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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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0 이상익 [sangik0330]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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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새롭고 권위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마주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깃든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발을 일으키며 대들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잘 아는 더러운 영은,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이 세상에 기생할 수 있는 거점을 잃을까 두려운 듯합니다.
"멸망시키러"
사실 더러운 영, 그 자신이 어떤 가련한 사람을 멸망으로 끌어가고 있는 중이지요. 악은 먹잇감처럼 누군가를 골라 그 안에 자리를 잡고서, 그의 인격을 훼손하는 동시에 세상을 좀먹어 갑니다. 저마다 귀하고 소중한 하느님 모상의 존엄함을 함부로 무너뜨리면서 그렇게 합니다."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공격하는 더러운 영의 말마디에 댓거리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도구가 된 가련한 이를 구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더러운 영과 입씨름해서 그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동안 시달려온 한 영혼의 회복과 안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이 쫓겨나고 그는 구원됩니다. 이에 회당에 모인 군중이 놀라지요. 사람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어둠의 세력까지 복종하는 "권위"도 놀랍거니와, 그저 상대할 필요 없는 미친 사람으로 치부해 무시해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새롭고" 신선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나 구마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율법 안의 문자적 의미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율법의 정신을 실제 삶 안에서 구현해 주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더러운 영의 항변에서처럼,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들과 그다지 "상관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이 군중에게는 더욱 새롭고 권위 있게 다가옵니다.
제1독서는 모세를 이을 새로운 예언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 마지않고 고대하던 새로운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가져다 주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왔다면, 은총과 진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왔으니(요한 1,17 참조), 이제 종교적 가르침은 문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삶 안으로 들어와 생생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새롭고 권위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심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주님의 일"(1코린 7,32.34)"세상일"(1코린 7,33.34)
사도는 "주님의 일"과 "세상일"을 대비시키기 위해 혼인 여부를 기준 해서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지만 혼인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혼인한 이들의 신앙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지요.
아무래도 배우자나 가족, 재산 등이 생기면 직접적인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당장 코앞에 닥친 그들의 안위와 기쁨을 하느님보다 우선시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그건 생활인으로서 당연한 책임감과 충실성일 겁니다. 다만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며 주님의 일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에 있어 갈등 요소가 없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도 '주님의 일을 위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회당 안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통 받는 그 사람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악에서 그를 구하셨지요. 그의 회복이 하느님의 기쁨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안식일이었어도 아무 사심 없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이 병든 어떤 이에게 보여 주신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이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유와 구원이 그분께 어떤 이득이나 혜택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누가 될지라도 그분은 사심 없이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나의 신부를 행복하게 해 줄까"를 늘 염두에 두고 계시는 분이시니까요.
사랑하는 빗님! 세상과 신앙의 경계를 걷는 우리에게 악의 세력은 구체적 삶의 현실이 주님과 상관 없다고 속삭입니다. 마음껏 세상일을 걱정하며 올인해도 된다고, 그게 정상이라고 유혹하며 신앙을 부끄럽고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요. 오늘 더러운 영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곳곳에서 재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살고 있건 삐걱대고 있건 우리 모두는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잘 살면 그분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행여 못 살아도 그분 자비와 연민의 대상이니까요. 나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는 듯 나에게 올인해 사랑을 바치시는 주님께, 그분의 정결한 신부로서 맞갖는 사랑을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우리는 더욱 충만하고 생기 넘칠 것입니다.◆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