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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42: 악습의 극복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참사랑의 질서

100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9-07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2) 악습의 극복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참사랑의 질서


내면에 도사리며 참행복 파괴하는 악습… 사랑으로 바로잡아야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연결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영적, 윤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며 느끼는 극심한 박탈감과 질투, 익명성 뒤에 숨어 특정 대상을 향해 쏟아내는 무차별적인 증오와 비난, 그리고 모든 가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무기력증과 우울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영적인 가치보다 감각적 쾌락에 침잠하며, 나와 의견이 다른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과 악습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참사랑의 질서(ordo caritatis)’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이기주의와 맹목적인 자기희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교한 지혜의 체계다. 

 

- 참사랑의 내적·외적 효과를 거스르는 악습들은 인간의 참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사진은 나태, 질투 등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칠죄종)과 죽음·심판·지옥·천국을 묘사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일곱 가지 죄악과 네 가지 마지막 일> 위키미디어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질서

 

토마스는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덕임을 강조한다.(II-II,23,5; 25,1) 참사랑은 하느님을 참행복의 원리로 사랑하고, 이웃은 그 행복에 함께 참여하는 동료로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사랑은 흔히 비난받는 이기심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합된 자신의 영혼을 긍정하고 보존하려는 우정의 성격도 지닌다. 토마스는 자신과 하나임이 타인과 하나가 됨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보았기에, 올바른 자기 긍정이 곧 이웃 사랑의 원초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웃 사랑 역시 상대의 매력이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참행복을 나눌 동료이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II-II,25,12) 

 

그런데 참사랑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부모나 가족같이 더 가까운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며, 점차 모든 이웃으로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이런 유기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은 비로소 사랑의 가장 어려운 단계인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를 해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토마스에게 이는 참사랑이 지닌 신적 탁월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는 원수를 ‘원수로서’ 사랑하는 것, 즉 그가 지닌 악의와 적대감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일이라고 엄격히 선을 긋는다.

 

그러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일지라도, 그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의 참행복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II-II,25,8) 감정적으로 친밀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부합하는 선한 일이지만, 오직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강인한 참사랑의 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원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의 산물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더 강한 참사랑의 힘을 증명하기에 더 뛰어난 탁월함을 지닌다.(II-II,27,7) 그러나 이러한 참사랑의 고결한 운동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다양한 악습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참사랑을 거스르는 악습들

 

참사랑의 내적·외적 효과를 거스르는 악습들은 인간의 참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토마스는 미움, 나태, 질투, 불화, 걸림돌과 같은 다양한 악습을 통해 사랑의 결핍이 가져오는 실존적 비극을 분석한다.

 

‘미움(odium)’은 최고선인 하느님과 이웃의 존재 자체를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무질서이며, 이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기에 가장 중대한 죄가 된다.(II-II,34,2) ‘나태(acedia)’는 신적인 선에 대해 슬픔이나 권태를 느끼는 행위를 말한다.(II-II,35,3) 이는 현대인의 번아웃이나 영적 무기력과 맞닿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며 오히려 그 선함을 짐으로 여겨 슬퍼하는 치명적인 게으름이다.

 

‘질투(invidia)’는 타인의 선을 자신의 열등함이나 손해로 여겨 슬퍼하는 이기적 성향으로, 토마스는 질투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고 성공을 괴로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관계를 파괴한다고 경고한다.(II-II,36,1) 이는 SNS 등 현대적 공간에서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화(discordia)’는 마땅히 동의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의 선에 의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지의 분열이다.(II-II,37,1) 선을 온전하게 식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한 불화가 있게 되지만,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스캔들(scandalum)’은 타인을 죄와 영적 몰락으로 이끄는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스캔들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써 타인이 영적으로 넘어지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로 규정한다.(II-II,43,1) 이는 오늘날 영향력을 지닌 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통찰이 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로 지적된 다양한 악습들은 결국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속적인 선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악습들이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인 참행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임을 밝혀냈다.

 

단적으로 말해,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와 증오의 시대에도 참행복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한편으로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선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회복할 때만 얻을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자만이 타인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멈추고 영적인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다스려질 수 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올바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넘침으로 이웃과 원수까지도 품는 것이 그 길이다.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우리의 의지를 정렬할 때, 인간의 내면은 비로소 질서 잡힌 평온함에 도달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2026년 9월 6일,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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