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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15: 죄와 벌 - 거룩함

229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7-26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5) 「죄와 벌」: 거룩함


지옥 같은 세상 속 거룩하게 피어난 부활과 구원의 희망

 

 

현대 종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종교현상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성과 속」이라는 명저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거룩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사회가 세속화와 물질주의로 물들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속세의 삶 안에서 신성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거룩함과 세속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호렙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계약의 궤가 있던 지성소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즉 거룩함은 인간 삶의 터전과 분리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러, 유한함과 죄스러움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거룩함이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필리 2,7 참조) 오로지 신성함만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세계 문학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1860년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농노제 폐지 이후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문제들을 인간 내면의 심리와 도덕성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인간의 죄스러움과 거룩함이 어떻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지식인 청년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고, 허무주의 혹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극단적 공리주의가 유행하였다. 법학도였던 라스콜리니코프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초인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누어지는데, 평범한 사람과 달리 비범한 사람은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도 법률을 범하는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은 극심한 생활고와 빚을 해결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이복여동생을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논리적 세계는 끔찍한 범죄행위를 정당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 같은 비범한 사람에 의해서 처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한 인간의 삶을 공공의 이익에 따라 저울질하고 계산한 후 폐기해 버린다. 그의 죄는 그냥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단순한 법적 차원이 아니라, 한 인간을 수단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이다. 비록 노파가 윤리적으로 부족한 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될 수 없다. 주차장 경비원이 부와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였을 때, 굴욕당한 자존감의 아픔은 몸의 상처와 비교될 수 없다.

 

살인 후에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면의 양심은 차가운 이성과 관념으로 무장된 주인공의 자기기만과 합리화를 치명적으로 흔들어 버린다. 아무도 보지 못한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로 양심은 그가 자신에게 강요했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열병 같은 오만과 짓눌리는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존재론적으로 고립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내적으로 분열된다.

 

여주인공 소냐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창녀의 삶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매춘은 당시 러시아의 극심한 빈곤과 사회적 억압을 암시한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국가가 발행한 ‘노란 감찰’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며, 시민으로서 기본권리를 박탈당하고, 최하층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와는 다르게,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소냐의 삶은 동시에 거룩한 희생의 사랑을 보여준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무책임한 계모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나중에 법정에서 계모는 소냐가 ‘노란 감찰’을 받은 이유는 “아이들이 굶어 죽게 되어서, 자기 몸을 판 것”이라고 소리친다. 즉,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과 삶을 희생한 거룩한 죄로 인식된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매개체도 된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참혹함을 온전히 인식하였을 때, 그녀는 매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며 손을 비튼다. 그 앞에 쓰러지고 흐느끼며 말한다, “당신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살해당한 노파뿐만 아니라, 살인자 자신도 겪었을 자신의 인간 존엄성 파괴에 대하여 암시한다. 그리고 꼭 껴안아 준다.

 

결코 도덕적 무관심, 혹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먼저 그가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도록 초대한다. “네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에 키스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땅에도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하여 큰 소리로 ‘전 살인자입니다!’라고 하세요.”

 

소냐는 그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전에 그녀의 방을 찾아간다. 그녀는 라자로의 부활(요한 11장 참조) 이야기를 읽어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상징적 장면이 아니다.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부서진 삶 그리고 죄의 깊은 심연 한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삶이 열릴 수 있다는 그녀의 신앙이 실제로 현실 안에서 재현됨을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방법은 논쟁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와 함께하며, 그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고 결과에 따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죄의 결과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홀로 짊어지지 않도록 함께 견디어 준다.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고난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간다.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는 ‘참지 못하고 자수해 버린 것’만 인정할 뿐, 여전히 자기 죄악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수하기 전에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한다. 또한 자신을 위해 험난한 이곳까지 따라온 소냐를 “늘 화가 난 말투로 맞았다.”

 

마침내 그는 소냐가 “원래 그의 삶만을 자기 삶으로서 살아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가 온전히 그를 위해서만 살아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끌려 그녀 발밑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피었다.” “그는 소생한 것이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난 자기의 전 존재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냐의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한 구원과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래로 내려와서, 곁에 머물며, 함께 고통을 겪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였다. 죄를 지워버리거나 정의를 건너뛰지 않고, 죄와 고통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조건 안에 머물며, 그곳에서 인내하며 구원의 빛을 밝힌다.

 

거룩함의 원천은 오로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 바로 그곳에 거룩함이 머문다. 도스토옙스키는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페테르부르크 뒷골목의 지옥 같은 공간을 포기하지 않고, 소냐의 거룩함을 통해 새 생명을 잉태한다.

 

[가톨릭신문, 2026년 7월 26일,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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