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반게시판
- 대림 4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IMMANU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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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윤미섭 [klaray] 20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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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4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IMMANUEL )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
전통 깊은 옛수도원에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강물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 사이에 이런 질문이 오고 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물에 좌우된다고 하는데 물은 도대체 어찌 생겼길래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서로 이야기하던 끝에 지혜롭다는 물고기가 동료들에게 제안했습니다.
"큰 바다에는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학자가 있다고 하더라. 그에게 가서
물어보자." 그리하여 몇 마리의 물고기가 학자 물고기를 찾아 큰 바다로 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조용히 듣고 난 늙은 학자 물고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어찌 자네들에게 물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는, 자네들은 물 안에서
생겨났고 물 안에서 움직이고 살다가 죽는다네. 물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때까지 그것도 몰랐단 말인가? 자네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 모두가 물일세!"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물이나 공기 같은 자연 환경들은 그것이 없으면 당장 우리가
살아있지 못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망각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바쁜 세상에 어떻게 하면 더욱 편리하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에도 벅찬 현실에서 너무나도 배부른 이야기일까요?
어쩌면 신앙이란, 세속적인 가치가 판을 치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그야말로
현실감각이 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과연 '신앙'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과연
믿을만한 사실인지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없이는 우리의 논의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각 사람의 '개인적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자주 이야기 해 왔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2차적인 것이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1차적인
것입니다. 즉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1요한 4,10).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근본적인 신앙은 하느님이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1요한 4,16).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안다는 것이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을 '하느님에 의한 전적인 받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의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일일까?' 하는 의심이
일어날 때 조차도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받아들이는 용기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에 살면서도 물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들처럼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은 개인의 체험을 초월합니다.
감각적인 체험을 넘어서는 희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의 생활을 하느님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임마누엘'은 무슨 뜻일까요? (성서적 설명)
마태오 복음사가의 '임마누엘'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혼인 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했음이 드러났고,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 아무도 모르게 파혼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셉의 꿈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시고,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알려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의 예언 말씀, 즉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7,14)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가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임마누엘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메시지의 내용은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성탄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서에서 '천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사는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이름을 갖는 사람의 전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를 희랍어로 번역할 때 쓰여진 것이며, 이 이름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또 '구원'은 '죄에서의 해방', '죄에 대한 용서'를 뜻합니다.
모든 인간이 처하는 죄, 구속은 결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구원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즉 임마누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인간의 죄로부터의 구원'은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요셉과 마리아의 얘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을 직접 보여주는 구원의 징표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임마누엘'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사야 예언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위와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렇다면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임마누엘'의 예언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왕 아하즈에게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야훼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며 표징을 청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고 '나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야훼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하는 그의 대답만을 놓고 볼 때
매우 경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하즈는 시리아와의 전쟁에 있어서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세운 정치적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경건을 가장하며 하느님을 벗어납니다.
즉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에 관한 예언을 합니다.
결국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도, 마태오 복음사가의 메시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메시지와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고, 실질적으로 힘을 주시는 하느님을
멀리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의 시작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자유롭고 죄에서 해방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본질적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모래위의 발자국
어느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의 장면들이하늘을 가로지르며 펼쳐졌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합니다.
그 중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모래 위에 새겨진 자신의 발자국을.
기나 긴 자신의 세월 속에 새겨진 발자국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슬펐던 일들이 일어났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면 늘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주님, 주님은 언제나 저와 동행하셨지요. 하지만 보셔요. 제가 가장 어려웠던 삶에 새겨진 것을.
한 사람의 발자국 뿐이잖아요. 어찌된 일인가요.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나요.
알 수 없어요. 왜 그러셨어요.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한시라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단다.
네가 고통과 환난 중에 있을 때에 모래 위에서 한 사람의 발자국만을 본 것은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맺는 말
기다림의 대림절, 사실 '기다림'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한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4명의 동료들이 함께 9시에 만나서 등산을 가기로 했는데, 정작 9시가 되어도
세 사람밖에 나타나지 않고, 나머지 한 사람이 15분, 30분,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네 번째 사람을 기다리는 1시간이라는 시간은 그 사람이 나머지 세 사람의 동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도 그분이 나의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그분 없이는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그분의 크신 은총과 사랑의 손길을 느끼는 신앙인의
모습에는 기쁨과 희망과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삶에 윤기를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보다 풍요 로와지고 여유 로와진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도 그러한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삶의 나눔 속에 기쁨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우리의 증거의 삶 속에서 '임마누엘'의 참뜻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기다릴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달라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