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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덕원의 순교자들1: 총론 - 덕원의 순교자들 기획에 들어가며

110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3-05-25

[덕원의 순교자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평화신문 공동 기획] (1) 총론 - '덕원의 순교자들' 기획에 들어가며

복녘에 복음 전파하고 주님 증거하다 스러진 20세기 순교자들


2009년 12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성당에선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될 의미 있는 시복재판이 열렸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시성을 위해 구성된 이 예비심사 법정은 20세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재판이란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 주목받았다. 시복 예비심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16차례 회기를 마친 다음 그 기록을 정리해 이탈리아어로 번역,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고 얼마 되지 않아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재판에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재판에 대한 교회 구성원과 세간의 관심은 점차 사그라졌다. 지난해 시성성을 방문한 이형우 아빠스를 비롯한 시복재판 관계자들은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한국과 독일 교회 신자들이 이분들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현양하고 있습니까? 이분들이 하루 빨리 성인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신자들에게 이들을 알리고 기도하게 하십시오"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시성성 장관의 우려처럼 솔직히 한국 교회 신자들은 이분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이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평화신문은 시성성 장관의 바람대로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를 널리 알리고 이들의 현양 운동을 교회 안에 확산하기 위해 특별 기획 '덕원 순교자들'을 연재하기로 했다.

-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전경. 덕원수도원은 카예타노 피어하우스 신부와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가 설계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길이 57m, 너비 19m, 종탑 높이 34m였다.


"작업은 갈수록 혹독해졌고
처우는 갈수록 잔인해졌으며
굶주림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침묵하고 참고 기도하고
하늘에 부르짖었습니다.
용기가 꺾였습니다.
정신력도 붕괴되고
들판의 돌무덤 위에 아무 데나 앉아
어린애처럼 울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당한다면
오히려 복일 것입니다.
1951년 9월1일 에우세비오 수사가
영양실조로 선종했습니다.
우리는 감시병들이
그를 마지막까지 들볶고 게으름뱅이라
욕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에우세비오 수사의
죽음까지 비웃었습니다"
(옥사덕 수용소 증언록 중에서)


덕원의 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정치 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신론자인 공산당원들에 의해 무참히 순교한 이들이다.

북녘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 6ㆍ25 전쟁을 전후해(1949~1952) 공산주의자들 손에 적잖이 희생됐다. 이 가운데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ㆍ연길수도원ㆍ원산수녀원 소속 수도자들과 함흥대목구ㆍ연길대목구 소속 사제 38명도 포함돼 있다.

덕원의 순교자 중 이번에 선정된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 가운데는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13명이고,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가 25명이다. 교계 직분으로 좀 더 세분하면 주교 1명, 성직수사 13명, 덕원ㆍ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고 연길교구 사제 2명도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이다.

또 이들 38위 순교자 중 23명은 평양인민교화소와 자강도 만포 관문리수용소 등지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고, 13명은 옥사덕 수용소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굶어 죽었다. 그리고 한윤승(필립보)ㆍ신윤철(베드로)신부는 해주인민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근처 바닷가에서 생매장됐다.

 

- 한국에 첫 번째로 입국한 상트 오틸리엔 출신 수도자들.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앞줄 가운데), 파스칼리스 팡가우어(뒷줄 가운데)ㆍ일데폰스 플뢰칭거(뒷줄 오른쪽) 수사 등이 하느님의 종 38위으로 선정됐다.



주요 인물로는 초대 원산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장이었던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덕원 수도원 출신 첫 한국인 사제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그리고 고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등이 있다. 또 루치우스 로트 덕원수도원장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가 독일 주재 교황대사로 있을 때 대사 비서로 일했고,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한국어 신약성경을 번역 출간해 성경 보급에 앞장섰다. 백작 가문의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두메 본당 신부'로 희생적 삶을 산 수도자였다. 또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는 한국인 첫 수련장 수사였고, 성 남종삼(요한)의 후손인 부산 출신 김동철(마르코) 신부는 월남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기 본당을 버리지 않고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체포돼 순교했다.<표 참조>


순교 자료들

덕원의 순교자들 삶과 수난사는 처음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인 수도자들이 교화소에 갇혔을 때 수도원에서 쫓겨난 몇몇 한국인 수도자는 담장 안의 형제와 비밀 쪽지를 주고받았다. 이들 한국인 수도자들의 담대한 용기가 없었던들 많은 순교 행적이 영영 땅속에 묻힐 뻔했다. 또한 옥사덕수용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수도자들의 증언도 그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시복 청원 배경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5월 10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덕원의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2007년 2월에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평의회 권고와 같은 해 봄에 열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회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우리 시대 최근 연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시복 청원 의미

20세기 순교자로서 '덕원의 순교자들'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는 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는 데 있다.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분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과 별개가 아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들의 순교 행적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공경할 만하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26일, 리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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