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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교부편(9) 대 바실리오

528 심재엽 [simjy] 2005-03-19

【28】교부편(9) / 대 바실리오

 

교회 사회활동 선구적 개척

구빈기관 세워 노인 등 돌봐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

 

4대 공의회로 일컫는 니체아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에페소공의회(431), 칼체돈공의회(451)는 당시 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것은 대중의 대량 입교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편 아리우스 이단, 단성론 등 여러 이단들에 대한 논쟁이 들끓었는데 각 공의회들은 그같은 이단들에 대항해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정 공포했기 때문이다.

325년 개최된 니체아공의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천주 성부의 첫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위계적인 성삼론을 폈던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의 의견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교 기본 교리인 성삼론과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이단은 황제와 정치권의 비호를 받으며 세미 아니아니즘 등으로 변형돼 계속해서 교회 안의 뜨거운 감자로 골치거리로 남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가빠도기아의 3대 교부로 꼽히는 대(大) 바실리오(329∼379)는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니체아공의회 결정 사항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신학자다.

동방교회 4대 교부중 첫 번째로 꼽히는 그는 이름 앞에 「대」(Magnus)명칭이 붙을

만큼 학자로서의 업적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바실리오는 가빠도기아 체사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처음 아버지에게서 수사학을

배우다가 당시 일반 지식인들처럼 체사레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에서 수학했으며 체사레아에 정착한 뒤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교육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356년 세례를 받고 「복음 정신에 따라 하느님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 이집트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다니며 수도승들을 만나는 수행 생활을 했다.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청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네오 체사리아의 이리스 강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에서 만났던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가 찾아와 수도 생활에 합류하게 된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함께 가빠도기아 3대 교부중 한명으로 꼽힌다.

바실리오는 여기서 오리제네스 저서에 심취, 그레고리오와 함께 오리제네스의 작품들에서 여러 구절을 뽑아 사화집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공동으로 편찬했다.

체사레아 대주교 에우세비오의 설득에 따라 365년 사제품을 받은 바실리오는 이후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지침으로 80개 항목의 「도덕집」(Moralia)을 펴내기도 했다.

370년 에우세비오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대주교직에 오른 바실리오는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목,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바실리오는 교회 사회 활동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깊은 가난 속에 제국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에 휘둘리는 민중들을 보며 또 고리대금업이 활개를 칠만큼 황폐해진 사회 현실에 직면하여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것」, 「모든 인격은 고귀하다는 것」, 「탐욕과 축재 제한을 위해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 발전시켰다.

「바실리아데」라고 부르는 구빈 기관을 만들어 노인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시스템을 갖춘 것은 혁신적이었다.

이러한 바실리오의 노력에 대해 나지안츠의 그레고리오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평했다. 「복음의 내적 충동으로 움직인 최초의 사회활동가 가운데 한사람」이라는 바실리오의 면모가 드러난다.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업적외에도 심각한 분열 현상을 겪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교회 일치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로마 교회와의 일치 없이는 교회의 진정한 일치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교황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바실리오는 수도생활 전례 면에서도 탁월한 유산을 남겼다.

「성령론」 서두에서 새로운 영광송을 제시했으며 서간 207편에서는 새로운 전례 음악을 도입했던 그는 수도원들의 전례기도를 개혁했다.

또 「1시경」과 「끝기도」를 시간 전례에 처음 시도했다.

그의 전례는 수도원을 통해 동방 교회 및 이탈리아까지 널리 전파됐고 987년에는 블라드미르 대공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에도 도입됐다.

비잔틴 예식을 지키는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실리오 전례가 사순절과 연중 대축일급

전례에 사용되고 있다.

바실리오는 한편 자신의 수도생활 경험을 통해 「바실리오 규칙서」를 내놓음으로써 수도승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조직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것은 바실리오가 사제 주교 서품 후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자들이 질문했던 내용과 응답을 모아놓은 것으로 「도덕집」, 「대수덕집」, 「소수덕집」 등이 있다. 모아진 응답들은 3차례에 걸쳐 편집됐고 편집 때마다 새로운 응답들이 첨가돼 여러 모음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소수덕집에는 수녀들에 관해 언급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도회 역사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수녀들에 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바실리오 규칙서는 복음적

성격과 형제들의 상호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수도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규칙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동방교회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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