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수동 성 요한 성당] 사준 제 5 주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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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8 최성기 [henchoi] 20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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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의 특징적인 말 “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지지난 주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찾고 있었지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찾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바로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당신 뿐이라고 선언하신다. 지난 주에는 태어나서부터 소경인 사람과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나약한 인간성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소경처럼, “정말 세상을 바로 보고 싶습니다”라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런 소경인 우리에게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빛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나자로의 부활 이야기에서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이야기하신다.
2. 교회의 격언 중에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이다. Gloria Dei Homo Vivens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풍성히 살아가는 인간,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살아가는 인간, 활기찬 인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것은 죽어 있는 인간, 활력이 없는 인간, 우리 삶을 죽음과 어둠과 부정으로 지배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3. 오늘 복음에서 나자로는 무덤에서 나온다. 무덤은 바로 활력 없는 삶, 죽음과 어둠과 부정으로 지배당하는 삶을 상징한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미움이라는 무덤을 파고, 지나간 잘못에 대한 후회라는 무덤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무덤 속에서 우리를 스스로 가두고 있다. 바로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무덤, 혹은 죽음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가 예수님의 살리신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알아볼 수 있다.
4. 예수님이 살리신 세 사람은 누구 백인 대장의 딸, 과부의 아들, 나자로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 사람의 상황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한다고 이야기 한다. 백인 대장의 딸, 그 딸은 예수님이 방문했을 당시 집안에서 죽어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집안에서의 죽음이 우리의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적인 죽음이다. 쉽게 말하면, 직접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잃어나는 복수에 대한 생각, 미움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과 만난 때는 죽은 아들이 집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행렬할 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표현된 죽음, 어두움을 상징한다고 이야기 한다. 보다 강력한 하게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 표현되는 것이다. 생각과 상상 안에서만 머물던 미움을, 복수의 마음을 실제로 삶에서 표현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본다.
세 번째 나자로는 무덤에서 만난다. 무덤 속에 있는 나자로는 바로 이미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 썩을 대로 썩어서, 나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하는 일 마다 악행이요, 하는 일 마다 사람을 괴롭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이야기하실 때에는 이 모든 사람들, 맘으로 죄를 짓거나 실제로 죄를 짓거나, 하는 일마다 죄인 사람들을 다시 활기 차게, 다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어떤 악의 힘보다 더 강하신 분이심을 이야기 한다. 때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 죄가 너무 커서,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강하게 말씀하신다.
이제 곧 성주간을 맞이하면서, 본당 마다 고해 성사를 보고, 자신의 죄를 살핀다. 왜 우리는 판공성사며 고백성사를 보는가 그저 뉘우치기 위해서, 혹은 교회에서 하라는 하나의 의식이니까 혹은 자기 자신을 인간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으니까 부분적으로 맞다. 하지만, 우리가 성사를 보고, 고백하는 행위는 “이 세상의 어떤 악보다도, 이 세상의 어떤 죄 보다도, 당신 사랑의 힘이 더욱 위대하고, 큽니다”하는 신앙 고백의 행위이기도 하다. 한 주간 보내면서, 예수님의 말씀, 초대를 묵상하자. “아무개야, 나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