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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0월 5일 (토)연중 제26주간 토요일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성지순례 후기 나눔터
[순례후기]팔레스티나 성지 순례(2006. 6. 22.)-06일차

20 가톨릭교리신학원 [cci] 2006-10-24

엿새 : 6월 22일

암만→요르단 강(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 안)→야뽁 강→제라쉬→펠라→이스라엘(알렌비로 입국)→갈릴래아


토마스 모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광야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고 확인한 곳.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모세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곳.


내적인 눈으로 순례 여정의 파노라마를 보라. 호텔을 나와 암만 도심을 지나고 있다. 800미터 고지대다.


느보 산에서 내려다 보이던 모압의 평지들. 종종 베두인 텐트들을 스친다.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히브리인들도 이곳에 진을 쳤을까? 벼라별 깡통들이 모여 있다. 그곳에 새들이 둥지를 튼단다. 나무도 깡통도 없던 시나이에서는 새들이 어디에 둥지를 틀까?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에 들어선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다녀가셨다. 신부님은 그가 끝까지 생명의 존엄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기억하신다. 아름다운 교황. 요한 23세는 “답답하다, 창문을 열어라”고 하셨다는데, 지금 우리는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 안
(요르단 강과 히브리 백성들이 진을 쳤을 모압 평야. 오늘도 땅은 쩍쩍 갈라지고 있다.)

 

요르단 강. 바로 그 요르단 강에 선다. 많은 환상을 버렸기에 강폭은 좁고 물은 탁한 요르단 강 앞에서도 심상하다. 더욱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어디쯤에서 세례자 요한이, 어디쯤에서 예수님이, 어디쯤에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또 어디쯤에서 나아만이 이 물길과 만났을까. 오래된 교회 터와 정교회 성당과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곳과 강 너머 이스라엘 땅을 바라보며 요르단 강을 떠난다.


과일가게들과 꽃집들과 돌언덕들을 지나 야뽁에 내려본다. 이제는 오염물질들 때문에 폐수가 흐르는 작은 물길, 이곳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원전 32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르단 강 양쪽에 만든 열 개의 도시(데카폴리스) 가운데 가장 큰 제라쉬에 간다. 점심을 먹고 나와서 오래된 나뭇그늘에 앉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따라서 흔들리고 아잔 소리 오래된 세월을 담고 흘러온다. 제우스와 아르테미스 신전과 야외극장과 무수한 열주들. 길르앗 산지의 중심지였던 제라쉬는 아직도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제라쉬 유적들

 

나무와 산이 보이는 북쪽을 지난다. 땅이 점점 비옥해지고 있다. 광야를 기억한다. 돌산과 모랫바람과 듬성듬성한 풀포기뿐인 그 땅을. 먹고 살기 위해, 신을 찬양하기 위해 해 뜨기 전부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양을 치는 가난한 이들. 그럼에도 제 몫의 빵 한 쪽만으로 생을 연명하는 그들을.


가난한 이들이 까만 눈망울로 손을 흔든다.


요르단에 오니 소박한 아이들이 활짝 웃는다. 길 가의 큰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소년이, 고기를 매달아놓은 정육점 앞에서 수줍게 내리깐 눈망울로.


극도의 결핍은 벽을 만든다. 이집트의 소년들. 말 한마디 긴장 늦추고 나눌 수 없던, 인사 한마디 따뜻하게 할 수 없던.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마음이 아프다. 친교를 가로막는 궁핍, 처절한 가난, 시나이 산 곳곳의 소년들!


축복하소서. 오늘 제가 스치고 있는 저 여인과 아이들. 도시와 골목과 골짜기와 모든 언덕들.

 


서쪽. 요르단 광야 쪽으로 내려가다가 느닷없이 내린다. 데카폴리스의 하나였던 펠라.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그곳에 푸른 나무들이 열주처럼 자라고 있다. 검은 눈에 검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물가에서 한낮을 달래고 있다. 고대부터 도시가 형성될 만큼 비옥했던 땅. 그러나 지금은 뜬구름처럼 무상한 흔적만이겐네사렛 호수의 아침     멀리 티베리아가 보인다. 남아 있을 뿐이다.


요르단을 떠나고 있다. 하와이안 무궁화가 핀 알렌비를 통해 이스라엘에 다시 들어섰다. 여전히 쥐엄나무 꽃은 붉게 피고, 국경의 이쁜 그녀들 또한 여전히 경직된 표정으로 일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걷는다. 비 오듯 하는 건 땀이지만, 마음의 폭포 또한 솟구친다. 예수, 그를 기억하는 일. 이천 년 전의 그만 기억하면 되는 것인가. 오늘날의 예수는 어떤 복음을 선포하는가. 복음은 단순하다. 평화, 사자와 어린 양의 공존. 나눔,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빵을. 사랑, 네 몸처럼. 그러나, 복음이 가능할까. 순수한 종교의 세계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정치가 얽혀있는 세계에서 복음이 가능할까. 신자유주의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


이제 이스라엘, 주님이 밟으셨던 땅이다. 오랫동안 그리웠습니다. 이 땅에 오다니, 이 땅을 밟다니! 고맙다, 고맙다. 뜨거움이 나를 사로잡아 오롯한 은총을 알게, 깨닫게 되기를!


이스라엘은 비옥하다. 국경을 나온다. 비무장 지대 안의 요르단 강을 지난다.


티베리아에 들어선다. 그들의 정결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답답해진다.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던 곳을 지난다. 갈릴래아 호수. 참 크다. 야자수와 침엽수들, 갖가지 꽃들. 갑자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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