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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11월 24일 (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신자들의 기도
[평화방송] 장위동성당 김광서 이레네오 신부님 동영상 강론입니다 ♧ 부활 제6주간 화요일(2007-05-15) ♧

114 장인복 [fbifamily] 2007-05-15

천주교 장위동 교회
 부활 제6주간 화요일(2007-05-15) 미사전례

♧ 부활 제6주간 화요일(2007-05-15) ♧ ♥♥♥ ****** [독서 : 사도 16,22-34] :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갇혔으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그 과정에서 간수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고 기뻐한다. *** [복음 : 요한 16,5-11] :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슬퍼하지만, 이 이별은 성령께서 오시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 ♥♥♥
  [입당송] : 묵시 19,6-7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알렐루야.

 [본기도] :

하느님,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시어 언제나 저희를 즐겁게 하시니, 오늘처럼 자녀 됨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희망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 :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갇혔으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그 과정에서 간수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고 기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슬퍼하지만, 이 이별은 성령께서 오시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복음).

 [제1독서] :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138(137),1-2ㄱ.2ㄴㄷ과 3.7ㄹ-8(◎ 7ㄹ)

◎ 주님, 주님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소서.
○ 제 마음 다하여 주님을 찬송하나이다. 신들 앞에서 주님께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주님의 거룩한 궁전을 향해 엎드리나이다. ◎
○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자애와 진실 때문이옵니다.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의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주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이루어 주시나이다. 주님,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나이다. 주님의 손이 빚으신 것들을 저버리지 마소서. ◎


[복음 환호송] : 요한 16,7.1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 음] :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

하느님,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 구원을 완성하시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파스카 신비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 루카 24,46.26 참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실 때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별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함께하는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고자 성령의 형태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하느님으로서 온 인류와 더 가까이 계시고자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당신 제자로 여기시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려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현세의 삶을 잘 살도록 도와주시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파견] :
 부활 제6주간 화요일(2006-05-23) 독서 & 복음산책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사도 16,22-34 / 복음 : 요한 16,5-11 *

<독서산책-1> :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와 찬미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복음을 전하던 바울로는 점귀신이 붙은 어떤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낸다. 여종은 자신의 힘으로는 악령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악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악령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악령이 나가기 전까지 여종은 얼마나 악령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이제 악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여종이 악령에 사로잡혀 점을 쳐줌으로써 돈을 벌었던 주인은 바울로가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로와 실라를 박해하고 고발한다.

오늘날에도 여종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며, 그들을 통하여 돈을 벌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포주가 아닌가? 그처럼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0-12) 하고 말씀하시며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불행이 닥쳐올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시련과 고통은 악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행복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다.

바울로와 실라는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다. 밤, 밤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이요, 특히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시편 119,62 참조).

바울로와 실라는 자신들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박해 중에 더욱더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도와 찬미, 찬양을 들으시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울로와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감옥 안이나 밖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자 간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가 그를 찾아와 격려하자 틀림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14,11.15 참조). 그래서 간수는 자신이 신들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는 그에게 중요한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바울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끌어주시고, 기도와 찬미,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말씀자료 : 경규봉 신부]

<복음산책-1> :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제자들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더니 또 어디를 가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어쩌라구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독여 주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지 못하신다"(7).

예수님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때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이기도 한 오늘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196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내고 있지요.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스스로)를 가르쳐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합니다.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보여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스승이 된다는 것,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어버이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지만, 요즘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아예 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높이 교육'이 강조되고 학생이 원하는 데로 가르쳐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물론 그 책임까지도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역할도 그렇지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생각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말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들 말이지요. 숨 쉴 공기나 마실 물과 같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예컨대, 건강이나 돈,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 아니면 평생을 투신할 직업, 자신이 믿는 종교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혹은 존경하는 선생님 등등 꼽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님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쇠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사도 16,26). 그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그를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탈옥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세상의 가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사도 16,33).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8)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묻혀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말씀자료 : 윤정환 신부]

<복음산책-2> : 박수칠 때 떠나라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제목이 있었지요. 무엇이든 한번 잡으면 끝까지 꽉 잡고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나 대중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쇠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바입니다. 아직 잘 나갈 때, 그나마 인기가 남아있을 때, 사람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퇴물’이란 소리 듣기 전에 스스로 내려오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언젠가 유럽 한 본당에 사목을 도와주러 갔었는데, 그쪽 교구 인사 시스템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본당에 발령을 받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은퇴할 때 까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좋은 측면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큰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간의 문제가 없으면 괜찮겠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목자, 혹은 신자들과 한 평생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 꽤 피곤한 일 같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정기적인 사제 인사 방식은 꽤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좌 신부님들은 1-2년, 주임 신부님들은 4-5년 만에 한번 씩 순환되니, 사목의 일관성, 지속성 면에서는 취약점이 생기겠지만, 다양성, 변화나 쇄신 측면에서는 아주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동 때 마다 하게 되는 제 작은 체험입니다. 떠날 때 마다 남게 되는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인사이동이 발표되고 나서도 걱정이 큽니다. 내가 떠나면 저 불쌍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내가 떠나고 나면 저 아이들이 입게 될 상처가 만만치 않을 텐데, 내가 떠나고 나면 기껏 안정시켜놓은 이 시스템은 어떻게 되나? 누가 후임자로 올 것인가? 그가 나보다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단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지나가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 발전했으면 발전했지 특별히 잘 안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몇일 보고 싶어 하겠지만,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 잘 잊어먹는다는 것이 또 아이들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들어 저는 ‘인사이동’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한 3년 지나면, 즉시 직면하는 어려움이 강론 밑천이 바닥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은 소리 반복합니다. 또 모든 주변 상황에 익숙하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변화나 쇄신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작년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쇄신이나 발전,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좋은 처방약은 인사이동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나게 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요.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될 때 그 사람과 함께 새로운 바람이 유입됩니다. 공동체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바람이신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생활에 대한 아쉬움으로 제때 떠나지 않으셨다면, 그간의 인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자꾸 공생활을 연기하셨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속 사업은 그만큼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성령의 도래,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에 들어있던 기본 골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부모님들께서 두 분 다 멀리 여행을 떠나실 때, 걱정들이 대단하지요. 그러나 결과를 두고 보면 서로를 위해 훨씬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개구쟁이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정작 부모님 부재 시에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잘 해야 되. 부모님 안 계시는 동안 우리끼리 똘똘 뭉쳐 잘 한번 해보자. 그분들 걱정 안하시게 열심히 하자!’....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척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챙겨주실 때는 딴 짓 하고 정신 못 차리고 그랬었는데,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나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의 육적인 눈이 서서히 정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고 나신 후에야 그분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제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협조자 성령을 보내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했던 믿음이 완전해졌습니다. 희미했던 예수님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 제자들은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령께서 오시도록 다시금 길 떠나길 바랍니다. 협조자께서 오시도록 우리 자리를 내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자료 : 양승국 신부 ]

<복음산책-3> :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만, 그 대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5).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매일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 있는 그림자가 있었지요. 그림자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게 잘해 주었고 그림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질투 많은 바람이 그에 곁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왜 그림자에게 잘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지." 하고 말했지요.

바람이 다시 말합니다. "아니에요. 그림자는 당신이 기쁘고 밝은 날만 잘 보이지, 어둡고 추울 때는 당신 곁에 있지 않았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항상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에게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가버려라." 하고 말해버렸지요. 그러자 그 한 마디에 그림자는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그 후 그는 바람과 함께 즐겁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잠시 스친 바람은 그저 조용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너무나 초라해져 버린 그는 다시 그림자를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림자야, 어디 있니? 다시 내게 와줄 순 없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말에 어디선가 그림자는 다시 나오고 조용히 그에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다만 어두울 때는 당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난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아마도 당신은 저를 바라 볼 수가 없었나 봐요.”

우리는 힘이 들 때 정작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그리고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픔은 두 배가 되어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단지 그 분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림자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히 어두움으로 표시될 수 있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는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이 잠시 계시지 않다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파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5). 파견을 받은 성령께서는 그 계획을 다시 취하시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온전히 실현하십니다. 곧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계획을 해석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당신을 충실하게 하십니다(성령의 기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 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자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장미도 심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해, 두해 그는 정성스럽게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이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귀퉁이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헤아리고 헤쳐나갈 때 분명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세상에 오셨고, 모든 일의 시작에서부터 끝을 당신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과 겸손을 보여 주셨으며, 협조자이신 성령께 당신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안배해주시는 성령의 뜻을 따라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살도록 합시다. 오늘도 그분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자료 : 오창일 신부 ]

<복음산책-4> :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본성으로 하는 세 위격 하느님

요즘 선거 열풍이 한창입니다. 여러 후보들이 다양한 공약들을 내걸고 국민들을 위해 최선의 봉사를 다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고 거리마다 현수막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선거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선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느 소속의 누가 당선되는가 보다는 어떠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당선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 소외되고 나약한 이웃들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자연과 환경에 대한 섬세한 배려도 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당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그 장밋빛 약속들을 조금의 에누리없이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당선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떠나가시면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이신 성부, 아들이신 성자,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되어 계십니다. 그래서 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사랑으로 일치하여 엄연히 한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위격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지니고 계시며 그 사랑 안에서 늘 같은 말씀을 하시고 같은 활동을 하시며 같은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서 성부 하느님께로 가시고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신다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격은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사랑만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선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후보자의 출신이나 소속, 학벌과 배경보다는 그 후보자가 지닌 봉사의 마음과 정신입니다. 국민의 종으로서,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과 정신만 있다면 어느 누가 당선되어도 상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봉사의 정신없이 다만 화려한 공약들과 그럴싸한 경력들만 내세우는 후보자들이라면 그들에게서 우리는 별다른 기대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 하나이신 것처럼 이번에 나온 후보자들도 오로지 국민에 대한 봉사로서 모두 한마음이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국민의 봉사자들이 우리의 대표로 당선될 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말씀자료 : 박종현 신부 ]

<복음산책-5> : 예수 떠나심의 의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자료 : 김웅태 신부]

<복음산책-6> :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와 정의와 심판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죄와 정의와 심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인지를 알려면 보호자(성령)가 오셔야 알 수 있다.

보호자가 오시면 우리가 그 동안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죄로 드러날 것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어떤 것이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이 올바른 것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올바른 판단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오셔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보호자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복음을 통해서 오신다. "보호자가 오시면"이라는 말은 나의 삶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무엇이 죄이고 정의이었는지를 심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묵상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짓고 있어도 죄를 지은 것인지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그런 잘못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볼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도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자기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같은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 고백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인들은 매일 매일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했던 "막가파"사건이 떠 올랐다. 막가파들을 취조하던 한 형사의 고백을 일간지 칼럼에서 읽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한 형사가 그들을 취조하던 중 설렁탕 집에 데리고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젊은이가 설렁탕을 먹다가 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던 젊은 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서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 형사님이 사주는 설렁탕이 자기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 것을 받아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그래도 자기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이 고마워서 운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몇 년전 그토록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던 젊은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고마움에 설렁탕 앞에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폭악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얼마나 순수하고 나약한 존재이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누군가가 사주었을 때 그 고마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나는 우리 사랑에 메말라 있는 이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의 사랑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를 살인마로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이고 그 책임은 그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우리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43)라는 말씀을 묵상하였다면, 사랑에 굶주려있는 이들을 그렇게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고 말씀했던 대로 우리 자신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빍혀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요,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그토록 사랑을 외쳐대면서 과연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무슨 사랑을 베풀었고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증거하였단 말인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이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판단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심판한 것이 있는가? 정말 복음의 빛으로 나의 삶을 되돌아 본적이 있는가?

나는 소그룹 복음 묵상을 몇 그룹 지도하고 있다. 매주 복음 묵상을 나눌 때마다 울음바다가 된다. 복음을 북상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와 심판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어느 자매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을 고백하였다. 정신적으로 약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4살 되었을 때 너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손으로 떼리고 그것도 안되어 빗자루가 다 망가지도록 떼렸다는 것이다. 그 때 심정같아서는 아들을 죽이도록 미워했고 죽여서도 자기 속이 풀리지 않을만큼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엄마 엄마하고 울고있었는데도 그냥 떼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어느 날 피정을 갔었는데 옆 사람을 꼭 안아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을 안아주면서 아들 생각이 나서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즉시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꼭 안아주면서 얼마나 귀한 아들이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아들은 하느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울었고 묵상 나누기하던 자매들은 그 자매의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울었다. 어쩌면 자기들의 잘못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죄를 보게 되기 때문이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 4, 12-1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속 마음을 보게 해주신다.

우리는 말씀에 빛을 받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죄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보게 된다. 우리가 게으름, 이기주의, 무관심, 불성실함, 미움, 판단, 탐욕 등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와 정의와 심판을 말씀해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다.

자기가 잘못된 생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말씀자료 : 유광수 신부]

<복음산책-7> :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의 마지막 당부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을 받으실 일과 또 하늘로 돌아가실 일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3,36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지만 그는 그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에 대하여 물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따라가겠다는 그의 충성심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희랍어 사본을 보면 요한복음 13,36절에서나 여기에서나 ‘어디로'라는 뜻으로 pau를 사용하였지만 pau는 ’어디로(where)'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또 ‘어떤 곳으로(in what place)'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곳으로 무엇 때문에 가시는지에 대하여 물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음에 이어서 하신 설명을 보면 이 사실이 더 확실해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가 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죄’라는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이며, ‘의로움’이라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것이며, ‘심판’이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죄’에 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이 ‘죄’라는 것이며”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성령께서 밝혀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 뵈었고 또 그분이 세상에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을 행하면서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하느님의 아들을 미워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의로움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의로움’”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예언자 호세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로움‘이라는 말씀이다.

호세아서 5,15절에 “그들이 죄를 깨닫고 내 얼굴을 찾을 때까지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있으리라. 그제야 그들은 환난 속에서 나를 찾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때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죄로 인하여 그들이 장차 고난을 받게 될 것이며 그때에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 23,39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시어 호세아서의 말씀의 내용을 다시 확인해주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라는 노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찬양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기다리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만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끝으로“‘심판'에 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갚으실 것을 이미 결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로 인하여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던 사탄에게 그는 이미 ‘심판’을 받아 더 이상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죄’와 또 그 ‘죄’에 대한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그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밝히실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다리셔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밝히실 것이며 또 인간을 죄로 유인하는 간악한 사탄을 밝히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예수님께로 돌아올 때에 비로소 세상은 구원되며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임할 때까지 신자들을 고아들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하여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과정을 설명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그들이 당신을 뵙지 못하게 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당신을 다시 뵙게 될 것인데 그것은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잠시 동안 예수님을 뵙지 못하는 이유가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말씀은 신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을 다시 뵙게 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다시 만나 뵙게 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잠시 동안 당신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슬프겠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 뵙게 될 때에는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주시면 이 세상에서는 ‘신비의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신자들은 ‘신비의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되며 기쁨에 넘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쁨은 누구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곧 시작될 새로운 역사에 대하여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것은 ‘신비의 하느님의 나라’의 역사이며 ‘새 약속’의 역사이다. 전에도 설명한 대로 ’신비의 하느님의 나라‘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날이 오면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여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아버지께 직접 구하여 받은 일이 없다. 율법 시대에는 그들이 대사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께 구했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언제나 예수님께서 대신 구해주셨지 제자들은 아버지께 직접 청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과월절 만찬 때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직접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아직은 그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우회적인 표현으로 설명해주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그들이 아버지께 직접 청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도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그들을 사랑하시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중개를 통하여 ‘새 약속’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고 또 믿는다고 다짐했지만 당신께서는 베드로마저도 당신을 부인하고 도망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나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염려해 주신다.

대사제들이 보낸 사람들과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는 제법 대사제의 종의 귀를 베며 대적한 사람도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잡히셨을 때는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대사제 앞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셨고, 그때 예수님의 죄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때 뒤쫓아 가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다. 아마도 그때 베드로의 눈에는 혼자서 자기 자신도 가누지 못하는 나약한 예수님만이 비쳐졌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은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다. 다음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드린 그 기도의 내용을 설명하겠다...........◆

http://ch.catholic.or.kr/changwi/default.htm

┏..가르멜△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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