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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교부편(8) 예루살렘의 치릴로

527 심재엽 [simjy] 2005-03-19

【27】교부편(8) / 예루살렘의 치릴로

 

  「예비신자 교리」 등 주옥같은    교리서를 남긴 예루살렘의

   치릴로는 동방교회 교부들 중에    서도 「교회 학자」 칭호를 받    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예비신자 교육의 대가

 

주옥같은 교리서 “지금도 중요 문헌”

성삼교리 설정에 크게 공헌하기도

 

『여러분은 먼저 세례성사가 거행되는 성전

바깥으로 가서 동쪽을 향해 선채 귀기울였고

마치 사탄이 여기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사탄을 끊어버리면서 손을 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고대 역사에서 하나의 상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약하고 잔인한 파라오가

자유롭고 관대한 히브리 사람들을 학대할 때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들을 이집트 인들의 종살이에서 풀려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때 문에는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었는데 이것은 학살의 천사들이 피의 표식을 지닌 집들을 손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루살렘의 치릴로 「신비교육」 중).

「예비신자 교육의 대가」로 불리는 예루살렘의 치릴로(313~387)는 동방교회 교부들 중에서도 「교회 학자」(doctor ecclesiae) 칭호를 받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교회 학자는 뛰어난 가르침이 인정돼 교회로부터 공식적 선포가 있어야 가능한데 특히 교부들이 학자 칭호를 받는 경우는 더욱 특별한 학문적 권위를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기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특히 성서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349년 막시모(Maximus)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로 서품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체사레아 주교 아리안파의 아카치오(Accacius)로부터 품을 받은 것이 화근이 돼서 대주교 아카시우스와 마찰을 일으키고 아리안파 또는 반 아리안파로 낙인 찍혔다.

아카시우스는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치릴로를 해임하였으나 그는 이에 저항했고 그 때문에 아카시우스는 군사를 동원, 무력으로 그를 추방했다.

세 번이나 예루살렘 바깥으로 귀양을 갔던 치릴로는 38년 주교 임기동안 16년을 귀양살이로 보내야 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치릴로는 아리우스파와 정통 신앙인들로 갈라진

예루살렘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으며 또 순례의 중심지로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품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세계 공의회에 참석, 니체아 신경 수정안의 선포를 도모한다.

「일체」-즉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가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란 말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아리안파의 양자설(養子說)을 배척한 것이었고 성부 성자와의 일치를 성령께 연결시키는 성삼 교리 설정에 큰 공헌을 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참회의 행위라고 말하는 한편 공의회의 주교들은 아리아니즘에 대항한 정통파의 투사라는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치릴로가 교리교육의 대가로 불리는 것은 「예비신자 교리」등 주옥 같은 교리서 등의 영향 때문이다.

사상, 전례, 성예술, 그리스도교 문학 등 분야에서 최대의 황금기였던 4세기 교회는

어른들에 대한 교리교육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어른 예비신자의 수가 점점 증가하여 유아세례자의 수보다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례를 위한 교리 교육의 황금기를 맞아 동서양 주교들은 어른 교리 교육을

위해 저술을 남기곤 했는데 24편 강론으로 구성된 치릴로의 「예비신자 교리」는 예비신자들과 새 영세자들을 위한 일종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써 지금까지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으로 남겨지고 있다.

348년 사순절과 파스카 주간 등에 발표한 것으로 전해진 이 교리서들은 「입문적 교리서의 완전한 시리즈」로 평가받고 있다.

치릴로는 예루살렘 주님성묘성당에서 348년 이 강론들을 했었다고 알려진다.

한 청취자가 강론들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사순절 교리교육에서 치릴로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를 선포하고 있는 성서의 여러 과정들을 설명하며 구약의 예언들에 상응하는 것이 신약시대의 성사들임을 밝힌다. 또 그는 세례때 고백하는 신경에 집약된 신앙 진리를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신앙교리들을 자세히 얘기하고 있다.

세례후 부활 주간에 행한 강의인 「신비교육」은 구약성서를 신약 사건의 예형으로

해석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를들어 앞서 인용됐듯 세례의 예형으로 홍해를 건너는 것을 들었고 또 성찬식의 예형으로 「만나」를 꼽는 등 구약 내용을 중요 전례 예식 설명에 사용했다.

그의 이러한 강의들은 당시 예루살렘 전례를 알려주는 자료가 될뿐 아니라 신비교육

신학 세례 교리교육에 대한 증거 자료로써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학자들은 치릴로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 프와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

처럼 정통 교리와 니체아 공의회 가르침에 따른 신앙 때문에 박해를 겪은 인물로 설명한다. 또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평온한 힘의 소유자로서 시련 중에 꿋꿋했고 진리안에서 사랑과 일치를 모색하던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치릴로는 387년 3월 18일 선종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이날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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