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부편(12)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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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심재엽 [simjy] 200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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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교부편(12)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테오도로는 그리스도론 발전에 기여했다.
테오도로는 그리스도 안의 인성의 완전성을
강조했는데,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된
우리의 형제라는 인식이 바탕이 됐다.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며, 육화한 참 하느님이다.
참 인간이 된 그리스도 강조
이단과 토론 성령의 신성 변론
수많은 주석서 교리서도 저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의 수도로서 그 문화재들이 유명한 곳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손꼽혔던 안티오키아의 도로 주변에는 로마인들이 세운 석상과 신전, 극장,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등이 즐비했다.
이 곳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christiani)이라고 불린 바로 그곳이었으며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이냐시오, 테오필로, 세라피온과 같이 유명한 주교들을 비롯해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마치 성체와도 같이 안티오키아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고 전했다.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한, 특유의 신학 방법론을 일러 안티오키아 학파로 부르며, 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함께 고대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기둥 역할을 했다.
타르소의 디오도로는 바로 이 안티오키아에서 가르치면서 큰 명성을 얻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서 주석가로서 성서의 각권을 모두 주석했으나 실제로 남은 것은 몇몇 단편들 뿐이다. 가빠도기아 교부들과 동시대인으로서 자신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깊은 존경을 받던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돋보이는 스승 역할을 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몹수에스티아의 주교인 테오도로이다.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성서 주석가인 테오도로는 36년(392~428) 동안 킬리키아 지방에 있는 몹수에스티아의 주교로 재임하면서 빼어난 성서주석가이자 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테오도로는 350년 경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주고 받은 서신을 통해 나타난 바로는 그는 안티오키아의 유명한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테오도로는 요한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 타르소의 디오도로가 세운, 아스케테리온이라 불린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3개월 남짓 머문 테오도로는 결혼도 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이곳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친구인 요한의 권고에 따라 계속해서 공동체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때 요한이 테오도로에게 권고한 글 「타락한 테오도로에게」(Ad Theodorum lapsum)는 지금도 전해진다.
그는 이 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삶과 성서 주석 방법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게 됐고 공부를 모두 마친 뒤에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플라비아누스로부터 383년 사제품을 받고 안티오키아가 분열의 아픔을 겪는 동안에 사목자이자 신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3년 뒤인 386년부터 테오도로는 수년 동안 타르소에 머물다가 392년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몹수에스티아의 공동체로부터 주교로 추대됐다.
그리고 그는 42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주교로서 사목활동과 성서 주석, 신학 연구에 몰두한 이 36년 동안 그는 수많은 주석서와 교리서를 저술했고 성령을 부인하는 이단론자들과 토론을 벌여 성령의 신성을 변론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사목활동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점은 이처럼 이교인과 벌인 토론과 성서해석, 세례지원자와 신자의 교육에 관한 것들이었다.
테오도로는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사후에는 그의 저작들을 둘러싸고 단죄를 받는 처지가 됐다.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벌어진 428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지만 그는 이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
이는 스승인 디오도로의 운명과 비슷한 처지였지만, 테오도로의 경우에는 그를 단죄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의 근거로 사용한 발췌문이 그의 신학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무튼 그는 스승인 디오도로와 함께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론의 선구자로 간주됐고, 에데사의 이바스, 치루스의 테오도레투스와 함께 공의회에서 단죄받음으로써 스승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작품들이 소실되고 만다. 다만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그 중 몇몇 단편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돼 그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상을 추론할 수 있게 됐다.
특히 1932년에 발견된 그의 16편의 「교리문답」은 시리아어 번역본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입교와 테오도로의 확실한 신학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들이다.
성서 주석의 경우에는 구약의 중요한 작품들과 신약의 거의 모든 성서를 망라한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펼치는데 있어서 교회의 전통을 매우 충실히 따랐다.
삼위일체론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이미 신학적으로 해결을 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론 문제,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테오도로는 그리스도 안의 인성의 완전성을 강조했다. 이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된 우리의 형제라는 인식이 바탕이 됐다.
즉 신성만 강조할 경우 인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경건성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성에 대한 강조는 또 다른 측면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안에서는 이러한 위험성이 잘 극복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가 아니라 교회의 정통 신앙의 수호자라는 것이 인정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