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8주일 (마태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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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김종업 [rlawhddjq] 20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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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성경의 숫자5(오), 오십, 오천 모두는 모세 오경, 곧 구약을 뜻한다.>
(마태14,13-21)
13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 세례자 요한이 목이 잘려 죽은 이 말, 곧 구약의 요한이 죽고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시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걸었던 광야, 곧 세상이라는 나라를 탈출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신앙 여정의 광야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그 외딴곳, 광야의 일을 완성하시려는 것.
(신명8,3)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일이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듣고 찾아온 군중들이다. 하늘의 생명을 위한 영의 고침을 모르는 가엾은 군중들이기에~
가엾은 마음, 스폴랑코나조마임-자비(애끓는 사랑) 그 하늘의 자비로 고쳐주셨음이다. 그 고치심은 말씀으로~
(마태8,16)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그렇게 광야(인생)의 삶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반드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그 말씀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려는 것.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ㄱ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왜 풀밭에 앉히셨을까
(시편23,1-4) 1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 목자이신 예수님의 막대와 지팡이 또한 양들인 우리를 이끄시는 말씀을 뜻하는 것. 풀밭에 앉아서 먹는 그 말씀, 양식은~ 아쉬울 것 없는, 쉼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이 생기를 얻어 어둠의 골짜기를 걸을 때 두렵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 목적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어둠(시련)의 길이 있기 마련이기에~ 그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 광야의 삶에서 얻어야 할 양식인 것, 곧 안식의 약속인 하느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19ㄴ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빵 다섯, 물고기 두 마리. - 모세 *오경의 제사와 법, 그리고 인간의 선악의 *두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그 오(5) 둘(2) 모두 심판과 죄. 그 부정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그 부정함을 받아 죄가 되시고 대신 당신의 몸으로 새로운, 깨끗한 빵, 곧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것.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 육의 쉼, 편안함을 위한 배를 불리는 빵으로 먹었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도 그 열심히는 어둠의 사건들 앞에서 하늘의 위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 저녁(땅-죽음)의 빵을 신약, 아침(하늘-생명)의 빵으로 바꾸어주신 그 새 계약의 빵(말씀), 그 말씀으로 먹었을 때 힘과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열둘(12)-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은 그 열두 광주리. 곧 열두 아들, 열두 사도를 뜻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肉의 배를 불리는 오천, 다섯의 그 구약의 빵으로 먹었다는 것,
말씀 묵상 때나, 미사 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파스카의 제물로 깨닫는 다면, 먹는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정함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그 피의 새 계약을 모른다면~그가 구약의 오천명 안에 들어 있는 것,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먹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뜻을 위한 육의 양식으로 먹었느냐, 하느님의 뜻인 영의 양식으로 깨닫느냐 가 중요한 것이다.
(요한6,27. 55. 63)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아멘.
연중 제18주일 제2독서(로마8,35.37~3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5)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37~39)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을 이어주시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에서 드러난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는 게 무엇인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공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끊어 버리도록 우리를 공격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탄이 공격하는 가능성에 대해 일곱 가지 도구를 지적한다.
1) 환난(anguish)~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재난과 시련, 영적 고통을 말한다. 이 환난과 시련은 내 잘못으로 올 수도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환난이 오면, 왜 나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원망과 의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고 미래의 영광과 축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2) 역경(distress)~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곤고(困苦;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 보통 '좁은 장소' 혹은 '여유가 없다'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번역했다. 역경이 닥칠 때, 곤고할 때, 내가 마치 새장같은 아주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불안하고 외롭고 고독할 수 있으며,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3) 박해(persecution)~이것은 환난과 시련과는 조금 다르다.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거부하고 방해하며 공격하는 핍박을 말한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했다.
4) 굶주림(famine)~이렇게 신앙때문에 믿음의 진리를 추종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어디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굶주림, 기근이라 한다. 사도 바오로도 복음을 전하다 이것을 겪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느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기근을 겪게 되어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아내 사라이를 빼앗길 뻔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굶주림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에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5) 헐벗음(nakedness)~우리가 복음을 갖고 복음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가끔 사도 바오로처럼 헐벗음(赤身; 적신)을 경험하게 된다. 헐벗음은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함을 말한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11,27)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하고 수행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위험(peril)~이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을 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과 생존의 위기, 죽음의 협박 즉 원수로부터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히브11,36-37참조).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함을 깨우쳐 준다.
7) 칼(the sword)~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가 죽이겠다고 하면 사람은 죽음앞에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한다. 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흔들리기 쉽다. 칼이란 우리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동정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순결(정결)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등반을 통해 완덕의 산을 오르면서 힘이 들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캐면서 완덕의 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8,37)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흔들려고 하는 7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듯이, 사도 바오로는 이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10가지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1) 죽음(death)~육체적 죽음과 죽음에 따르는 고통을 말한다(1코린15,55). A.D. 2세기의 순교자인 성 뽈리카르포는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87년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 이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했다.
2) 삶(life)~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말하며, 죽음과 반대 개념이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특권, 쾌락, 즐거움이 이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광야의 유혹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던 그것이다."
3) 천사(angels)~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한 천사, 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 악령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 질병을 가져다주고 우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악령들이 집요하게 방해하고 못 살게 굴더라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신앙이다. 죽음을 통해, 마치 단련을 통해 풀무불에서 정금이 나오듯 고난없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4) 권세(principalities)~통치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높은 자, 지존자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인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살했던 악한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이 많다. 그들 뒤에서 역사하는 세력들이 바로 악한 영들이다(에페6,12참조).
5) 현재의 것(present things)~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고통 등, 현재 손해를 보는 고통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오는 것이다.
6) 미래의 것(future things)~현재와 상반되는 '장래일'을 말한다.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지금 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구에 오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면으로 고통을 대결하게 한다.
7) 권능(powers)~악한 천사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을 말한다.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제한적으로 사용한다(점, 점성술, 타로 etc.).
8) 저 높은 곳(height)~위에 있는 어떤 힘(power above)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들- 권세, 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한다.
9) 저 깊은 곳(depth)~ 아래에 있는 세상(power below)을 말한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가난, 멸시,천대, 낮은 지위 등등. 8)과 9)는 아주 좋거나 아주 낮고 비천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10) 그밖의 어떤 피조물(any other creature)~이것은 위에 열거한 9가지 외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영적 세계의 어떤 악령들도,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리3,8ㄴ)
연중 제18주일 복음(마태14,13-21)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여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14)
'군중'에 해당하는 '오클로스'(ochlos; multitude; crowd)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본문은 여기에 양과 정도가 몹시 많음을 나타내는 '폴뤼스'(polys; great; large)란 형용사까지 사용하여, 마태오 복음 14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의 수효가 마태오 복음 14장 21절에 의하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따라서 여자들과 아이들 수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수가 2만명에 육박하는 상당히 많은 군중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14장 14절의 언급에서도 할 수 있지만, '군중'을 가리키는 희랍어 '오클로스'(ochlos)가 '귀족'과 대조를 이루는 '천민'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데서도 암시가 된다. 이들은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 큰 희망을 걸고 무리지어 나왔던 것이다.
한편,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e; was moved with compassion;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는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있으며 상대방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다가 상당히 거리가 먼데도 아들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탕자의 아버지가 가졌던 측은한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보여진다(루카15,20).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병자들을'에 해당하는 '아르로스투스'(arrostous; sick)의 원형 '아르로스토스'(arrostos)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 '알파'(a)와 '올바로 살다', '평안하다'(사도15,29)로 번역되는 '론뉘미'(ronnymi)의 변형이 합하여진 단어로서, '평안함이 없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으로 병든 자를 가리키지만(마르코6,5; 16,18), 마음에 괴로움을 안고 사는 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당시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음을 알 수 있고, 14장 15절에 저녁때가 되었다는 표현도 예수님께 나아온 병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그들을 고쳐주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