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페인 포루투칼 성지순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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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장인복 [fbifamily] 201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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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포루투칼 성지순례 ▒
오전 06시 30분 성당 마당에서 공항까지 타고 갈
미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본당 신부님과 열 세분 일행을 태우고
인천 국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차 안에서 신부님께서 아침 대용으로
맛난 떡과 곶감을 주셔서 맛있게 요기하였다 ^^*
러시아워(rush hour)라 좀 걱정은 되었지만
설레이는 마음으로 공항에 예정대로 09시 00분 도착하였다
타 본당 교우 세분과 가이드 요안나자매와
스페인,포루투칼 성지순례팀 열 여덞분 모두 합류하여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여행사에서 주는 파란 스카프를 목에 둘러 같은 일행임을 표시하였다
수화물 탁송을 하고 출국 수속을 한 후 공항에서
오전11시 00분 (핀에어 항공편) 탑승하였다
[ 눈에 나라 핀란드 헬싱키 공항 ]
헬싱키공항에서 2시30분간 경유하여
마드리드행 핀에어 연결편으로 탑승하였다
마드리드 공항에 내려앉은 시각은
마드리드 시각으로 밤 20시경. 어둠 속에 비 바람이 몹시 불지만
이국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 마드리드에 드디어 착륙하였다
마중나온 현지 가이드 조각가 김억신 프란치스코님과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대기한 전용버스에 올라 정해진 숙소로 갔다.
프라도거리를 따라 마드리드의 가장 큰 기차역인 아토차
아토차 역에 식물원세계적으로 진귀한 각종 식물과 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드리드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만사나레스강(江)에 임한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연강수량 419mm로 건조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겨울 평균 기온은 -1℃∼7℃, 여름은 15℃∼30℃이다.
에스파냐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산업도시로서의 중요성도 크며, 도로·철도 및
항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구상으로는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舊)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街)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 ·호텔 ·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街)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 ·카스티야 ·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항공기·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제지.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란비아 거리 서쪽 끝에 있는 광장이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na).스페인의 대표 작가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꼭대기에는 5개의 대륙을 나타내는 5명이 지구를 들고 있다.
말라빠진 말을 타고 있는 돈키호테와 뚱뚱한 산초 판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겨운 아저씨가 연상된다.
그 뒤에는 세르반테스가 앉아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인 알칼라 문(Puerta de Alcala)
카를로스 3세가 1769년부터 광장 부근에 난립해 있는 집들을 정리하고
광장과 문을 만들기 시작, 1778년 문이 완성됐다.
스페인 왕궁(Piacio Real de madrid)
1734년 화재로 전소된 곳에 부르봉가 왕가의 시조이며 베르사이유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Felipe Ⅴ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돌과 화강암으로만 건축, 1764년 완공되었고
1764년 Felipe Ⅴ세 아들인 Carlos Ⅲ세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후안 까를로스 현 국왕의 조부인 Alfonso ⅩⅢ세가
왕정의 문을 내린 1931년까지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었다.
한면의 길이가 140m에 이르는 장방형의 건축물로서 왕궁안의 방은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2,850여개에 달하며 19세기식 내부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궁은 초기 안달루시아로부터,
이태리의 르네상스 거장에 이르는 그림과 타펫화들로 되어 있다.
1931년까지 국왕의 거처였으며, 현재는 박물관, 영빈관으로 사용되며
국빈리셉션 등 국왕공식행사를 왕궁에서 거행하고 있다
왕궁 사진 촬영 금지
왕궁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모두 2,850여 개나 있어
이 많은 방 중에 관람객을 위하여 개방된 방은 모두 23개라고 한다
그 중 21개방을 관람하였는데
고야가 밑그림을 그린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가 4면을 장식한 방도 있었다.
궁정화가 생활에 염증을 느낀 고야는 작품 속에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약한 그림들을 슬쩍슬쩍 그려 넣는 심술(?)도 부렸다.
250년 전에 만들어진 양탄자가 깔려있는 ‘양탄자의 방’,
미국 부시 대통령과 구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으며,
EU(유럽연합)의 역사적인 탄생을 만들었던 ‘기둥의 방’,
거울을 통해 본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19C 거장들의 그림이 걸려있던 방,
그 밖에 화려하게 모자이크된 대리석들...
145명과 동시에 연회를 할 수 있다는 대연회장도 대단하였다.연회장 천장에는 스페인을 중심으로 그려진 당시의
세계전도가 부조되어 있었고,400여 개의 촛불을 밝힐 수 있는
15개의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있었다.
만찬 때 사용하던 다이아몬드가 박힌 크리스탈 글라스를 비롯하여
화려한 금·은제 그릇들,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과 같은 고악기(古樂器).
19세기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중국을 선망한 <카를로스 4세> 방은
온통 중국풍으로 장식했고 접견실 옆 흡연실 역시 중국풍이 일색이다
특히 천장에 그려진 고야의 프레스코화나 화려한 모자이크 대리석들은.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온갖 것을 금,은 보화로 장식한 궁전을 둘러보면서
그 화려함의 극치에 얼굴을 꼬집어 보며 감동과 탄성의 연속이였다
궁전 맞은편에 있는 알무대나 성당
성당 꼭대기 부근의 둥그스레한 마감은 이슬람문화의 영향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