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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신부님강론
연중 30주일 (가해)

199 양권식 [ysimeon] 2008-10-25

연중 30주일 (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네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기에, 나는 얼마나 하느님을 그리고 신자 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는지 반성을 하게 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1독서는 그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출애굽기의 제 3부인 계약 편으로 계약의 중심 사상인 이웃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특히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그네, 과부, 고아와 같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도우라는 사랑의 기초적 규정입니다. 이 출애굽기가 쓰여질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남자들이 죽게 되고 그에 따라 많은 과부와 고아가 생겼으며 전쟁으로 말미암아 집과 가족을 잃은 나그네가 수없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하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아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을, 자선이나 애긍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곧 정의의 차원에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노예 생활 중에 압제와 억압, 수탈과 가난 속에서 살았던 뼈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또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어떤 이들을 노예나, 부리는 사람으로 예속시키거나 억압해서는 안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은 의무이며 정의 차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 대한 충고나 권유가 아니라 곧 사회적 정의에 기초한 명령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맨 먼저 체험한 하느님께서는 약자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네들 스스로가 에집트에서 약자가 되어 있을 때, 약자들의 편에서 강자의 손 즉 에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난한 약자를 괴롭히거나 소외시키는 것은 곧 하느님을 괴롭히거나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성서상에 나타나는 고아나 과부는 사회적으로 그들을 보호해 줄 아무런 장치가 없는 이들을 뜻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은 곧 하느님만이 그들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서적 가난이란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서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예외 없이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가난을 강조하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말씀은 그 어떤 이도 그의 가진 바에 근거해서 누구에게 예속되어서도 아니 되며, 예속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어떤 가치보다 생존의 권리가 우선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독서는 이자를 받을 권리 즉 채권이 생존권보다 우선이 되어 추징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나의 보장받은 위치가 결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또한 재물에 대한 권리가 타인의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같은 차원에서 중요한 으뜸 계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우리 고유의 정신과 같은 경천애인의 말씀으로, 모든 율법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활하시던 이스라엘에는 율법 조항이 자그마치 613개 조항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 무엇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 조항이 248개 조항이었고,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이 365 조항이나 되었습니다. 이 모든 조항이 경천애인의 정신 속에 만들어지고 실천되어야 할 율법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보다도 그 조문 하나 하나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강조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은 잊혀져 버리고, 율법은 오히려 인간을 더욱 얽어 매는 굴레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더 율법의 정신을 되새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갈 수 있는 많은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파국이 발생해도 궁핍하지 않을 만큼의 현금도 있어야 하겠고, 도둑이 들끓어도 안전할 담장을 가진 주거조건과, 불량한 이들의 탐욕에도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 등은 꼭 있어야 할 것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을 갖추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학벌, 지위, 명예 등. 경제적 사회적 개인적 가정적으로 행복과 안전을 지켜 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율법학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만 했던 규정 612가지 보다 도 훨씬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고 그 많은 조건들을 준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쓰고 삽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너무도 애쓰며 살아갑니다.

        과연 그렇다면 그 조건들과 준비가 우리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높은 담장이나 경비만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듯이, 그러한 조건과 준비들만으론 우리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장치와 그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추구가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는 현실을 우리는 무척이나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행복과 안전은 조건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약하고 있듯이,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행복을 느끼 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과 몸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장 행복하고 안전하게 보호해 줄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제일가는 계명이란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지켜 줄 것이고, 사랑만이 우리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들이 가진 바 힘이 적어서나 재산이 적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사랑의 부족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불행하다고 하면 사랑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 진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을 먼저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불행을 느끼기 전에 이미 우리 눈에서 사랑의 눈빛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사랑의 눈빛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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