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6년 5월 21일 (목)부활 제7주간 목요일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영성ㅣ교육

sub_menu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10: 노인과 바다 - 일상의 고통과 성사적 은총

227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5-20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0) 「노인과 바다」 : 일상의 고통과 성사적 은총


못 박힌 듯 상처 뿐인 손… 어부는 끝까지 믿음의 그물 던졌다

 

 

미사의 마침 예식은 성체성사의 거룩함과 세속과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의 은총을 일상 삶으로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미사의 라틴어 어원인 ‘missa’는 ‘파견하다’ 혹은 ‘보내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는 미사를 통한 성사적 체험을 일상 안에서 살아가도록 파견받는다. 가정, 혹은 일터는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면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인과 바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겪었던 인간 존재 의미의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1950년대 지배적인 정서는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피로감과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작가는 역사나 이념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일상 안에서 겪는 시련의 과정과 태도를 통하여 인간과 삶을 긍정한다.

 

이 소설은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노인 산티아고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허무함과 좌절감에 빠질 수 있는 배경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과 함께 일했던 어린 조수 마놀린의 부모는 노인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해, 아들을 다른 어부의 배에 타도록 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자신을 ‘놀리는 어부들’의 시선이나, 계속 허탕 치고 있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늘도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바다에서 고기 잡는 준비와 행위는 생계를 위한 단순한 노동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례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 바다로 나가야 하는지, 물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미끼를 꿰는 방법, 낚싯줄을 당길 때 힘의 조절 등의 규격화된 반복적인 동작은 기계적인 습관이 아니라, 한평생의 고기잡이를 통해 응축된 몸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노인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일종의 몸에 각인된 의례이다.

 

종교의 의례적 행위가 정형성과 반복성을 통해 속세 한가운데에서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듯, 노인의 몸에 새겨진 고기잡이 행위는 바다에서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창출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차를 마시게 될 때, 이 차 한잔을 마시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의 부대끼는 시끄러움 속에서 가장 거룩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돈을 제법 많이 벌어들인 젊은 어부들은 전통적인 ‘찌’ 대신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며 부표를 사용하여 고기를 잡는다. 그들은 바다를 남성인 ‘엘 마르 (el mar)’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바다는 ‘경쟁자나 투쟁 장소, 심지어 적’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바다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흐름과 관계를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살아간다. 비록 바다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야 하지만, 주인공은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찬미받으소서」 82항) 여기지 않고, 존중, 친밀감, 연민 등을 바탕으로 깊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다. 창조는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만남의 역동성이다.

 

젊은 어부들과 달리,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 (la mar)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다.” 또한 날치를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 밤사이 배 가까이 다가온 돌고래 두 마리의 물을 뿜어내는 소리만 듣고도 누가 수놈인지 혹은 암놈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을 보여준다.

 

또한 외적으로 내적으로 고통받는 대상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늘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지만, 허탕 치기 일쑤인 작고 가냘프고 까만 제비갈매기’가 인간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고 있다고 가여워한다. 노인은 과거에 청새치 한 쌍 가운데 암놈을 잡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수놈이 항상 암놈에게 먹이를 양보하기에, 암놈이 낚싯바늘에 걸려들었다. 마지막까지 암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수놈을 보며, 마음 아파했던 노인은 ‘암놈에게 용서를 빌고 도살 작업을 신속하게’ 마쳤다. 바다에서 경험한 ‘가장 슬픈 광경’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84일간의 허탕을 뒤로하고, 자신의 작은 낚싯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는다. 그러나 배 옆에 매달려 있던 고기를 상어들이 다 먹어 치워버리고, 뼈만 남은 채 항구로 돌아온다. 바로 이 부분이 헤밍웨이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이다. 여러 날 동안 몸을 망치며 어렵게 잡은 물고기가 결국 다른 포식자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주인공의 위대함은 물고기를 잡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겪게 된 극도의 고통과 피로감과 심리적 압박을 견디어 냈다는 점에 있다. 한밤중에 상어들이 다시 달려들면 끝장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노인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라며 굽히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노인은 ‘패배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노인은 패배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한다. “나를 패배시킨 것은 없어,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저 집을 향해 배를 몰고 간다. 항구에 정박한 노인의 배에 묶인 뼈를 보며, 사람들은 “그런 물고기는 정말 한 번도 본적이 없어”라며 경외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세상의 칭찬과 인정이 노인의 인간 존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물질적 혹은 경제적 보상이 없더라도, 어부로서 노인이 보여준 의례적 행위, 친밀감, 용기, 충실함, 끝까지 버틴 인내심이 그의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물고기를 성공적으로 잡는 것보다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인간 존엄을 보존할 것인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흥미롭게도 비평가들은 노인이 바다에서 겪은 고통과 인내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닮았음을 언급한다. 여러 날 동안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손은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지고 상처를 입는다. 기력은 소진된다. 그의 몸은 탈진되고 부서진다. 3일 동안의 바다 여정을 마치고 항구에 도착한 후, ‘돛대’를 빼서 ‘어깨에 메고 기슭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부서진 몸은 무거운 돛대의 무게로 인해 여러 번 넘어지고 주저앉아야 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엎드려 얼굴을 신문지에 대고, 양팔을 밖으로 쭉 뻗어 내밀고 손바닥은 위로 향한 채 잠이 들었다.”

 

미사의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수반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상처받아야 했다. 그 상처에 대한 순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다. 사람들은 이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바다와 깊은 친밀감을 형성한 노인은 동시에 바다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게 된다. 공동체의 도움이 닿기 힘들어 홀로 서야 하는 ’먼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체력, 잠, 땀과 피, 심리적 힘 그리고 정신적 힘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다시 빈손으로 돌아온다.

 

십자가의 역설은 외적으로 패배하였지만, 진정한 내면의 더 깊은 승리라는 것이다. 3일 동안의 사투 끝에 또다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노인의 상처 난 빈손은 물질적으로 실패였지만, 한 어부로서 인간 존엄을 지켜냈다.

 

바오로 사도는 긴 선교여행과 박해 속에서도 사명을 완수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산티아고의 상처난 빈손도 말한다. “나는 부끄럽지 않게 싸웠고 견딜 것을 다 견디었으며, 어부로서 소명을 지켰습니다.”

 

헤밍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일상 안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회복을 바라며, 인간 존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를 초대한다.

 

[가톨릭신문, 2026년 5월 17일,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0 5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