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리64] ‘가계 치유’(家系 治愈) 은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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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오규철 [kcoh] 200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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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치유’(家系 治愈) 은사에 대하여
근래 신심 운동 중에 소위 ‘가계 치유’(家系 治愈) 은사란 것을 주장하며 행하는 분들이 생겨났습니다. 가계 치유란 자신의 가계 안에서 어떤 조상들이 무엇인가 상처나 한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 있었거나 혹은 조상들이 지은 죄가 있어서 그 영혼들의 좋지 않은 영향이 현재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 미치기 때문에 연미사나 기도를 통해서 치유 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나온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정신 분석학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사람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가까운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어린 시절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 안에 상처를 준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은 채 상처나 한(恨)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정신 분석학적인 심리 치료의 한 방법으로 이러한 상처나 한을 상담을 하여 찾아낸 후 풀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상처에 대한 아픈 기억을 찾아내서 마음의 건강과 평화를 찾도록 해주는 것이 정신 분석에 따른 심리 치료의 가계 치유인 것입니다.
둘째는 유교의 조상 제사와 풍수지리학의 영향입니다.
한국인들은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통적 사상이나 관습에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일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나 집안의 나쁜 상황이 조상 묘 자리를 잘못 썼다거나 조상의 영혼들이 잘못되어서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여깁니다.
셋째는 한국 개신교의 영향과 가톨릭 일부 신자들의 그릇된 성모 공경 모임(상주 데레사, 나주 율리아, 베이사이드의 성모 등)의 영향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1997년과 1999년 사이에 가계 치유에 관한 책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개신교 출판 부문에서 베스트셀러를 2년 가까이 기록했으며, 개신교계에 ‘가계 치유’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가계 치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탈출기 34장 7절의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걸쳐 삼대 사대까지 벌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야훼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 돌 판을 새로 새겨 주시면서, 계명에 대한 하느님의 강력한 의지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앞 뒤 문맥 다 잘라(탈출기 34장 6-9절을 꼭 읽으세요!) 무시해 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마지막 문장만 떼어 가계(조상)의 저주가 흐르니 치유를 받으라고 주장합니다.
문자 그대로 조상 죄가 3~4대까지 간다면 하느님의 축복은 자손 천대까지 간다는데(탈출 20,6 ; 34,6) 어찌 기드온의 아들, 사무엘의 아들, 다윗의 아들들은 3대는 고사하고 아들 대에서 아들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됩니까? 탈출기 34장 7절 전반부에 분명히 자애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하느님을 먼저 설명하고 있는데 어찌 뒤에 있는 문장만 강조하는 것인지? 그들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그런 저주 하나 못 끊는 십자가와 예수님의 성혈이라는 것입니까?
가계 치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알코올 중독, 강간, 폭행, 자살, 질병 등의 수많은 병적 행동들이 다음 세대에서 종종 반복된다”, “많은 신자들이 개인 구원을 통해 조상의 부정적 영향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을 삶에 적용시키지 못하면 여전히 죄성(罪性)은 대물림 된다”는 등 ‘저주의 대물림’과 ‘가계 치유’를 말합니다,
이런 주장과 관점이 일정 부분 맞는 것 같으나 비그리스도교적인 환경과 상황에서 온전히 변하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신화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라는 신화 안에 안주할 가능성이 높아져 세상만사를 ‘내 탓’이 아닌 ‘조상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모든 문제를 조상의 저주 탓으로 돌려 버릴 때 더 이상 개인의 책임은 사라져 버립니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죄를 짓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이렇게 된 게 다 조상의 저주 탓이야!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되면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그 죄부터 끊으려는 생각이나 노력도 전혀 없게 될 뿐더러 회개는 아예 생각조차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치유의 하느님이십니다. 저주를 축복으로(신명 23,6) 바꿔주시는 분이 하느님 이십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예수님의 십자가 성혈과 부활의 생명으로 얻어진 의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죄는 물론이고 (세례 이후 지은 죄는 고해성사를 해야 되지만) 우리 조상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단절시켰습니다(로마 4,5 참조). 결론적으로 ‘가계 치유’를 주장하며 기도나 연미사를 강권하는 것 등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며 비성경적이고 비교리적(非敎理的)인 것입니다.
개인의 죄는 개인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며, 세례를 받게 되면 그 개인의 죄가 주님의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가톨릭 신앙입니다.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탈출 20,6).
- 오용호 신부 | 인천교구 관리국장 ['참소중한당신' 2006년 2월호 중] -