교인들이 열광적이었다는 것과 예절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는 데에 거룩한 열성을 가졌었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다.”(상권 324쪽)
달레 신부는 또 성직자로 활동하던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 즉시 모든 성사 집전과 성직 수행을 중지한 것을 두고 감탄했다. “모든 신자 앞에서 그런 직위에 올랐다가,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그들의 신앙은 진실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위험을 당하기는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5~326쪽)
북경에 간 윤유일, 선교사에게 이승훈 편지 전달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1787년(정미년) 봄 가성직제도를 중단한 지 2년여 만인 1789년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북경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지체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북경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또 1787년 음력 10월 한양 성균관 아래 동반촌 김석태의 집에서 이승훈과 정약용, 강이원이 은밀히 기도하면서 교회 서적을 공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남인 벽파는 서학을 더욱 맹렬하게 사학(邪學)으로 배격하고, 홍낙안이 이 사실을 정조에게까지 알렸다. 이를 ‘정미반회사건’이라 한다.
이승훈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북경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추진했다. 유항검과 몇몇 교우의 도움으로 마침내 경비를 해결했다. 그리고 이 일의 적임자로 권일신이 추천한 윤유일(바오로)을 낙점했다. 그제야 이승훈은 명주 천(어떤 자료에는 비단이라고 함)에 깨알같이 글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 속에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제기했던 이의 글도 동봉했다.
29살 청년 윤유일은 은 20냥으로 동지사 수행단의 마부 자리를 얻어 북경으로 갔다. 윤유일은 1790년 1월 30일 북경 북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를 찾았다. 하지만 이승훈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그라몽 신부는 광동으로 떠나고 없었고, 예수회로부터 선교지를 이관받은 라자로회 선교단장 로 신부가 그를 맞았다. 윤유일은 들키지 않기 위해 옷 속에 꿰매어 숨겨왔던 편지를 로 신부에게 줬다.
구베아 주교의 답장 들고 조선으로
편지에는 조선에 교회가 세워져 세례받은 신자가 1000명이 넘고 이들을 위해 이승훈 자신이 신부들을 임명해 성직 제도를 운용하다가 잘못된 것임을 뒤늦게 알고 중단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승훈은 이 일을 ‘통회’하는 고백문을 적었다.
“저는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으니, 저는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제 발로 마귀의 종이 되어, 성사를 집전하는 일까지 손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잃도록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제가 저지른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아! 저를 용서해 줄 곳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엔들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를 기꺼이 기다려주신 저 무한한 자비에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제가 어디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자료집」 제1집 253쪽)
로 신부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 신앙 공동체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구베아 주교의 지시에 따라 이승훈을 비롯한 조선 교회 신자들의 질문에 답장을 써 윤유일에게 줬다. 로 신부는 이 편지에서 평신도들이 함부로 성사를 집전한 것은 교리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관대하게 용서했다. 그러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라고 권유했다. 아울러 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윤유일은 1790년 2월 북경을 떠나 음력 4월 한양에 도착했다. 이승훈을 비롯한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윤유일이 가져온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와 로 신부의 편지를 읽고 그때부터 성직자 영입 운동에 들어갔다.
교회에 순명한 초기 지도자들
3회에 걸쳐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제도에 관해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초기 조선 교회 젊은 지도자들이 교회 서적을 통해 자신들의 성직 활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그 즉시 중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 교회 성직자들에게 직접 가서 물어봤다는 점 역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혈기만으로 교회를 꾸려간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식별’을 위해 ‘교회에 의탁’했고, 또 ‘교회에 순명했다’는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나주 윤 율리아 등 교회에 순명하지 않고 교우들에게 그릇된 신심을 퍼뜨려 현혹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조선 교회 젊은 지도자들이 갈구한 것은 순수히 성체성사를 비롯한 일곱 성사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교회 서적을 통해 영적 예배의 성사적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성사 갈망과 구원을 위한 ‘올바른 식별’은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께서는 기도 안에서 지혜와 믿음, 식별의 은총을 주신다. 이 식별의 은사로 신앙의 빛에 조명되어 신비를 뛰어넘어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북경의 선교사 로 신부는 조선의 새 교우들을 나무라지 않고 성사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3월 22일, 리길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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